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아데나워

역대 독일 총리
제3제국1대2대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콘라트 아데나워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195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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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엘리자베스 2세콘라트 아데나워1954 - 존 포스터 덜레스
풀네임Konrad Hermann Joseph Adenauer(콘라트 헤르만 요제프 아데나워)
출신 정당카톨릭 중앙당
기독교민주연합
생몰년1876년 1월 5일 ~ 1967년 4월 19일 (만 91세 4개월 14일)
재임기간1949년 9월 15일 ~ 1963년 10월 16일 (만 14년 1개월 1일)
Es ist Schicksalsfrage Deutschlands.

이것은 독일의 운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Wir stehen vor der Wahl zwischen Sklaverei und Freiheit.
우리는 예속과 자유 사이의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Wir wählen die Freiheit!
우리는 자유를 택했습니다! - 1952년 12월 3일 연방하원 연설에서

1 개요

현대 독일의 국부

독일연방공화국(당시는 서독)의 초대 총리로,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직을 역임했다. 독일이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다시 부흥하게 했을 뿐 아니라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잘 파악, 미국-영국-프랑스와 굳건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전범국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데도 크게 이바지하며, 민주주의가 독일 사회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게 한, 문자 그대로 '건국의 아버지'.

2 생애

2.1 유아기 ~ 청년기

1876년 1월 5일에 쾰른 지역의 독실한 카톨릭 가문[1]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2] 그가 청년 시절일 무렵은 한창 비스마르크라인란트 지방을 주축으로 하는 카톨릭 세력을 탄압하는 '문화투쟁(Kulturkampf)'에 전념하고 있는 시기였고, 이후 그가 평생 지니는 프로이센에 대한 반감의 근원이 된다. 1894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이후,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00년에 쾰른 법원에 변호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 무렵 독일은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폐가 좋지 않았던 아데나워는 병역의무를 면제받는다. 신의 아들

2.2 쾰른 시장 재임기

카톨릭 중앙당 소속으로 1906년 쾰른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아데나워는, 이후 1917년부터 나치스가 집권하는 1933년까지 무려 17년에 걸쳐 쾰른 시장을 역임한다.

그가 처음 쾰른 시장을 맡았던 시기는 1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와중이므로, 아데나워는 후방 군수기지로서 쾰른의 기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한창 영국에 의해 해상봉쇄가 실시되면서 물자부족의 심화[3]로 인해 가중되던 시민들의 고통을 줄여주고자 각종 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아데나워 본인에게도 이 시기는 비극이었던 것이 첫 부인을 전쟁 말기에 병으로 잃고 만다.

전쟁이 끝난 이후 아데나워는 누가 안티 프로이센 아니랄까봐[4] '기존의 프로이센을 해체하고 라인란트 지방을 자치권을 얻은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재편해야 한다'라고 정부에 제안하지만 당연히 정부의 반응은 "거부한다."

한편 전쟁 이후 배상금을 갚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라이히스마르크를 마구잡이로 찍어내고 당연히 그 결과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수상이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새로운 화폐인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는데, 문제는 슈트레제만이 '다른 지역이라 쓰고 프로이센이라 읽는다을 먼저 살리기 위해 라인란트 지방에는 렌텐 마르크를 공급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해 버린 것. 이같은 독일 정부의 움직임은 안 그래도 반 프로이센 감정이 팽배한 라인란트 지역의 분리주의자[5]들을 폭발시켰고.. 마찬가지로 뚜껑이 열린 아데나워는 급기야 슈트레제만에게 '니네가 정 그렇게 나오면 우리도 먹고 살기 위해서 프랑스 군을 라인란트에 주둔시키겠음!'이라고 선포한다.[6]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 군과 '라인란트 자치정부' 문제에 관한 협상도 진행시킨다(...)

이후 1926년 연립정권에 참가한 중앙당은 아데나워에게 총리가 될 의향이 있냐고 제안을 했지만, 연립상대였던 독일인민당이 슈트레제만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해야지 아데나워의 총리임명을 동의하겠다는 조건을 고집했고, 위의 사건들로 인한 앙금이 남아있던[7] 아데나워는 쿨하게 총리직을 포기한다. 이 때 아데나워가 총리를 차지했더라면 바이마르 공화국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나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을지, 아니면 다른 당시의 우파 정치인들처럼 히틀러에게 이용당한 뒤 팽 당했을지는 상당히 궁금한 대목.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지.

