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趙治勳, Cho Chikun[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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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바둑기사 |
소속 | 일본기원 |
생년월일 | 1956년 6월 20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남도 부산시 |
학력 | 추가바람 |
입단 | 1968년 |
단급 | 九단 |
누적우승경력 | 74회(일본 기사 중 1위) |
타이젬바둑 닉네임 | reedo |
일본기원 링크 | 보러가기 |
2008년 일본 기성전 6국에서 도전자 신분으로 기성 야마시타 게이고한테 계가를 하는 장면. 6국에서 미세한 접전 끝에 조치훈이 이겨서 7국까지 갔는데 7국에서 조치훈이 졌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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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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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님??2015년. 사진은 한국기원 제공.
趙治勳, 二十五世本因坊治勲
조치훈, 25대 혼인보 치쿤[2]
1956.06.20~
1 소개
일본의 프로바둑기사. 소속은 일본기원이나 국적은 아직도 대한민국이다. 본가는 풍양 조씨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고구마 재배에 성공한 조엄과 같은 집안이다. 기타니 미노루 도장 문하이다.
남성 기사 최연소 입단(11세 9개월) [3], 사상 첫 그랜드 슬램, 대삼관(大三冠), 사상 최장 7대 타이틀 보유(혼인보 10연패)[4], 사상 첫 명예 명인 칭호, 사상 최다 타이틀 획득(75회), 사상 최다승(1455승), 한국 기사 최초 입신(入神, 9단 승단)[5]등 일본바둑계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기사.
폭파전문가라는 별명이 있다. 상대의 모양 속에 뛰어들어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은 돌을 날카로운 타개로 살리는, 즉 상대의 집과 좋은 모양새를 깨뜨리는 격렬한 행마를 빗대는 별명이다. 동시대를 풍미했으며 "살인청부업자"라는 별명을 가진 가토 마사오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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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일본에 가는 조치훈, 옆에 있는 남자는 그의 숙부인 故 조남철 九단.
어릴 때 일본으로 넘어가 기타니 도장에서 공부했다. 한국 바둑계의 대원로인 조남철 九단의 조카로 집안 전체가 바둑 가문[6]인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원래 천재성이 있어서 어릴적부터 주목 받았다. 그 때문에 공부를 등한시한데다가 어릴 적에 일본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따돌림을 많이 당해 발전이 다소 늦었으나, 훗날 라이벌이 되는 고바야시 고이치가 그보다 한참 하수였다가 어느 새 자신을 앞질러 먼저 입단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진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고바야시 고이치는 조치훈보다 3살 연상이다. 조치훈이 아무리 천재라지만 고바야시가 먼저 입단했던게 당연할지도..)
실력을 갈고 닦은뒤 1980년 오다케 九단을 기성전이 없던 시절 일본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명인전에서 꺾고 명인 칭호를 획득하며 자신이 일본에 오기전에 했던 '명인위를 얻기 전 한국에 오지 않겠다'라는 말을 증명하며 금의환향한다. 그리고 이걸로 은관문화훈장을 바둑인 최초로 수여받으며 병역면제 자격까지 얻게 된다. 단 이 내용은 조치훈 기사의 자서전인 목숨을 걸고 둔다(1981) #의 내용과 다른데, 자서전에는 도일한 뒤 13년 (조치훈 기사 19세, 1975년) 집안에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왔다고 기술되어있다. 또한 병역면제는 국민학교 입학을 하지 않은 것으로 기술되어있다. 어쨌든 1980년 명인전 우승 이후 병역면제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7]
1980년 명인전 결정국 계가 직후의 상황. 오른쪽이 조치훈, 왼쪽이 오타케 히데오 기사. 이후 기성전, 본인방전에서도 우승하여 대삼관을 달성한다. 이 바둑은 일본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조치훈은 스타덤에 오른다.
이어서 1983년 기성(棋聖)전에서 후지사와 슈코를 이기며 기성·명인·혼인보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해 일본 바둑 최초의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하는데 이 기성전에 기가막힌 에피소드가 있다.
