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吉再(1353 ~ 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 자는 재부(再夫).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길원진의 아들.
고려삼은 중 한 명이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3은 혹은 여말 3은으로 불린다. 하지만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3은 중 한 명으로 넣기도 한다.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어릴 적부터 맑고 깨끗하면서 영리했다고 한다.
1353년(공민왕 2년), 경상도 선산부의 속현인 해평땅 봉계리(지금의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에 냉산 도리사(冷山 桃李寺)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했고, 18세에는 상산(商山-지금의 상주)에 사는 사록(司祿, 목이나 도호부의 행정책임자) 박분(朴賁)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우며 성리심학에 관한 학설을 듣게 된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있다가 8살에 외가에 머물렀으며, 혼자서 시냇가에 놀면서 가재 한 마리를 붙잡아 가재를 삶아먹고 싶지만 그 가재도 자신처럼 어머니를 잃은 것이 같다면서 가재를 놓아주면서 슬프게 울었다. 이를 듣고는 온 고을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후에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박대해 어머니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자식이 어버이에게 불의한 일이 있을 지라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되고 바르게 행동해 정상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린다고 했으며, 이에 어머니는 감동해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집이 매우 가난해 말, 종도 없었고 어머니에게 하직해 아버지를 두고 뵙지 못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개성으로 갔으며, 아버지를 섬겨 효성이 지극했고 계모 노씨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경, 효도를 다해 노씨가 자신이 낳은 자식과 같이 대접해 이웃 마을에서도 칭찬할 정도였다.
1374년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1383년에는 사마감시에 합격했으며, 1386년에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벼슬을 받지 않았고 이 때 훗날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과 같은 마을에서 살아서 그와 교류했다고 한다. 1387년에 드디어 성균학정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388년에는 순유박사, 성균박사, 1389년에는 문하주서에 임명되었다가 1390년에 고려의 사정이 안습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해 낙향했고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우왕의 죽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채, 해장을 먹지 않는 등 3년상을 지내면서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봉양해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장만했으며,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늘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윗문장이랑 모순인데 다른 집에 살았나보지
이후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에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세자[1] 이방원이 태상박사에 임명했지만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면서 이를 거절했으며, 이방원은 이를 가상히 여겨 그의 집에 세금을 면제하도록 했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주자가례에 의거해 제사를 지냈다.
이방원은 길재에게 태상박사(太常博士) 벼슬에 임명해 관직에 나와 줄 것을 수차례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했다. 이 때문에 이방원은 늘 대신들에게 길재의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인품을 본받으라고 강조했다. 길재의 청렴결백함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져 오는데, 한 번은 이방원이 길재가 산골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백 섬을 보냈으나 길재는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길재의 명성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절의와 인품에 감복한 군수 이양(李揚)이 율곡동(현재 도량동 밤실마을 일대)에 전원을 주고 좋은 전답으로 바꾸어 주었으나 ‘무릇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한들 그 종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기증 받은 전답을 그 가용에 준하여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뒤에 세종이 자신의 자손들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이 후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며, 길재는 제사를 당하면 나물밥으로 공양하고 우는 것을 초상 때와 같이 했다. 밤에 조용히 앉았다가 밤중이 되면 잠들거나 옷깃을 여미면서 날을 세우기도 하며, 닭이 처음 울 때 의관을 갖추고 사당, 조상에게 절을 하면서 자제들과 경서를 강론했다.
병이 들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병으로 죽기 전에 장사 지내는 것을 주자가례에 의거하도록 했다.
세종 1년(1419년) 4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금오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고려에 끝까지 충성을 다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길재의 후학들이 훗날 조선의 사림파를 이루기에 나중에 사림파들에게 시조 대접을 받는다.
저서로는 야은집, 야은속집이 있으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조가 길재가 지은 것이다.
2 여말선초의 숨겨진 승자
사극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인지도가 좀 떨어지긴 했지만, 조선 500년 내내 길재는 충절의 교과서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고려를 그리워하며 조선에게 협력하지 않은 사대부는 길재 말고도 더 있었지만, 길재의 이름이 남게 된 건, 1400년 주어진 봉상박사 벼슬을 거부하고 집에 돌아간 사건 덕분이다. 이방원은 길재를 천거해서 왕이 벼슬을 내리도록 했는데, 이 때 길재는 이전의 인연을 생각해 불러준게 고마워서 온거지, 벼슬하려고 온 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때 이방원은 좀 뻘쭘했는지 벼슬을 내린게 자기가 아니므로 왕에게 직접 가서 말하라고 보냈다.
결국 길재는 왕에게 상서를 올려,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왕을 섬기지 않으니, 자기도 고향으로 내려가게 해달라며, 벼슬을 거부한다. 집이 가난한데도 벼슬을 거부한게 정종이 보기에도 괴이했는지(...) 신하들에게 길재가 누구냐고 묻기까지 했다. 당시 신하들은 한미한 유자라고 답한 걸 보아, 확실히 집이 가난했던 모양. 정종이 어찌 해야하는지 권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권근이 벼슬을 더 올려주거나, 아니면 두고 두고 이름을 남겨 모범으로 삼으라고 해서, 결국 정종은 권근의 조언으로 길재를 충절의 아이콘으로 삼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왜 그 많은 사대부 중에서 길재가 뽑혔는지 알 수 있다.
