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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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인 회경전 복원도.
파일:/image/001/2011/12/02/PYH2009010205180001300 P2.jpg
현재 모습. 사진은 만월대에 대한 제3차 남북 공동발굴조사 당시 찍은 사진이다.
古寺蕭然傍御溝(고사소연방어구)
夕陽喬木使人愁(석양교목사인수)
煙霞冷落殘僧夢(연하냉락잔승몽)
歲月觴嶸破塔頭(세월쟁영파탑두)
黃鳳羽歸飛鳥雀(황봉우귀비조작)
杜鵑花發牧羊牛(두견화발목양우)
神松憶得繁華日(신송억득번화일)
豈意如今春似秋(기의여금춘사추)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황진이, 만월대 회고(滿月臺懷古)

滿月臺

1 개요

고려의 궁궐
만월대수창궁강화 고려궁
고려정궁터를 부르는 말. 조선으로 치면 경복궁과 같은 위치이다. 현재 북한개성 송악동(舊 행정구역상 만월동 71-8번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의 국보 122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원래 태조 왕건이 태어난 집터로 고려 태조 2년(서기 919년)에 창건되었다. 고려의 정궁은 경복궁처럼 딱히 특별히 지칭하는 이름이 있진 않았던것으로 추정되며 대체적으로 정궁, 본궐 등으로 불렸다 한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음력 정월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만월대라 할 때에는 왕궁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궁성 부분, 그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여간 고려 왕궁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조선이 건국 이후 고려의 종묘를 부수고,[1]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탄압하는 등 고려 왕실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전적이 많기야 하지만 딱히 만월대까지 파괴한 것은 아니다. 이미 고려시대에 거란이나 몽골 등의 침공으로 만월대가 폐허가 되었고 전란 이후 재건하였으나 하필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별궁인 연경궁과 함게 또 다시 불타버려 소실. 그리고 사정상 재건하지 못하고 별궁이었던 수창궁[2]을 쓰다가 고려가 망해버리는 바람에(...) 끝내 복구하지 못한 상태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니, 이미 부서진 것을 다시 부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왕궁은 왕성 부분과 궁성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왕궁 안에 있던 궁성 성벽 자리는 현재 동·서·북쪽 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석비례와 진흙을 엇바꾸어 여러 겹으로 다져 쌓았다. 만월대 유적은 고려시기의 우수한 건축 예술이 남김없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궁전 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관계가 적용된 것, 건물 배치에서 지형 조건을 잘 고려한 것 등은 고려 시기의 건축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또 조선의 왕궁과 달리 높이 쌓은 축대가 인상적인데 산을 훼손하지 않고 궁궐을 지으라는 풍수지리적 조언에 따라 지형을 그대로 두고 언덕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궁궐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는 강화도 고려 왕궁 터, 삼별초의 항쟁 거점인 진도군 용장산성의 임시 궁궐 터에서도 드러나는 방식이다.

개성공단이나 개성 시내 관광 등이 활발하게 추진되던 시절엔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천안함 피격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태 등 관계가 냉각된 이후에는 가볼 수가 없게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수해로 인해 만월대가 피해를 입어 복구 공사가 진행되자 남측의 복구 인원도 개성공단에 체재하면서 복구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참고로 경술국치가 있기 1년전인 1909년에 대한제국순종 황제가 일제가 기획한[3] 서북 지역 순행에 나서면서 일제의 의도로 만월대에 들렸다고 한다. 물론 순종이 허허벌판이 된 만월대를 방문하게 한 것 자체가 무언의 협박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2 내부 묘사