2.3 나치 독일 시기

독일 전역에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혼란에 힘입어, 양 극단 정치세력인 나치즘과 공산당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이러한 점은 보수 카톨릭 세력이 강한 라인란트 지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 나치는 서서히 지방의회에서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우파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경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쏟았고, 나치즘에 대해서는 경제가 안정되면 사그러들 것이라고 간과하였다. [8] 그리고 아데나워가 나치즘의 위험성과 불관용, 배타성을 깨달았을때는 이미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한 뒤였고 그야말로 망했어요.

쾰른 시 의회와 프로이센 주 정부는 나치에 의해 해산되었고, 그 역시 쾰른 시장직에서 쫓겨났다. 나치의 집요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치는 아데나워의 금융 계좌까지 동결시키면서 그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데나워는 신변의 안전조차 안심할 수 없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도움으로 수도원에서 약 1년간 은신생활을 한다. 다만 히틀러의 개인 건축가이자, 나중에 군수장관까지 맡는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히길, 그린벨트를 비롯한 아데나워의 깔끔한 쾰른 시가지 개발에 총통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그런 놈이 전쟁 일으켜서 쾰른을 폭격으로 홀라당 태워먹은건 크나큰 함정 다만 아데나워의 정치 성향상 그를 활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장검의 밤 직후 그를 쾰른 시장 재직 시절 각종 직권 남용의 혐의로 투옥시킨다. 누가 직권 남용인데? 다행히도 곧 풀려난 아데나워는 이후 2차 대전 시기까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은둔 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터진 이후 원래 미쳐있던 나치가 더더욱 광기를 부리면서 그 역시도 다시 강제노동수용소에 투옥된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이미 첫 아내를 잃는 비극을 겪었던 아데나워의 아픔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반복된다. 그와 함께 수감된 두번째 아내 아우구스테 친서(Auguste Zinsser)는 수감 중에 겪은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결국 1948년 사망하고 만다. 냉철해보이고 실제로도 그랬던 아데나워이지만, 두번째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에게도 큰 상처였고, 이로 인해 생긴 우울증은 이후 평생 그를 괴롭힌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총리를 지냈으며 카톨릭 중앙당 동료였던 하인리히 브뤼닝은 실처한 직후 아데나워를 만나고는 그의 우울증에 놀라서 "이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군."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2.4 연합군 군정 시기

쾰른을 점령한 미군은, 행정직 경험이 있으면서 나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을 관직에 앉혀 행정력의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했고, 아데나워는 그에 딱 맞는 적임자였다. 그는 미군정에 의해 쾰른 시장에 다시금 임명된다. 이후 쾰른은 미군 관할에서 영국군 관할로 넘어가게 되고, 아데나워는 경제 정책 및 전쟁 중 쾰른 폭격 문제 등을 놓고 영국군과 사사건건 대립하다가 결국 45년을 넘기지 못하고 쾰른 시장직에서 해임되고 만다[9] 하지만 이 해임은 오히려 아데나워에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던 것이, '필요하다면 점령군과도 맞설 수 있는 강단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갓수가 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유있게 신당 창당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민당의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된 그는 1949년 5월 서독 제헌위원회장의 자리까지도 오른다. [10] 그리고 이어진 49년 8월의 초대 의회선거에서,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은 슈마허의 사민당을 제치고 승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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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거 포스터
Mit Adenauer,

아데나워와 함께
für den Frieden, die Freiheit,
독일의 평화, 자유,
und die Einheit Deutschlands,
그리고 통일을 위해
darum CDU
그러므로 기민당

여담이지만, 만약 이 선거에서 사민당이 승리하고 슈마허가 총리 자리에 오른다면 독일의 노선은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자유 시장경제 신봉자에 골수 반공주의자로 친서방적이었던 아데나워와 달리, 부분적인 계획경제에 미-소 사이의 중립을 주장했던 것이 슈마허의 이념이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이승만여운형