- 신씨 왕조(우왕과 창왕)이 정통한 왕조가 아니며, 이미 망했는데도 절개를 지켰다.
- 2. 문하주서가 높은 벼슬이 아닌데도 그 작은 은혜조차 저버리지 않았다.
- 3. 다른 사대부야 다들 한가닥씩 하던 잘나가는 집안이지만, 길재는 집이 가난한데도 벼슬을 거부했다.
사실, 고려의 충신하면 생각나는 정몽주도 처음에는 충신으로 쳐주진 않았고, 길재 혼자만 고려 충신으로 쳐주었다. 1430년 11월 23일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만들 때, 충신으로 누굴 써야 하는지 묻자 신하들이 '고려 말에는 길재 밖에 없음 ㅇㅇ'이라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길재는 1431년 11월 11일에 삼강행실도에 충신의 대명사로 기록된다.
다만 여기에는 정치적인 고려도 작용했다. 처음부터 길재가 고려충신이라고 조선왕조에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제로 고려에 충절을 지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가 그렇게 추켜세워줘도 부담이 없을 만큼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고려가 멸망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들을 적극적으로 표창하기에는 크게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거나 핍박을 받았던 정몽주, 이색 등은 그 영향력이 거대하고 남긴 업적이나 학맥등이 대단했던 탓에 도리어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추숭하기에 망설일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조선의 태조와 태종에게 살해당하거나 핍박받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표창하는 것은 태조와 태종에게 허물이 돌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당장 정몽주만 해도 후에 문묘에 배향되면서도 당시 왕인 중종이 '이씨의 원수'라고 할 정도로 조선왕조에 큰 위협이었고 세종대왕 시절에 씌여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아예 주적으로 묘사될 정도였다. 이에 반해 길재는 가문과 벼슬도 별 볼 일이 없었고 여말선초에 학문적 업적을 빼면 사실 한 것도 거의 없다. 한마디로 정치적 영향력이 없고 이성계에 맞서 대항한 적도 없었으므로 그를 추켜세워줘도 아무런 부담이 없었으므로 살아있을 때에조차 충신대우를 해주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상기 사유에서 나온 세 번째 이유도 달리 말하면 고려 충신으로 명문가 출신인 인물을 표창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위험하기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여하튼 그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좌사간대부의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를 세웠다. 그리고 현종 10년(1669년)에 금오서원(金烏書院)이라는 사액서원이 그를 위해 세워졌다. 또 영조 17년(1741년)에는 그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서 그의 절의를 기리었다.
또한 위에 언급했듯이 물질적인 보상도 주어졌다. 물론 길재 본인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결국 길재는 정쟁에 한 번 휘말리지 않고, 피 한 번 흘리지도 않고 실질적인 이익, 명예와 목숨을 모조리 챙긴 것이다. 나중에 그가 길러낸 사림이 조선을 이끄는 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야말로 여말선초의 숨겨진 승리자(...)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도전,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 숱한 사람들이 전부 다 어떻게 되었는지 고려하면, 정말 대우가 좋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으로 사실 여말선초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평가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3 사극에서의 등장
조선 건국에 맞서 싸우다가 사망한 정몽주, 이름 알려진 신진 사대부들의 스승인 이색, 자기 대신(...) 고려 삼은의 자리를 꿰찬 이숭인도 사극에 나오지만, 이 분은 등장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용의 눈물에서 잠시 등장한 게 전부. 이방원이 한 때 같이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는지라 자신이 직접 찾아가 조정에 출사하라고 설득하나 부드럽게 말하며 제안을 거부한다.
시대상 등장할 법한 정도전(드라마)에선 언급도, 등장도 하지 않았으며, 고려삼은 자리는 도은 이숭인에게 뺏겼다(...).[2]
이는 사극에서 길재가 나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정쟁에 휘말린 적이 없으니, 사람들과 갈등 구도를 보여줄 게 없다. 유배당한 적도 없고, 고문당하거나 암살당한 것도 아니다. 각본에 따라 등장시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등장시킬 수는 있겠지만, 나오지 않는다고 극 전개가 이상해지는 건 아니다.
조선 초부터 높게 평가받았고, 후일 조선을 이끌게 된 사림을 키워냈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비중이 낮은 사람은 아니지만, 죽거나 고문당하거나 정쟁에 휘말려야 하는 사극에서 별 일 없이 평온하게 살다 갔으니, 앞으로도(...) 사극에서 등장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조선 건국을 막으려다 희생당한 정몽주나, 모든 사대부의 스승이고 역시 조선 건국을 막으려다 귀양가고 죽은 이색, 각종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이숭인, 조선을 건국했지만 무인정사로 살해되는 정도전과 대비되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