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조니 리 벤치 Johnny Lee Bench |
출생 | 1947년 12월 7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 시티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5년 6월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36순위 신시내티 레즈 지명 |
소속팀 | 신시내티 레즈(1967~1983) |
신시내티 레즈의 영구결번 | |||||
1 | 5 | 8 | 10 | 11 | 13 |
프레드 허친슨 | 자니 벤치 | 조 모건 | 스파키 앤더슨 | 배리 라킨 | 데이브 콘셉시온 |
14 | 18 | 20 | 24 | 42 | |
피트 로즈 | 테드 클루스제프스키 | 프랭크 로빈슨 | 토니 페레즈 | 재키 로빈슨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자니 벤치 | |
헌액 연도 | 1989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96.42% (1회) |
1968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신인왕 | |||||
톰 시버 (뉴욕 메츠) | → |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 → | 테드 사이즈모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1970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 |||||
윌리 맥코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 → | 조 토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1972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 |||||
조 토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 → | (신시내티 레즈) |
1976년 월드 시리즈 MVP | ||||
(신시내티 레즈) | → |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 → | 레지 잭슨 (뉴욕 양키스) |
1 소개
Little General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 중 한 명
현대야구 포수의 아버지.
신시내티 레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오로지 신시내티에서만 뛰면서 1970년대 신시내티 최고의 전성기인 빅 레드 머신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아직까지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포수 중에 그보다 더 많은 득표율을 기록하고 입성한 선수는 없다. 한 마디로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포수. 그의 등번호 5번은 당연히 신시내티 레즈의 영구결번이다.
2 커리어
어린 시절부터 엄친아의 자질을 타고 났다. 고등학교에서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을 뿐 아니라,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 공부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야구의 길을 선택해 1965년 신시내티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했다.
1967년 맛보기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이후 본격적으로 팀의 주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해 준비한 1968년의 스프링캠프에서 대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방문하게 된다. 윌리엄스는 벤치의 훈련 모습을 보고 재능을 알아보았고 "To Johnny Bench, a sure Hall of Famer." (미래의 명예의전당 입성이 확실한 자니 벤치에게)라는 싸인볼을 건낸 일은 유명한 일화. 그리고 테드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1968년 골드글러브 및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신시내티의 최전성기인 "빅 레드 머신"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두 차례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70년에는 45홈런 148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을 월드시리즈에 올려놓았고, 1972년에는 다시 40홈런에 125타점을 기록하며서 선수 본인은 MVP를 탔고, 팀 역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다만, 이 때는 각각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게 지면서 월드시리즈 우승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조 모건. 피트 로즈, 데이브 콘셉시온, 토니 페레즈 등과 함께 맹활약하며 마침내 1975년과 1976년 신시내티의 월드시리즈 2연패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1976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만나 0.533 타율과 무수한 도루 저지를 기록하며 양키스를 농락해 양키스 역사상 처음으로 0-4 스윕 패배의 치욕을 안겼다. 이런 월드시리즈에서의 맹활약으로 인해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76년은 벤치가 부진한 시즌 중 하나였다. 근데 부진하다는 성적이 16홈런 74타점...
이후, 부상으로 인해 포수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 결국 포지션을 바꾸게 되었다. 특히 무릎 부상이 심했고, 결국 말년에는 다른 포지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 포수부분에서 딴 골드글러브만 10개이자, 1968년부터 1977년까지 10년 연속 수상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이반 로드리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미 어릴 때부터 포수를 맡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포수로서 성숙한 능력을 보여줬다. 특히 공을 일곱개나 쥘 수 있었다는 무시무시하게 큰 손이 장점. 또한, 현대야구의 포수 수비 스킬을 집대성한 선수가 자니 벤치이다. 야구 역사상 최초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포수 미트를 사용해 한 손으로 투구를 받는 포구자세를 기본기로 완성했다. 벤치 이전까지는 미트가 잘 접히지 않았기 때문에 양손으로 포구를 해야했는데,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악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동양권의 포수들 중 양손으로 포구하는 포수들도 제법 있었다. 자니 벤치 본인은 한 손 포구자세를 처음 시도한 선수는 랜디 헌들리(시카고 컵스 출신의 명 포수이자 공갈포로 유명했던 토드 헌들리의 아버지)라고 밝힌 적이 있다. 단 벤치가 이것을 완성해 메이저리그에서 전파했기에 벤치의 공적도 무시할 수 없다. 이덕에 도루 저지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10년 이상 주전포수로 활동했던 역대 선수들 중 통산 3위에 해당하는 43.5%의 도루저지능력을 보였다.
여기에 포수로서는 전성기 시절 최고의 타격과 타고난 어깨, 수석 졸업의 명석한 두뇌까지 합쳐지면서 일찍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증거로 흔히 뽑는 사람만 계속 뽑는다는 수비 부분의 평가인 골드글러브에서 신인으로 수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통산 389홈런 1376타점을 기록했는데, 홈런은 은퇴 시점에서는 포수로서 기록한 것만 세었을 때 역대 1위(326개)였다. 다만 그 후 칼튼 피스크(포수 시절 : 351개, 통산 376개))와 마이크 피아자(포수 시절 : 396개, 통산 427개)가 차례로 경신하면서 현재는 역대 3위. 무엇보다 수비력과 공격력을 동시에 갖춘 포수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김형준의 MLB '가장 완벽했던 포수' 자니 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