2.5 1기 아데나워 내각(1949~1953)

1949년 9월 15일 아데나워는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 출신의 테오도르 호이스 연방대통령에 의하여 서독을 이끌어나갈 초대 총리로 임명된다.[11]

총리로서 아데나워의 첫 번째 중요한 행보는 바로 구 나치 전범들을 사회로 통합하는 문제였다. 그는 연방하원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연합군이 군정기간 동안 실시한 탈나치화 과정에서의 맹목성을 비판하면서, 전범들을 양분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무분별한 나치 경력자들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극단적 민족주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뿐으로, 고위공직자를 비롯한 주요전범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거세되고 처벌받아야 되겠지만, 특별한 목적의식없이 사회의 흐름에 따라 나치에 동조한 자들(Mitläufer)에 대해서는 독일 사회가 다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연합군이 이 시기 단순 동조자들에게 내린 유죄판결에 대해서도 사면조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실제로 그가 이끄는 기민당은 과거 나치 동조자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다는 조건 하에 이들의 입당을 허용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당원 출신으로 후일 그의 뒤를 이어 3대 총리로 재직하게 되는 쿠르트 키징어이다. 그리고 이 과거사로 인해 키징어는 총리 재직 시절 열혈 좌파 여성에게 뺨을 후려맞았지

외교적으로는, 이미 1920~30년대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12] 였던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고, 패전국의 지위였던 독일이 다시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질서에 편입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분단의 고착화를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서유럽 질서의 편입되는 과정에서 서독이 가입하는 두 조직이 바로 나토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이 행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 기존까지 독일의 보수진영에서는 특별한 길(Sonderweg/존더베크)[13]이라고 불리는 독일 고유의 아리안족 스러운 발전상을 이데아로 내세우면서 서유럽 식 민주주의와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14] 아데나워의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보수세력을 완전히 혁신시키고 서구 민주주의에 충실한 세력으로 독일 보수 진영을 재편한 것이다. 게다가 나토에 가입했으니 이제 전쟁이 나면 빼박캔드 서유럽 진영과 함께 전쟁을 치루어야 했던 것은 덤. 이제 히틀러같은 돌아이가 등장해도 양면전쟁같은 미친 짓을 벌이지도 않아도 됐다 이 말이다. 그리고 독일이 서유럽과 함께 걷게 됐음을 보여주는 신뢰의 징표로 아데나워는 연합군에게 루르 공업 지대의 해체를 용인해 준다. 당연히 이 조치는 독일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적 슈마허는 아데나워를 '연합군의 총리'라고 까지 비난한다. 이런 비난에 아데나워는 "연합국은 나에게 독일이 그들의 안전보장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에야 공업지대 해체를 멈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민당은 최악의 결과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라고 대꾸하며 뚝심있게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친 서방적인 행보와는 정 반대로, 아데나워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강경한 모습을 꾸준히 내비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동프로이센을 둘러싼 전쟁 직후 스탈린에 의해 일방적으로 설정되었음을 주장하며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한 일이다.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한 점은 단순히 외교뿐만이 아니라 국내정치적인 계산도 충분히 깔려있었다.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등에서 추방되어 서독으로 넘어온 1000만 명의 추방민(Vertrieben)들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력[15]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친 과격한 행동은 연합국들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방민 연합회의 로비나 활동을 어느 정도는 제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데나워가 과연 정말로 2차대전 이후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치적인 계산에 입각한 쇼에 불과했는지는 전문 연구자들마저도 그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형편이다. 나치에 대해 보여준 꽤나 온정적인 행보나 주데텐란트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의 피해보상마저 요구했던 것을 보면 정말 믿었던 거 같기도..

