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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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젬바둑 닉네임3586

小林光一(1952년 9월 10일 ~ ). 일본의 프로바둑기사. 콩라인

실리를 굉장히 좋아해 3선이고 2선이고 마다하지 않고 실리를 챙기는 바둑을 둬 그와 정반대의 기풍인 다케미야 마사키로부터 '지하철 바둑', "3의 3에 두면 바둑돌이 판 바깥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현대에도 종종 쓰이는 포석인 고바야시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사위는 조치훈이 "빨리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장쉬 九단, 문하생은 2005~07년 천원전을 3연패한 코노 린(河野臨) 九단 등.

조치훈의 라이벌로, 위에서 말했듯 실리를 챙기고 소름끼칠 정도의 냉정함으로 상대의 실수를 정확히 응징해 가면서 승리를 낚아채는 기풍이다. 조치훈의 바둑을 감성적이라고 한다면[1] 고바야시의 바둑은 이성적이었다.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치훈 때문에 2인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통산 우승(59-74), 7대 기전 우승(35-42) 횟수가 뒤지고 7대 기전 결승에서 조치훈과 10번 만나 2승 8패로 밀렸기 때문이다.

연도기전명결과비고
1982혼인보전조치훈 4-2 고바야시
1985명인전고바야시 4-3 조치훈
1986기성(棋聖)전고바야시 4-2 조치훈휠체어 대국
1987천원전조치훈 3-2 고바야시조치훈 그랜드 슬램 달성
1990혼인보전조치훈 4-3 고바야시
1991혼인보전조치훈 4-2 고바야시
1992혼인보전조치훈 4-3 고바야시
1994기성(棋聖)전조치훈 4-2 고바야시
1997명인전조치훈 4-2 고바야시
1999기성(棋聖)전조치훈 4-2 고바야시

특히 1990~92년 혼인보전은 3-1, 2-0, 3-0으로 앞서다가 역전패해 기성(棋聖)-명인-혼인보 대삼관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고바야시는 "3년간 대삼관의 찬스가 7번 있었는데, 그 7번 모두 조치훈에게 저지당했다."고 말했다. 서로 만날 때마다 실속은 조치훈이 다 챙겼는데 라이벌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조훈현과 서봉수도 서로 라이벌이었지만 실속은 조훈현이 대부분 다 챙겼다 다만 결정적 상황에서 자주 무너졌을 뿐 상대전적에서도 비등하며 커리어에서도 그렇게까지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서봉수가 조훈현에게 상대전적에서 압도당하고 전관왕을 내어줬던 것과 비교하자면 둘의 격차는 미세하다고 볼 수 있다.

고바야시의 전성기는 1984~94년의 약 10년으로 기성(棋聖)전 8연패, 명인전 7연패 포함 8회 우승, 천원전 2연패, 기성(碁聖)전 6연패, 십단전 3연패 등의 성적을 거두며 명예 기성(棋聖, 碁聖), 명인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최초의 명예 명인 자격은 1980~84년 5연패한 조치훈이 가져갔다. 역시 콩라인

1992년 왕좌전에서 후지사와 슈코에게 도전했으나 2-3으로 패배, 후지사와가 사상 최고령 7대 타이틀 방어 기록을 67세로 경신했다.

2015년 9월, 조치훈과 명인전 40주년 기념 대국을 벌일 예정이다. 두 사람의 맞대결은 2011년 마스터즈컵 결승 이후 4년만으로, 당시 조치훈이 승리하며 고바야시와의 상대 전적에서 66승 63패를 기록했다.
  1. 실제로 조치훈은 지면 울면서 돌아가거나,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 '나의 바둑은 끝났어'라면서 울며 탄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