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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5대 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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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熙宮 / Gyeonghui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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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파괴되기 전의 경희궁 규모
1 개요
1617년(광해군 9년)부턴 짓기 시작해 1623년에 완성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철거되었으나 1988년부터 복원 중인 궁궐이다. 99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그 중에 남은 것은 단 3동이며 그나마도 원래 위치를 잃어버렸다. 일제의 대표적인 만행 중의 하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 사적 271호.
남은 전각이 적고 협소한 탓에 조선 5대 궁궐 중 인지도가 가장 낮다. 1박 2일의 서울특별시 문화유산 특집에서도 5대 궁궐을 문제로 내자, 다른 4개의 궁은 어렵지 않게 맞혔으나 경희궁에서 다들 헤맸는데,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이나 역덕후가 아닌 이상 다른 일반인에게도 사정은 비슷할 듯.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알겠지? 훼손이 너무 심하다보니 책에 따라선 4대궁을 먼저 묶은 뒤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터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안습
이곳에서 3D 복원된 경희궁의 가상체험을 할 수 있다.
2 역사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1] 부지를 몰수하여 국왕의 별채로 삼았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별칭은 서궐이었다.
처음엔 별채의 개념이었지만, 인조 재위 당시 이괄의 난으로 인해 정궁이던 창경궁이 전소되는 바람에 건립 4년만에 왕의 거처로 바뀌었다(1624).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280년 가량 정궁의 지위를 누렸다. 창덕궁이 후기 정궁이라면서요?? 참고로 영조 치세의 절반, 정조 즉위식은 이곳에서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일제가 경희궁 전체를 완전히 해체해버렸고, 정전인 숭정전과 정문인 흥화문의 목재들이 팔려 나왔다. 그것을 각각 일본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와 박문사(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가 구입해 법당과 산문으로 쓰게 된다.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니 주의.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아무튼 그렇게 숭정전은 법당으로 마개조되어 대화정 조계사의 건물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흡수되었고, 동국대학교가 세워지자 동국대학교 안의 법당 '정각원'이 되게 된 것이다. 박문사는 동국대학교 근처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경희궁 터에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의 전신)을 세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경희궁의 훼철이 일제시대 이전인 조선 고종 초기에도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1868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이 마친 후 경희궁이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의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것과 1870년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해 2년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가 들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2] 일단 1860년대 철종이 6개월간 경희궁에 이어했다는 기록을 보아 고종 즉위 당시까지 온전한 것으로 보이며 경복궁 중건 당시 전각의 대부분이 경복궁의 전각을 새로 중건할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일단 위에 언급된 기록과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볼때 어느 정도 사실인것 같다.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동 안 남아 있는걸 확인할수있다. 경복궁 중건 당시 경희궁의 90%를 헐어다 목재로 썼다.
경희궁과 동편의 덕수궁(경운궁)은 서로 인접한 편인데, 원래 덕수궁의 부지는 지금보다 서쪽으로 더 넓어서 경희궁과는 상당히 가까웠다. 그래서 홍교[3]라는 다리로 이어져 있었고 대한제국 시기에 각종 국가행사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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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
3 복원 과정
경성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던 경희궁터는 광복 후에도 서울중·고등학교가 되어 많은 영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강남개발계획에 따라 도심부의 명문고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서울고등학교도 서초구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후 서울고가 있던 부지에 대해서는 서울시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민간기업체도 선뜻 그 땅을 사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 땅값이 100억원이 넘어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앙정부와 서울시는 현대건설에 이 땅을 사라고 권유했다. 현대건설은 "별 생각 없지만 정부가 권유하니 인수하겠다"는 태도로 이 땅을 구매한다.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에 새 교사를 짓고 이전해간 것은 1980년 신학기부터였고 구 교사자리는 '인력개발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현대그룹의 사원연수원으로 활용되었다. 이 때 이미 현대그룹은 이곳에 28층짜리 대형건물을 지어 그룹본사의 사옥 겸 외국 바이어 전용호텔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대규모 현대사옥이 들어선다는 것을 일반시민이 알게 되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매스컴에서도 반대의견이 중론이었고, 서너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으레 화제가 되었고 한결같이 '시민을 위한 공원화'를 주장했다. 이렇게 반대여론이 압도적이었던 것에 대해 손정목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이 기저에 깔려있었다고 분석한다. 엄혹한 시절이라 정치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현대로부터 땅을 빼앗아 공원으로 만들어라"는 소리는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잡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답답하고 울적한 심정을 해소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론이 들끓자 현대그룹은 사옥건설계획을 보류하고 관망세로 전환한다. 서울시는 궁지에 몰렸다. 이 때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 예술의전당을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대한민국 경찰청 신청사를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성난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기관도 강력하게 추진을 하지는 못하였다.
