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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한글) | 카톨릭 중앙당 |
독일어 명칭 | Deutsche Zentrumspartei |
영어 명칭 | German Centre Party |
설립일 | 1870년 12월 13일 1945년 |
대표 | 게르하르트 보이트치크 |
의석수(하원) | 0석 / 631석 |
의석수(상원) | 0석 / 16석 |
1 개요
제2제국 시기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중도우익 계열의 정당. 흔히들 중앙당이라고도 많이 부른다.[1] 1870년 문화투쟁의 와중에 카톨릭을 대변하기 위해 형성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꾸준히 원내 제2,3당 자리를 차지하면서 연정을 구성하는데 캐스팅보드를 쥐곤 했다. 이후 1933년 히틀러에 의하여 해산됐다가 종전 후인 1945년 재건됐지만, 다수의 옛 지지자와 당원들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으로 소속을 옮기면서 힘을 잃어 소규모 지역 정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당원수가 현재 600명(...)이다... 안습...
2 역사
2.1 형성
카톨릭 중앙당의 사상적인 뿌리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싹트기 시작한 정치적 카톨릭 주의였다. 1850년대 무렵부터 독일 전체를 대표하지는 못했지만 바이에른, 바덴등 몇몇 왕국에는 카톨릭이 정당으로 세력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편 1860년대 이후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쓸면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필두로 한 독일의 민족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카톨릭 신자들이 조국보다는 교황과 종교에 맹목적으로 충성을 한다고 비난을 일삼으면서 독일 내 카톨릭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문화투쟁(Kulturkampf)를 시작한다. 당시 반동주의자이던 자유주의자이던 상관없이 개신교도들은 카톨릭을 미친듯이 깠다. 지못미. 이러한 과정에서 위기감을 느낀 카톨릭 신자들은 굳게 단결했고 그 결과 1870년 카톨릭 중앙당이 탄생한다.
2.2 제2제국 시기
카톨릭 신도들의 전폭적인 지지[2]를 힘에 업은 카톨릭 중앙당은 1874년 선거에서 91석을 차지하면서 좌파계열 독일 사회민주당과 함께 비스마르크에 반대하는 정당의 대표격이 된다. 여기에 당시 독일 내 주요 소수민족이었던 폴란드인들[3]을 지지세력으로 흡수한 것은 보너스. 그런데 정작 중앙당은 비스마르크의 반 폴란드 정책에는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뒤통수
하지만 이후 당 내에서 "세속적인 영역은 교황의 의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당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자"라는 의견이 다수의 목소리가 되었으며, 1890년대 프로이센 당국과 바티칸사이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자 카톨릭 중앙당은 비스마르크 정권의 지지 세력으로 정치적 입장을 선회한다. 모든 영역에서 지지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입장 충돌도 꽤나 잦았지만 비스마르크의 독일 내 정책은 대부분 지지를 표명해준다.
2.3 1차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교황께서는 전쟁을 그만 둘 것을 모든 카톨릭 신자에게 호소했지만 1차 대전을 독일의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위대한 모험이라고 선언한 중앙당은 전쟁 기간 내내 채권을 비롯한 독일의 전쟁 수행 노력을 아낌없이 지원한다. 물론 당내에서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 시기 당강령에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내걸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마저 계급투쟁 대신 조국수호라는 슬로건을 외치면서 전쟁을 지지하는 마당에 카톨릭우파인 중앙당이야 언급할 가치조차... 이후 1918년 독일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중앙당은 사민당이 주도한 연립 내각에 참여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원내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며 국민의 지지를 재확인한 중앙당은 바이마르 헌법의 수립을 통해 그들이 창당때부터 꿈꿔왔던 카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 사이의 평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공교육 내에서 종교를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지와 같은 몇몇 문제를 놓고서는 심한 대립을 빚기도 했지만 1919년부터 1932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중앙당은 모든 연립 내각에 참여하면서 수권정당으로써 최선을 다 했지만 대공황이 터지고 사회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망했어요. 이 시기에 중앙당은 콘스탄틴 페렌바흐, 요제프 비르트, 빌헬름 마르크스,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라는 5명의 총리를 배출했지만 내외의 어려움속에 안습의 정치력을 보여주면서 갈팡질팡하였다.
특히 1930년 이후 취임한 하인리히 브뤼닝과 프란츠 폰 파펜은 여당인 중앙당조차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했으며, 정권연장을 위해서 히틀러와 나치당을 끌어들이는 등 온갖 추태를 보여주다가 자멸하면서 사실상 정권을 나치당에 갖다바치게 된다. 이들의 안습 행보는 브뤼닝 내각과 파펜 내각에 자세히 설명되어있으니 해당항목을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