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1 異色

다른 빛깔. 보통의 것과 색다름을 뜻한다.

2 李穡


1328년(고려 충숙왕 15) ~ 1396년(조선 태조 5)

2.1 소개

고려 후기의 문인으로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경상북도 영덕군 출생, 본관은 한산이씨,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 말 3은(隱)이라 불린다.[1]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위인을 여럿 키워냈다. 정몽주, 정도전이 워낙 커서 그렇지 이숭인,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흑역사 염흥방까지, 사실상 여말선초의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훈구파), 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여말 신진 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에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원나라에 건너가 원나라 국자감에서 처음 성리학을 배우고 연구하였고, 이후 원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쳐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전시에서는 2등으로 합격했다. 당시 원나라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흠좀무.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이후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연로함의 이유로 고려로 귀국했다. 고려에 귀국해서 처음 한 일이 무신정권의 흔적이었던 정방의 폐지.

공민왕 때 토지 제도 개혁, 불교 억제 등의 상소를 올렸으며,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것에 가담했다. 이후 창왕 폐위 때에 이성계 일파에게 밀려 귀양을 갔다가 공양왕 때 정몽주가 정권을 잡자 부원군의 자리를 받아 한산부원군이라 불린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찬성하지 않았기에 이성계로 인해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2]

1396년 여강(驪江, 현 여주시)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죽었는데, 당시 조선의 실세였던 정도전은 스승이기도 한 이색에게 아주 냉혹한 태도를 보였고 주변 사람과 짜고 유배보내는 도중에 바다에 던져넣어 죽일 음모도 꾸몄다.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으로 다른 곳으로 유배가던 도중 사망했고 이에 대해서는 독살설이 있다.

성리학맥에서 그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안향의 6군자[3]-이제현-이곡-이색-정몽주-길재, 권근으로 이어진다. 즉,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와 그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의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4]

1388년 문하시중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주원장이 원나라에서 과거까지 급제한 이색에게 중국말을 해보라 했으나 주원장이 이색의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5] 전해진다. 아마도 이색은 원나라의 표준어로 말했으나 주원장이 지방출신이여서[6] 이색의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주원장은 이색이 구사하는 중국어를 두고 "딱 나하추 같구만"하고 비웃었었고, 이색 본인은 돌아와서 "나는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어볼 줄 알고 이것저것 준비해 갔는데 황제는 정작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만 물어보더라"고 변명하면서 주원장을 두고 "마음에 줏대가 없다[心無所主]"고 깠다.

공신제조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과 좌익공신에 오른 이계린이 이색손자#s-1. 그로 인해 이색의 후손들은 훈구파의 한 축이 된 것에 비해 이색의 학풍을 이은 제자들은 사림파의 한 축이 되었다. 하지만 사육신 중 한 명인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 같은 가문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분산투자?

2.2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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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관리로서의 재능)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왕조 세종실록 편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

그러나 당대 인물들 사이에서의 입지는 확고했던 걸물로, 조선 건국 후 한 젊은 문신이 척불론을 펴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다고 한다.[7]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만큼 학문은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장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다만 여주 신륵사의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주는 등[8] 불교와 친하게 지내는 경향을 많이 보여줘서 이후 성리학에서 내내 까이게 된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9] 조선의 불교탄압에 의해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때까지 불교를 탄압한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고 있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10]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공명심에 욕심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하는데, 그곳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글을 썼다.600년 기억됐고 이제 400년 남았다

참고로 당태종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눈에 화살 맞았다는 이야기를 퍼뜨린 장본인이다. 유림관에서 지은 정관음(貞觀音)이라는 시에서 "주머니 속의 물건인 줄 알았으나 어찌 검은 꽃이 흰 깃에 질 줄 알았으랴(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라고 쓴 것이 그것.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목은 선생이 당대에 좀 배운 사람인데 근거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라고 하면서 《동사강목》에 실었지만....

2.3 미디어에서

여말선초 시기를 다룬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남일우가 배역을 맡았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를 가리켜 그의 호인 '송헌'을 부르며 조롱한다.감히 왕한테 그러나 관대한 이성계는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11]

신돈에서는 전인택이 배역을 맡았다. 유림이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세워진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는 등의 유림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개혁에 동참하지만 신돈과 공민왕이 대립하기 시작하며 신돈과 거리를 두며 방관하기만 한다.

대풍수에서는 최용민이 배역을 맡았다.

정도전에서는 박지일이 배역을 맡았다. 해당항목 참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김종수가 배역을 맡았다.
  1. 사람에 따라 길재를 빼고 도은 이숭인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2. 이성계의 즉위 과정을 비판하면서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배극렴을 마고(馬賈)(말 장수)라고 디스하기도 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이색의 졸기.
  3. 권부, 백이정 등의 여섯 명의 제자이다. 이 중의 한 명이 이조년으로, 놀랍게도 이인임의 할아버지다!
  4. 다만 이것은 제자를 칭찬하는 말로, 이 말을 정몽주보다 학문이 뛰어나지 못했다고 곧이곧대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다. 물론 정몽주의 학문적 완성도는 이색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지만.
  5. 주원장은 인사 치레조로 "원에서 한림을 했다니 한어(중국어) 좀 하겠네?"라고 말을 건넸는데 이색은 바로 "친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주원장은 그걸 못 알아듣고 옆에 있던 예부 관리가 통역을 해 주고서야 알아들었다고.
  6. 정확하게는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방언 차이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지금도 강남 지역의 광둥어는 (북경어에 기반을 둔) 표준중국어와 같이 대화를 붙여보면 거의 외국어 수준으로 소통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이질적이다.(출처: 개경의 생활사)
  7. 태조는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 것이지만, 이색이나 정몽주 같은 보수파 사대부들도 의외로 불교 세력과 그리 거리를 두지 않아서 철저한 척불론자들이었던 신진 사대부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정몽주의 경우는 이단인 불교를 좋아한다고 욕을 먹어서, 불교 배척에 앞장서던 정도전이 앞장서서 내 친구 몽주는 그렇지 않다면서 옹호하는 글을 따로 써 주기도 했을 정도.
  8. 목은집 권49(목은문고 권14)
  9.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준 대가로 불교계에서 윤필료(붓을 닦은 값, 사실상 돈 줄 명분이다.)를 주는데 이색이 너무 많이 준다고 거부하자 그 돈으로 암자 5개를 짓는 등 어마어마하게 후원해준다.
  10. 정도전에게 죽임을 당했다.
  11. 실제 역사에서도 이성계는 문인들에게 굉장히 관대한 편이였다. 하지만 정도전을 건들면 가차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