후지사와 九단은 "나는 1년에 4번만 이기면 된다"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기성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기사였는데, 조치훈이 20대 젊은 나이에 일본 기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자 "치훈 군이 그렇게 센가? 내가 한 번 찾아가봐야겠군."[8]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조치훈은 "대선배님을 오시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9] 라고 대답한다. 후지사와는 조치훈 기성전 전야제에서 "딱 네 판만 가르쳐주겠다."[10]라고 했고, 조치훈은 이 말에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11]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당시 바둑계는 건방지고 패기가 넘치는 도전자의 발언에 놀라며 대국에 집중했다.
관록인지 진짜 1년을 다 투자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지사와 슈코가 내리 1~3국을 이기며 3-0이 되었는데 귀신같이 4국부터 내리 조치훈이 다 이긴다. 일본바둑계에 길이 남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리버스 스윕. 그리고 인터뷰에서 조치훈 9단은 "후지사와 대 선배님의 기성 타이틀이 이번으로 마지막일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집니다."라는 희대의 드립을 쳤다.
1987년 천원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를 이기며 7대 타이틀[12] 을 최소 1번씩 차지하여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일본 최초의 기사가 되었다.
바둑 내적으로 치열할 뿐만 아니라 대국에 임하는 그의 태도도 본받을 만하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로 대표되는 그의 태도 앞에서는 모두가 숙연해지곤 했다. 전성기 때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을 다치는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으면서도 [13]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머리가 있고, 또 오른손이 있다"며 사고 후 겨우 열흘만에 기어이 휠체어에 앉아 고바야시 고이치와의 타이틀 도전기에 임한 '휠체어 대국'[14][15]은 그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이 실제로 증명된 장면이라 하겠다. 실제 사진을 보면 눈이 번쩍번쩍 하는 느낌.
이때문에 고바야시는 기성 타이틀을 획득하고서도 모두가 고바야시의 4승이 아닌 조치훈의 2승을 칭송하는 아웃 오브 안중상태가 되어버린다. 고바야시는 조치훈에 필적할 만한 엄청난 기사였고 상대전적도 비슷하게 가져갔지만, 이후의 도전기들에서는 조치훈에게 처절하게 털리게 된다. 자세한 것은 고바야시 고이치 항목 참조.[16]
휠체어를 타고 대국에 임하고 있는 조치훈 九단. 반대편에 머리를 깎은 사람이 고바야시 九단이다.[17]
이 교통사고와 기성전 타이틀 방어 실패이후 잠시동안 정상권에서 멀어지리라...생각되었으나 곧 기량을 회복, 기성(碁聖) 타이틀과 천원(天元)타이틀의 획득을 시작으로 89년 혼인보전 도전기에서 다케미야 마사키를 4-0으로 발라버리고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정상권에 복귀, 혼인보전 10연패를 비롯 엄청난 커리어를 쌓아올리며 다시금 전성기를 내달렸다.[18]
또, 혼인보전을 5연패 이상 하거나 10번 이상 우승한 경우 은퇴나 환갑때 주어지는 혼인보 칭호를, 조치훈은 10연패를 하여 그 순간부터 칭호를 쓸수 있게 됐다. 불리는 칭호는 25대 혼인보 치쿤(治勲).[19][20]
3 트리비아
- 대국을 하다 실수가 나오면 자신에게 용서가 없다. 상대의 응수를 보고 실수를 깨달으면 "이 멍청이!" 하면서 크게 외친다든가,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정말 세게,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린다든가 하는 자학(?)이 심한 기사이다.링크 참고[21]. 이러한 성격 탓에 별난 습관을 가진 기사로 일본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다른 버릇으로는 수읽기를 하면서 성냥개비를 똑똑 부러뜨리는 것이 있다. 지면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 일본으로 건너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귀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아직도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 또한 계속 연습하는 모양이라, 김성룡이 아직 어린 시절 세계대회에 계시를 하러 나갔는데, 외국 기사들에게는 영어로 초읽기를 하는 것이 관례라 조치훈에게도 영어로 초를 읽었더니 또렷한 한국말로 "한국말로 부탁합니다"라고 말해 상당히 놀랐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다만 말을 약간 더듬는다고 한데 어릴 적 일본 아이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국말로 이야기하다 일본 아이들이 못 알아 먹는 기색이 역력하자 아차할 때마다 말을 멈추어서 그 영향으로 한국어를 더듬는다고 한다.