한편, 연합군 군정 시기부터 독일이 정말로 주체적인 지위를 국제 사회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재무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아데나워는 1950년 무렵에 재무장을 시도했다. 그런데 2차 대전의 기억이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연합국, 그 중에서도 특히 호되게 당했던 프랑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여 일단은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해 6월 발발한 6.25 전쟁은 아데나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다. 하여간 김일성은 남 좋은 일만 다 시켜준다니까. 일본 경제 부흥에, 서독 재무장에 미국의 정예군들은 죄다 남한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고, 프랑스 군 역시 베트남에서 호치민 치하의 공산군과의 전투로 인해 주력이 빠져나가자 서독 내부에서 뿐만이 아니라 서유럽 전역에서 소련의 침공에 대한 공포가 급부상하면서 연합국 측에서는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인천 상륙작전 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자 독일에 대해 알레르기에 가까울 정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독일 자체의 군에 대해서 다시 반대하며, 유럽 방위 공동체의 일부로 독일을 재무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플러베 계획(Pleven Plan)을 제시한다. 독자적인 군대를 원했던 아데나워에게 이런 프랑스의 주장은 내키는 것이 아니었지만, 프랑스의 태도는 강경했고 아데나워는 이 안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아데나워 외교정책에서 또다른 주목할 점은 바로 이스라엘에게 막대한 배상액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참모와 내각은 아직 독일 내부의 경제가 피폐하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막대한 배상액은 독일 재정에 크나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밝혔지만, 아데나워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고수했다.

2.6 2기 아데나워 내각(1953~1957)

1953년의 동베를린 지역에서 생필품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일으킨 소요사태에 대한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아데나워에게 손쉽게 재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물론 정치 100단 아데나워 옹이 가만히 앉아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지는 않았다. 사민당이 정권을 잡으면 서독에서도 이 모습이 재현될 것이라고 신나게 디스를 걸어주신건 덤.[16]

한편 1950년에는 프랑스의 강력한 반대에 의하여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아데나워의 재무장의 꿈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1950년 당시에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던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개념이 푹 삭혀서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자 꽤나 익숙하게 연합국 지도자와 일반인들에게 다가왔고 냉전이 세계 곳곳에서 격화되면서 미국은 유럽에서 소련을 억제할 세력을 키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의 여론은 플러베 계획에 대해서조차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프랑스인들은 후일 아데나워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정치인이 독일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을 때그런데 아데나워가 역대 독일 정상중에서 가장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라는 게 함정 금권주의로 따지면 이 분이 한 수 위로 평가받으려나, 독일의 재무장이 어떤 부메랑으로 그들에게 돌아올지에 대한 확신을 도무지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참패로 프랑스 내부의 여론은 더욱 강경해진다. 자신들이 과거 식민지로 통치하던 민족들에게조차 패하였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군사적인 자신감을 크게 떨어뜨리면서 독일에 대한 공포심이 상대적으로 커졌고,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 군이 주력이 유럽 본토로 복귀함에 따라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논리를 펼치는 목소리가 드높아 진 것이다.

같은해 국공합작 민족전선과 공산당마저 손을 합쳐, 프랑스 의회는 독일의 재무장안을 부결시킨다. 이에 아데나워는 연합국 측과 재무장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상황은 아데나워에게 유리했다. 미국의 여론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안보를 소홀히 하는' 프랑스에 대한 염증으로 가득차 있었고, 영국은 소련의 도발을 방지하는 한 편으로, 유사시 독일의 군국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라인란트 지방에 자국군 4개 사단을 배치시키겠다면서 프랑스를 설득하고 있었다. 아데나워 역시 대량 살상 무기의 포기 및 군함 건조량 제한 등의 군비 축소를 약속하고, '프랑스 의회의 독일 재무장 안 부결이 독일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며 '이는 네오나치의 부활을 이끌 수도 있다'는 식의 은근한이 아니라 대놓고 협박도 내세우면서 프랑스를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아데나워는 연합국에게 귀중한 승리를 거두면서 연방군(Bundeswehr)의 설립을 허가받는다.

아래는 이 무렵 한창 논란이 된 구 나치 독일군 출신 장성들의 복귀문제에 관한 아데나워의 절묘한(...) 인터뷰

기자 : "나치 시기 독일 장성들도 연방군의 수뇌부로 합류하게 되는 건가요?

아데나워 : "아니 그러면 이제 갓 임관한 20살 짜리 젊은이를 장군 자리에 앉힐 수는 없는거 아니겠소?"

