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삼은

여말삼은(麗末三隱)이라 하기도 한다.

고려 말기에 절의를 지킨 아래 세 학자를 일컫는 말.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

근래에는 야은(冶隱)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
그냥 사(四)은이라 하면 될 것을[1]

저 셋이 삼은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선 중후기의 사림을 형성하는 성리학자들이 다름 아닌 야은 길재의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2] 동방 성리학의 거성들을 숭상하기 위해 여말삼은이라 칭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즉 이에 따르면, 이숭인이 삼은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정도전의 모략에 의해 장살당해 제자를 못 남겼기 때문(...). 안습도 이런 안습이 없다.[3]

참고로 당시 고려에는 '은(隱)'자를 호에 쓰는 경향이 매우 많았다.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은자 돌림 호가 꽤 많이 나온다. 대표적 인물이 대은(大隱) 변안열. 심지어 정몽주, 이숭인 등을 그렇게 갈궜던 권문세가의 수장 이인임도 초은(樵隱) 이인복이라는 멀쩡한 형을 두었다. 신진사대부에서 권문세가 쪽으로 변절한 동정 염흥방도 어은(漁隱)이라는 호도 썼었다. 이런 현상은 당대 헬게이트나 다름 없었던 고려의 상황을 사대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은일(隱逸)' 의식이 당대 사대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색은 이런 은일의식이 지배하는 당대의 지식인 풍조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지 제자 이숭인이 '도은'이라는 호를 짓자 "나야 늙었으니 괜찮지만, 자안(이숭인의 자)은 앞길이 창창한 시기인데 은(隱)으로 이름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비판했으며, 정몽주에 대해서는 "달가(정몽주의 자)는 채소밭에 숨어 있으나 조정에 서서 유학의 부흥을 자임했고, 엄한 얼굴로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1.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육은(高麗六隱)이라 하여 이숭인을 포함해 농은(農隱) 민안부, 수은(樹隱) 김충한을 더해 이르기도 한다.
  2. 사실 길재는 정몽주보다는 양촌(陽村) 권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그래도 그냥 삼은이라 부르는 게 삼대장 같기도 하고 간지나긴 한다.
  3. 사망 당시 이숭인은 46세였다.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그 이전에도 확실한 제자를 두지 못한 이유인 즉, 이 아저씨는 고려 정국이 변할 때마다 족족 귀양길에 오르는 동네북(...)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가 탄압받을때는 사대부라 귀양가고 이인임이 몰락하자 이인임 친척이라 귀양가고 조선건국즘엔 고려유지파라 귀양가고 그만 해 충분히 안습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