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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궁의 대문. 사실 대문과 비각을 빼면 터만 남아 있다(...)
敬德宮
경기도 개성시에 있었던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두 군데 잠저 중 하나로,(다른 한 곳은 목청전) 추동궁(楸洞宮)이라고도 했다.
조선이 수립된 이후, 태조는 자신의 집을 증축하여 경덕궁이라 이름을 붙이고 신하들로부터 조회를 받았다. 그리하여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이 곳에서 거주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도읍을 한때 개성으로 다시 옮겼을 때, 태종(조선) 또한 이 곳에서 거주하였다. 태종이 한양으로 환도한 뒤에도, 이후의 왕들이 개성에 들르거나 근교의 제릉, 후릉을 참배할 때에는 이 곳에서 묵었다.
한때 한명회(韓明澮)가 이 곳의 궁지기였던 적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지금은 대문과 경덕궁 터였음을 알려주는 비각(碑閣)만 남아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경의선(북한에서 말하는 평부선) 철도가 지나가며, 과거에는 단오가 되면 개성시 부녀자들이 여기서 그네놀이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