1985년 1월 서울시장을 비롯한 서울시 간부들이 주요업무계획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다가오는 12대 총선에 대비한 민심수습책이 논의되었고, 그 방안의 하나로 경희궁터 공원화계획이 거론되었다. 이후 서울시는 서울고등학교 부지를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대건설로부터 다시 부지를 취득한다. 이 때 서울고등학교부지 가격으로는 당시 매립한지 얼마안된 구의지구(강변역 일대)의 택지 5만평과 등가교환하였다. 현재 강변역 일대의 빽빽히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경희궁의 흔적인 셈.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단국대학교 박물관이 숭정전 건립부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월대석을 노출하였고, 당시까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어계는 숭정전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한 애초의 추정과 달리 숭정전은 옛 서울고의 신관 건물이 아니라 식당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으며, 지금도 경희궁은 복원 진행중에 있다. 그런데 하필 경희궁 부지에 서울역사박물관(구 서울시립박물관)이 1997년에 들어서 있고 또한 '경희궁의 아침'(...)이란 아파트 단지 때문에 당분간 더 이상의 복원은 힘들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보고 주변 건물을 먼저 철거하려고 하는 것 같다... 2002년에 숭정전 주변을 복원하여 대중에게 공개했다.
하지만 결국 2004년 이후로 복원은 중단된 상태. 기사 서울시랑 문화재청이 서로 배째라면서 예산을 안 주고 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내전에 해당되는 곳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복원이 재개된다 해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할 확률까지 생겼다.
복원된 현재의 경희궁 부지는 서울 궁궐 치고는 상당히 협소한 편인지라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쉽게 둘러볼 수 있다. [4] 비탈이 많아 이동이 쾌적한 편은 아니지만.
숭정전에서는 대장금, 화성에서 꿈꾸다, 명성황후, 왕세자 실종사건 등의 사극 뮤지컬도 '고궁 버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올라온다. 야외이기도 하고 애초에 공연장이 목적인 장소가 아닌지라 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밤하늘 아래에서 보는 뮤지컬은 최소한 분위기가 제법 난다. 또한 문화재 보호를 위해 주요 고궁에서의 사극 또는 드라마 촬영을 엄격하게 제한하자 사실상 신축이라 상대적으로 연혁이 짧은 경희궁이 촬영 장소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궁(드라마)에 나오는 황궁도 사실 이곳에서 외부 장면을 촬영했다.
숭례문의 용 그림이 문제가 되면서 경희궁 숭정전 용도 덩달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위쪽 사진의 용은 동국대 정각원건물로 쓰이게 된 본래의 숭정전 천장에 달려있는 것이고, 아래쪽 사진의 용은 옛 숭정전 자리에 새로 복원한 건물의 천장에 달아놓은 것이다. 애초에 위쪽 사진의 채도 조절이 잘못되어 있어서 뭔가 싯누렇게 색이 바래버렸는데, 실제로 보면 저렇게까지 누렇지는 않다. 제대로 된 사진과 비교해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아무리 봐도 누군가가 악의적인 편집을 해놓은 것이 화제가 되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 같다.
그리고 2013년 1월 27일 문화재청에서 2014년에 다시 복원사업을 진행한다고 발표했으며 복원작업에는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공동으로 참여하며, 예산도 국비 70%, 시비 30%를 투입하며 2023년까지 진행한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에서 제작한 종합정비계획안에 따르면 2035년 이후를 목표로 경희궁 전체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출처 : [1])
4 기타
경희대학교의 어원이며, 인근에는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이 아파트와 같은 이름의 너비아니 비슷한 냉동식품도 있다.
5 주요 전각
사진 | 설명 |
> | 흥화문(興化門)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에 단층 구조로 다른 궁과는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뜯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엉뚱한 곳의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
> | 숭정문(崇政門)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
> |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세워졌으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
> | 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이 훼손되면서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
> | 태령전(泰寧殿)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일제침략기 당시 경희궁의 다른 전각들처럼 헐렸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
방공호 과거 태평양 전쟁 당시 경성 중앙 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 전신국 겸 방공호가 있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고 하며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 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할 것이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됐다고.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 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2013년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발표하며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라 밝혔다가, 돈이 많이 든다며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 자체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기에 수장고로 사용하겠다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현재는 그냥 방치된 상태. 대중에게는 MBC 느낌표의 위대한 유산 744434를 통해 처음 알려졌으며, 해당 시설에 방문한 시민의 블로그 게시물을 보면 대충 만든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