  • 규모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위치한 규모로 중앙의 회경전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정도이며,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고,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동물머리모양의 돌조각과 많은 기와조각, 도기, 철제장식, 철창, 철침 등이 수습되었다. 구릉지에 위치한 지형적 특성상 높은 축대를 쌓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건물들의 배치 또한 자유롭게 구성했다.
  • 정전 - 회경전(會慶殿)
왕궁의 가운데에는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인 회경전[4]이 세워졌는데 동서로 단칠한 계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전면에 4개의 계단을 만들었고 좌우에는 동행각과 서행각이 있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별도의 전문이 있으며 규모가 매우 장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상례는 감히 거행할 수 없으며, 오직 사신이 이르렀을 때 마당 아래에서 조서를 받들거나 표문을 봉한다는 말이 있고 나머지 예는 별전에서 별도로 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그 위치는 궁성의 정남문인 승평문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 신봉문과 창합문을 지나면 회경전에 도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종 4년(서기 1126년) 이자겸척준경의 난 때 소실되었다가 얼마 후에 다시 복구되었고. 인종 16년(서기 1138년) 5월 전각 및 궁문의 명칭을 개정할 때 선경전으로 개칭되었다.
  • 그 외 전각
그밖에 장화전, 원덕전, 장경전이 나란히 서 있었고 회랑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마당엔 벽돌이 깔려 있었다. 회경전의 북쪽에는 고려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화전과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이 있었고, 서북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 비빈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는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아들이던 장령전과, 뒤에 집현전으로 개칭된 연영전[5]이 있었으며, 영연전의 북쪽에는 자화전(집희전)이라고 하는 연회하는데 쓰이던 전각이 있었다. 회경전의 바로 서쪽에는 왕의 침전이, 동쪽에는 태자가 거처하던 좌춘궁이 있었다.
그외 궁궐 내부에 흐르던 개천에 놓인 돌다리 만월교, 수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였던 임천각[6], 불교 사찰인 법운사와 내제석원이 궁궐 내에 위치해 있었다.
  • 성문과 궁문
황성에는 13개의 성문과 15개의 궁문이 있었다고 하며 성문 중에는 동문인 광화문이, 궁문으로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과 승평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동락정, 신봉문, 창합문, 의봉문이 유명하였다.
승평문은 이중루로 되어 있었고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되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었고 그 동쪽에 태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이,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이 있었다. 서쪽의 선의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봉문 안에는 왕이 중국 황제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회경전의 전문이 있었다. 건덕전 앞에는 건덕전문, 흥례문, 의봉문이 있었으며, 의봉문 밖에 구정[7]이 있었다고 한다. 흥례문 역시 왕이 중국 황제의 조서를 받들기도 하였던 곳이다.

3 기타

사극에서 고려시대를 다루기 위해 만월대를 재현한 세트를 각 방송사가 가지고 있다.

KBS 세트의 경우엔 태조 왕건 촬영 당시 문경시에 지었던 세트였으나 대왕 세종 세트로 바뀌어 현재는 KBS에 만월대 세트는 없다. MBC 세트의 경우엔 신돈 촬영 당시 용인에 지었던 세트, SBS의 경우에도 대풍수를 찍기 위해 19억원을 들여 예전 서동요 찍던 부여 세트장 옆에다가 확장해서 넣었다.[8]

이상하게 MBC 세트의 경우엔 엄연히 다루는 시대상이 조선시대인데도 이 세트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이산, 동이, 해를 품은 달, 마의, 불의 여신 정이, 역린, 화정인데 덕분에 아는 사람이 보면 조선의 궁궐이 고려의 정궁인 황당한 광경을 목격할수 있다.패러럴 월드라서 수도 천도를 안하기라도 했나이를 비판한 기사 아마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서 기껏 지어놓은 걸 부수자니 그렇고 본전이라도 계속 뽑기 위해서 고려시대 건축 이런 거 신경쓰지 않고 조선시대 사극 촬영에도 그냥 재활용하는 모양.(...) 사실 역덕 아닌 일반 시청자들은 고려시대 건축인지 조선시대 건축인지 신경쓰지도 않는다.

분명 만월대를 지은 건 태조 2년인데 어째 태조 왕건에선 궁예가 쓰다 철원으로 천도해서 버려진 궁궐을 다시 썼다고 나온다.

만월대 서쪽에 개성 첨성대가 있다.

  1. 물론 완전히 다 박살낸 건 아니고 태조 6년(1397년)에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지역에 묘를 세우고, 정종 1년(1399년)에는 고려 태조와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7왕을 제사 지내게 했다. '숭의전'이라는 이름인데 고려 왕조의 충신과 공신 열다섯 명을 제사 지내게 하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선조 이후로는 고려 왕족의 후예가 참봉을 맡아 제사를 지냈다고.
  2. 우왕, 창왕, 공양왕, 그리고 조선 태조, 정종, 태종이 즉위한 궁궐이기도 하다.
  3. 당시 대한제국의 내정은 통감부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4.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건덕전(...)을 정전이라고 했지만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는 회경전을 정전이라 하였고, 고려사 역시 희종 2년 4월조의 기사 중에서도 회경전을 정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회경전을 정전으로 보는 것이 대세, 하지만 그 기능에서는 회경전과 건덕전이 서로 비슷하였던 듯하다.
  5. 고려 전기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던 시종 기구로 본래 이름은 경덕전이었다가현종 12년에 개칭되었고. 많은 서적을 비치하고 경사를 논하였는데 문관 가운데 학문이 뛰어난 자들이 그 직책을 겸하였으며. 임금이 이곳에서 진사들을 시험 보이기도 하였던 곳이었다. 인종 14년(서기 1136년)에 연영전의 이름을 집현전으로 고쳤다.
  6. 이자겸의 난 때 불탄 이후 수창궁 옆에 있는 시중 소태보의 집을 서적소로 삼아 유신들에게 문서를 다시 수집하게 했다. 이후 보문각 문첩소로 기능을 옮겼다는 설이 있다.
  7. 격구 경기를 하던 큰 마당.
  8. 원래는 김제에서 35억원을 들인다고 했다가 방송사의 방영 계획이 바뀌는 바람에 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