그리고 시장경제의 확고한 신봉자였던 경제부 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활약에 힘입어 이 무렵 독일의 경제는 전쟁 발발 이전의 수준을 회복한 데 이어,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소위 말하는 라인 강의 기적(독일어로는 Wirtschaftwunder[17])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축구에서는 베른의 기적이 있었지. 물론 암페타민 빨고 이긴거지만

이어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 번 중요한 외교적 성과를 쟁취해낸다. 전쟁이 끝난 후 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수많은 독일군 포로들은 시베리아 및 도처의 노동수용소에서 억류되어 있었다. 이들의 귀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서 아데나워는 흐루쇼프 서기장과 회담을 갖는다.[18] 2차 대전의 앙금도 앙금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만남이었던 만큼 회담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데나워의 전쟁 포로 귀환 요구에 대하여 흐루쇼프는 그들은 침략자일 뿐만 아니라, 각종 학살 및 강간 등 범죄를 저지른 전범이라고 응대했고, 아데나워 역시 전쟁 후반기 독일 땅으로 진격한 소련군의 행태 역시 별다를 바 없었다고 맞받아쳤다. 어쨌든 결과론적으로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53년부터 55년에 걸쳐 전쟁 후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들은 귀환한다. 그리고 당연히 아데나워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대상승.

2.7 3기 아데나워 내각(1957~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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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ne Experimente
실험은 그만

이미 8년이라는 국정 운영을 통한 그의 노련함에 유권자들은 신뢰를 보냈으며, 특히나 그를 열렬히 지지해 준 귀환 포로 출신 유권자들의 힘에 힘입어 아데나워와 기민당은 대승을 거둔다. 정말 역대급 대승인 것이, 2015년 현재까지 약 70년의 독일 연방 공화국 역사속에서 특정 정당이 과반수를 넘겨 연정을 구성할 필요조차 없었던 경우는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3기 아데나워 내각을 지배한 가장 큰 화두는 베를린 문제였다. '육지의 섬'이라고 불리면서 동독 영토의 한 가운데에 턱 박혀있는 서베를린으로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낀 동독 시민들, 특히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지식인 층,의 탈출 행렬이 쉬지 않고 이어졌고 이는 동독 정권에게는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서베를린의 존재는 서방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다. 냉전시대 공산주의 세력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방 진영이라는 그 상징성으로 인해 동구권의 무수한 위협을 감내해야 했던 것. [19] 그리고 이런 점들을 노려 동독 공산당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와 소련의 흐루쇼프는 베를린을 자유시로 지정하자고 제안이라 쓰고 일방적인 통첩이라 읽는다.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련은 서독에서 베를린으로의 통행권 문제를 다루는 권한들을 동독에게 넘길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흐루쇼프의 제안은 서방을 딜레마로 몰아넣었다. 베를린을 자유시로 지정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철수시킨다면 동독과 소련이 서베를린을 점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부하자면 앞으로의 베를린 통행권을 위해 동독과 직접 교섭을 해야 했다. 이는 아데나워 외교 정책의 제1 원칙인 할슈타인 원칙[20]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자유시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동독을 독자적인 협상 주체가 아니라 소련의 '대리인'으로 정의하고 동독과 협상을 하겠다고 아데나워 정부에게 통보했지만 아데나워의 대답은 한마디로 ㅈ까. ㅗ. 동독과 교섭하는 그 순간, 미국과 단교하겠다는 것이 아데나워의 단호한 결의였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아데나워를 외곬 늙은이라고 깠다. 한편, 영국이 부랴부랴 자유시 문제를 둘러싼 소련과의 접촉을 진행하면서 시간을 끌기에 성공, 1년 후 파리에서 이 문제를 전승국끼리 논의하자고 합의한다. 하지만 1년 뒤 미군의 대 소련 정찰기 격추 사건으로 망했어요.

