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카터

이름게리 에드먼드 카터(Gary Edmund Carter)
생물년도1954년 4월 8일~ 2012년 2월 16일
국적미국
출신지캘리포니아주 컬버 시티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72년 드래프트 3라운드
소속팀몬트리올 엑스포스(1974~1984)
뉴욕 메츠(1985~1989)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90)
LA 다저스(1991)
몬트리올 엑스포스(1992)
1981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켄 그리피 시니어
(신시내티 레즈)
게리 카터
(몬트리올 엑스포스)
데이브 컨셉시온
(신시내티 레즈)
1984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프레드 린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게리 카터
(몬트리올 엑스포스)
라마 호이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영구결번
810103042
게리 카터안드레 도슨러스티 스타우브팀 레인스재키 로빈슨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게리 카터
헌액 연도2003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78% (6회)

1 개요

197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명 포수. 준수한 수비력과 뛰어난 공격력을 바탕으로 몬트리올 엑스포스뉴욕 메츠에서 활약했다. 두 번의 올스타전 MVP와 세 차례 골드글러브, 다섯번의 실버슬러거 수상 및 1989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포수다.

통산 성적은 0.262 324홈런 1,225타점.

2 선수 생활

2.1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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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반 때, 몬트리올의 3라운드 지명을 받고 1972년 입단했다. 당시 미식축구로 UCLA 입학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지만, 미식축구를 포기하고 야구를 선택했다. 원 포지션은 유격수지만, 팀에서 그를 포수로 전환시키면서 마이너리그에서 포수 수업을 받게 되었다. 별명은 꼬마(Kid)인데, 스프링캠프에서 매번 이기려고 아둥바둥대는 모습이 꼭 꼬마들이 이기려고 기를 쓰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팀 선배들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포수 수업을 빨리 끝내고 1974년부터 메이저리그의 맛을 보기 시작해 1975년에는 17홈런 68타점을 기록하며 그 해 올스타에도 선발되었다. 다만, 이 때 그는 포수 마스크를 쓰지는 못했고, 주전 우익수로 주로 나섰다.

손가락 부상으로 1976년을 날린 후, 안드레 도슨을 위시한 재능있는 외야수들이 늘어나자, 마침내 팀은 주전 포수를 트레이드 시킨 후, 게리 카터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맡겼다. 카너는 팀의 기대에 부응해, 첫 주전 포수가 된 1977년 31홈런을 날리면서 활약했고, 그 뒤로 꾸준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수비력까지 괜찮은 평가를 받으며, 몬트리올 시절 세 차례 골드글러브와 세 번의 실버슬러거를 수상하며 공수 양면에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떠올랐다.

이 때의 활약으로 인해 마침 하향세를 그리던 자니 벤치를 제치고 올스타전 선발의 영광도 얻었고, 1981년과 1984년 두 차례 올스타전에서 맹활약하며 MVP에 올랐다. 그리고 1981년 몬트리올의 유일한 PO 진출에도 힘을 보탰고, PO에서도 4할이 넘는 맹타를 터뜨렸지만, 팀은 아쉽게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 뒤 몬트리올이 하향세를 그리지 팀은 리빌딩을 위해 최고의 유망주를 뽑아낼 수 있는 올스타 포수를 카드로 쓰기로 결정했고, 게리 카터는 그렇게 해서 1:4 트레이드로 1984년 11월 뉴욕 메츠로 이동하게 되었다.

2.2 뉴욕 메츠 시절


메츠에서의 데뷔전을 끝내기 홈런으로 장식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후, 주전 1루수인 키스 에르난데스와 함께 팀의 리더로서 드와이트 구든, 대럴 스트로베리와 같은 젊은 선수들이 많던 메츠를 이끌었다. 그들의 노력이 더해지면서 메츠는 점차 침체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86년 보스턴 레드삭스빌 버크너의 알까기에 힘입어 7차전 접전 끝에 4승 3패로 누르고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게리 카터 자신은 꾸준히 공격력을 발휘하면서 팀에 기여를 했다. 메츠 생활 말년에는 점차 나이 때문인지 부진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통산 300홈런 고지는 메츠 소속으로 넘겼다. 1988년 메츠가 100승 시즌을 거두었을 때 큰 공헌을 했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노쇠화가 찾아오며 마침내 같이 팀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던 키스 에르난데스와 함께 1989년을 끝으로 방출되었다.

3 은퇴 후

1990년과 1991년을 고향 쪽인 캘리포니아의 두 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LA 다저스에서 보낸 후, 1992년 친정인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돌아와 은퇴를 준비했고, 어린 선수들에게 멘토 역할을 한 후, 은퇴하기에 이른다. 은퇴 당시에도 별명은 그런데 역시 꼬마(...) 였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2003년 6번의 도전 끝에 입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명예의 전당 입성과 함께 그의 등번호 8번은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영구결번이 되었고, 팀이 워싱턴으로 이전한 후, 한 때 취소되었다가 2011년부터 다시 워싱턴 내셔널스의 영구결번이다. 추가로 뉴욕 메츠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어떤 선수들도 그의 등번호인 8번을 달지 않고 있다.

마지막 시즌을 몬트리올에서 보냈고, 명예의 전당은 몬트리올 모자를 쓰고 가기를 희망했지만, 몬트리올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해지자 메츠 모자를 써도 괜찮다고 언급했다. 결국은 몬트리올의 모자를 쓰고 가게 되면서 메츠 팬들은 사실 당연히 몬트리올 모자를 쓰는 것이 맞지만, 아쉬움은 표했다. 사실 은퇴 이후에 정작 메츠와 함께 일한 적이 많기 때문에 메츠 팬들이 내심 명예의 전당에 메츠 모자를 쓰고 가기를 희망한 것이 그리 헛된 소망만은 아니었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주로 메츠 산하 마이너리그 팀의 감독을 맡았고, 대학 팀 감독도 역임했다. 아주 야구계에서는 떠나지 않은 것.

그러나 건강에 문제가 생겨 2011년 뇌종양을 선고받고 투병했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2012년 2월 16일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부고 기사)

그리고 이에 메츠는 2012 시즌 한정으로 2011-12 오프시즌에 운명을 달리한 그의 8번과 그의 별명인 'KID'가 새긴 홈플레이트 모양의 패치를 외야 펜스와 선수 유니폼에 붙여 그를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