베를린 자유시 문제에 관한 그의 완고한 태도에서 보이듯이, 이 무렵부터 아데나워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조심성과 날카로운 정치 감각을 조금씩 잃어가기 시작한다. 베를린 문제에 관련해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서 미국과 영국 다만 프랑스와는 사이좋게 지냈다. 샤를 드 골과는 죽을때까지 영혼의 베프였거든. 역시 외곬과 외곬은 통하는군 외교관계자들은 딥빡 깊은 짜증을 느꼈고 [21], 독일 내의 정치에서도 엄청난 병크를 일으킨다. 바로 다음 선거에서 연방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 아데나워가 이런 판단에는, 그의 후임자로 거론되며 당 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경제부 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자신의 후임 총리가 됐을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었다. 이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이 왜 병크였냐하면, 이 당시 이미 80을 훌쩍 넘긴 아데나워의 나이 상, '총리직 그만 하시고 슬슬 물러나실 때도 된 거 같은데...'라는 게 독일 내의 주된 여론이었으며,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문제로는 '에르하르트의 총리직 수행 방해'라는 그의 대통령 출마 동기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헌법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제왕적 대통령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가, 파국을 맞았던 것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역사적 선례에서 신생 독일 연방 공화국은 대통령의 힘을 대폭 약화시켜놓았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테오도르 호이스도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등 철저히 비정치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거를 뒤집으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아데나워가 그토록 집요하게 싫어하고 앞길을 막으려했던 에르하르트는 이 시기 라인 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부 장관으로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다(...) 결국 대통령 선거 출마 시도는 독일 내에서 '이 늙은이가 진짜로 노망이 들었구나...' 정도의 반응만 얻은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2.8 4기 아데나워 내각(1961~1963)

앞서서 언급한 이런 병크들로 인해서 아데나워의 위신은 다소 추락했지만 관록에 힘입어 4선에 성공한다. 다만, 3선 때와는 달리 단독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해서 다시 자민당과 연정을 이루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흐트러지기 시작한 아데나워의 정치감각은 쉽사리 찾아지지 못했다. 1961년, 자유시 문제가 흐지부지 장기화되고 동독 주민들의 탈출 행렬은 계속 이어지자 참지 못한 동독 당국은 결국 베를린 장벽을 건설한다. 당시 서 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존 F. 케네디를 불러 그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 연설을 하게 하는 등 동분서주하는 동안 아데나워는 정말 손놓고 가만히 계셨다. 그러고는 나중에 사생아라는 빌리 브란트의 배경을 들먹이면서 당시 브란트의 행동을 비판했다.[22] 당연히 욕을 먹은 쪽은 아데나워. 결국 이후 아데나워는 이번 임기의 종결 이전에 후임자에게 총리직을 넘기겠다는 선언을 해야만 했다.

한편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경제부 장관이자 2인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의 관계마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유럽 경제공동체(EEC)[23]를 소수 회원국간의 깊은 관계의 모임으로 만들고자한 아데나워의 생각과 달리, 에르하르트는 영국 등 더 많은 회원국을 참가시키고자 했던 것. 총리 기간 재임 내내 프랑스와의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영국-미국과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아데나워와 달리, 에르하르트는 대표적인 친미 세력이었던 것도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 갈등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963년 드 골이 영국의 EEC 가입을 거부하면서였다. 다수의 그의 내각 장관들은 에르하르트와 그의 친미-친영 외교노선을 지지했고, 아데나워는 결국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에르하르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면서 15년이라는 긴 시간[24]의 총리 임기를 끝마친다.[25] 다만 기민당 총수 자리는 1966년까지 유지했다. 그리고 계속 에르하르트 발목을 잡으면서 마침내 3년만에 그의 실각을 이뤄냈지

2.9 죽음

총리직 사임 후 4년만인 1967년 4월 19일 자택에서 사망한다. 그의 딸에 의하면 아데나워의 유언은 쾰른 사투리로 "울 필요 없다!"였다고(...)

당연히 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 정상들이 참가한 가운데[26] 쾰른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치뤄졌다.

3 업적

서독국부이자 경제부흥을 통해 독일통일의 발판을 만든 인물.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지만 아데나위 이전에 독일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던 시기는 1920년대의 10여년 정도에 불과하며[27] 그 이전에는 사실상의 전제군주제가 시행되었고, 1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가 도입되었지만 종전과 함께 닥쳐온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초창기부터 이미지를 갉아먹었고 그나마 상황이 안정되었을때 운 나쁘게 세계대공황이 닥쳐와서, 1930년대 전반의 혼란기를 걸쳐 나치당의 일당독재체제로 나아서게 된다. 그래서 독일인들에게 민주주의라는건 시행된적인 있었지만 그리 매력적인 체제라는걸 느끼지 못했던건데 아데나워의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에, 독일은 다시금 국제사회의 주요 일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으며 통일의 기반도 다질 수가 있었다. 2003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물은 설문조사에서는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오늘날 독일에서 에르하르트 수상, 빌리 브란트 수상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각지에 콘라드 아데나워 가(街)/광장도 많다. 또한 독일 기민당의 현 당사명은 콘라트-아데나워 하우스(Konrad-Adenauer Haus)이다.

4 흑역사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개인적으로는 추문이 있었다. 하이네 티센 보르네미자 백작이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아데나워가 하이네 티센의 어머니인 백작부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방문했는데 보르네미자 가문의 미술품 컬렉션을 보던중 어떤 한 그림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 그림은 중세 후기 플랑드르의 대화가인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의 "로자리오의 성모"였는데 아데나워가 좋아하는 눈치를 보고 백작부인이 그 그림을 선뜻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이네 티센이 몇달 후 미술상에게 좋은 작품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가서 보니 아데나워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로자리오의 성모였다. 하이네 티센은 아무 말 없이 그 그림을 다시 사들여서 예전 집에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걸어둔 후 갖은 빌미로 다시 집으로 초대해서 예의 그 그림을 다시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한참동안 감탄하면서 보다가 돌아갈때쯤 되어서 하이네 티센에게 그림값으로 얼마나 주었는지 은밀히 물어보았다고 한다. 하이네 티센이 그림값을 말해주자 아데나워는 자신이 미술상에게 넘긴 금액과 맞는지 따져보는 눈치였다고. 일국의 총리가 선물받은 그림으로 장사를 했다는 점에서 추문에 해당하지만 묘하게도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웃기게도 선물받은 그림을 밀매했던 아데나워는 중세 성당의 벽화를 복원했다는 위조꾼들에게 굴욕을 당한 일도 있다. 뤼벡 성모 마리아 성당 벽화 위조 사건 참조.

상술했듯이, 그의 후임자인 에르하르트 총리와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서[28] 여러가지 방해 공작을 벌여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5 말말말

아데나워는 비스마르크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인이다.

- 윈스턴 처칠[29]

그는 여전히 정치 인생의 종착역에 있지 않다. 뭐 엔리코 단돌로[30]는 90살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으니..

- 칼 야스퍼스

비범한 인물. 그리고 그의 비범함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강압을 벗어나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할 때 빛을 발한다.

- 쿠르트 슈마허

6 같이 보기

  1. 아버지 요한은 개신교도였으므로 이것은 어머니 쪽을 가리킨다
  2. 생각해보면 이 사람 총리로 활동했을 당시, 엄청난 고령이었다! 당장 이 사람이 처음 공직에 발을 들였을 때는...독일은 아직 비스마르크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시대였으며, 2차 세계대전 무렵 세계를 이끈 주요 조차 그보다 어린 경우가 수두룩했다.
  3. 이 시기를 독일 일반인들은 순무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먹을게 순무뿐이라서... 커피도 없어서 나무 뿌리 태운거를 커피 대용으로 마시던 그런 시기이다.
  4. 물론 단순히 반 프로이센 감정때문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아직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기 전이었던 이 시기 독일 내부에서는 '프랑스가 라인란트를 합병하고 라인 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가 팽배했기 때문에 이같은 염려에 대한 선제조치로는 꽤나 괜찮은 생각이었다.다만 아데나워가 반 프로이센 주의자가 아니었으면 이런 주장은 절대 안했겠지
  5. 다만 주의할 것이, 이 지역의 분리주의자라고 해서 오늘날 스코틀랜드카탈루냐처럼 아예 새로운 독립정부를 차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히 일제시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치정도를 요구하는 수준
  6. 그리고 이 발언으로 아데나워는 반대파들에게 두고두고 반역자라고 씹힌다. 뭐 아데나워가 정말 이 조치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협박용이었던 건지는 죽은 본인만이 알고 있을듯
  7. 앙금도 앙금이고 아데나워는 슈트레제만을 '너무 프로이센스럽다'라고 싫어했다고...
  8. 사실 이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관점을 무조건 어리석었다라고 비난하기는 힘든 일이다. 당장 맥주홀 폭동 이후 나치즘이 상당한 지지자를 끌어모았었지만,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20년대의 황금기에 접어들며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자 다시금 2~3%로 지지율이 폭락했었던 사실이 가장 좋은 예이다. 독일 국민들도 바보가 아니다. 당장 등 따스하고 배 부른데 누가 극단적인 사상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9. 아데나워는 자신의 해임된 것이 당시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보수반공주의적인 자신보다 사민당을 파트너로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아데나워의 전기를 쓴 작가조차도 아데나워의 뒤를 이은 쾰른 시장이 기민당 출신이라는 점을 들면서 아데나워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10. 다만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다수의 기민당 인사들은 73세 지금도 73세에 대통령직 출마하면 나이 너무 많지 않냐라는 우려가 나올 지경인데 하물며 이 시기야.. 근데 우리나라도 이승만이 저때 비슷한 나이에 대통령했잖아?라는 고령,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 등을 고려하여 그가 킹 메이커의 위치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헌법 초안이 대강 기틀을 잡은 이후 가진 기민당 인사들간의 식사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밝힌다!
  11. 헌법상으로 독일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다.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호된 경험으로 대통령은 말 그대로 상징적 존재로 그 힘을 약화시켰지만, 어쨌든 형식상이나마 내각을 해산시키고 선거를 치루며 그 결과에 따른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대통령의 주요 권한 중 하나
  12. 그 과정에서 매카시즘 적인 공격도 망설이지 않고 정적들, 특히 사민당의 당수인 쿠르트 슈마허에게 사용했다.
  13. Sonder(Special) + Weg(Way)
  14. 그리고 이 특별한 길이 가장 극단적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바로 나치즘.
  15. 당시 독일 유권자 중의 16%를 차지했다. 보통 선거가 3~5% 정도의 지지율 차이로 승패가 결정나는 것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
  16. 다만 이 시기까지 아직 사민당은 폭력적 혁명을 포기했을뿐이지 마르크스 주의를 당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카시즘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7. 경제기적이라는 의미이다.
  18. 소련측의 도청을 우려해서 자동차부터 모든 사무실 집기를 독일에서 싣고 갔다고 한다. ㅎㄷㄷ
  19. 흐루쇼프는 서베를린을 서방의 불알이라고 비유하며, 서방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을 때 마다 서베를린을 움켜쥐면 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20. 동독과는 관계를 맺지 않으며,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국가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정책
  21. 후일 발견된 당시 영국 외무장관의 일기에는 아데나워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가득한다. '반쯤 미친 늙은이'이니 '의심만 많고 탐욕스러우며 공허한 양반'이니 등등...
  22. 정확히는 빌리 브란트를 의회에서 프람 씨(Herr Frahm)라고 불렀다. 프람은 빌리 브란트가 나치를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하기 전의 쓰던 성으로, 외할아버지의 성이었다. 사생아여서 아버지의 성을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 외할아버지마저 사생아 출신이었던 것은 덤.
  23. 상술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등이 참가하면서 발전한 형태
  24. 그의 임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존속 기간보다도, 심지어 천년제국을 자처한 나치 독일보다도 길었다.
  25. 현재까지도 헬무트 콜(18년)에 이은 2번째 최장기 임기. 그런데 아마 이 아줌마가 갱신할 듯
  26. 심지어 아데나워가 생전에 악마의 대리인으로 여겼던 소련 대사마저 참석했다.
  27. 그나마도 무능과 방종에 가까웠다.
  28. 에르하르트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에르하르트는 알아듣지 못하는 쾰른 사투리로 "저 놈은 총리가 되어서는 안 돼!"라고 노골적으로 뒷담을 깠다고......
  29. 아데나워는 이 발언에 대해 '비스마르크의 군화가 내게는 너무 크다'라고 응수했다.
  30.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