- 원래 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조치훈의 이름은 항렬에 맞게 조풍연이었는데, 어느 지나가던 스님이 "개명하지 않으면 엄마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개명을 하면 본인이 어릴적부터 물 건너에서 큰 이름을 날리게 되지만, 대신 동생이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결국 조치훈으로 개명한 후 그 말 그대로 동생은 영아시절에 사망했다고.. 나중에 조치훈이 일본에서 성공한 후 조치훈의 아버지가 그 스님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까지 게재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 상대 전적에서 장쉬에게 약하다. 그의 장인인 고바야시 고이치를 먹이로 삼았던 것을 생각하면 재밌는 관계다. 라고 적혀있지만 사실 조치훈과 고바야시의 상대전적은 66:63으로 대등한 수준이다. 도전기에서 조치훈이 7번 연속으로 타이틀을 차지하는 바람에 이미지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 이에 대해 조치훈은 방송에서 장쉬를 "빨리 사라져줬으면 한다"고 표현했다. 문제의 방송장면(니코동 계정 필요)
- 골프를 좋아한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에서 떠들어댄것도 있지만 골프를 칠 준비를 위해 평상복이 골프웨어라고(...). 골프에서 많은걸 배웠다고 한다.
- 7번기 타이틀전(기성棋聖, 명인, 혼인보전) 통산 29승 9패. 특히 3연패 후 4연승을 3번 달성한 7번기의 귀신이다.[22] 1983년 혼인보전에서 린하이펑에게 3연승 후 4연패하며 대삼관을 달성한지 얼마 못 가서 이를 내려놓은 적도 있다.
-
팝콘을 싫어하신다: 2015년 니코니코 초회의에서 장기측 입담꾼 가토 히후미 9단과 서로 지도대국을 두면서 잡담을 하는 코너이다. 사회자가 옛 NHK 아나운서 출신인 요시카와 세이이치여서 원활하게 진행되었고, 총 2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으며, 지지율 95% 이상일 정도 니코동에서도 이례적으로 좋은 평을 받은 기획
- 2015년 7월 26일 현대 바둑 70주년 기념 조훈현과 대결했다. 무려 13년만의 대결이라고, 경기시간은 1시라고 한다. 결과는 시간패했지만 대국내용은 매우 흥미로우니 관심이 있다면 다시보길 바란다
두 분 다 한 혼잣말 하시는 분이다 보니 꽤나 시끄러운 바둑이 될것 같다.자세한 내용은 조훈현 기사 내용 참조그로부터 약 6개월뒤인 2016년 1월 23일 '한국바둑의 전설'[23] 개막전에서 다시 만나 조훈현 九단에게 211수 만에 흑 불계승으로 승리하며 특별대국 당시 시간패를 설욕했는데 그 뒤에 2월 13일 열린 유창혁 九단과의 대국에서 시간패를 당했다.[24][25]
4 기풍
그의 기풍은 매우 치열하다. 서봉수의 처절함과는 어느 정도 통하면서도 조금 다른 맛이 있다. 모든 시간과 노력을 짜내 최선의 수를 찾아내려는 그의 대국 태도는 뭇 기사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대국에 졌으면서도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도 어릴 때는 손이 빨리 나가는 편이라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어릴 적에는 팔짱을 끼고 바둑을 두게끔 했다고. 그러면 손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가니까(…) [26]
그리고 바둑 기보만 보면 알수 없지만, 입담이 상당하고 돌발행동이 많다. 후지사와 슈코가 차지하고 있던 기성전에 도전할때(당시 만 26세) "슈코 선생님의 기성이 이걸로 마지막일 것을 생각하면"이라던 발언이라던가, 가토 마사오 九단 추모방송에서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과 함께 과거 대국기보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골프 얘기를 꺼내면서 골프치는 자세를 내보여서 바둑TV에서 제2카메라가 돌아가게 만든다던가, 대국 도중에 차가 바닥나자 초시계 담당자(...) 찻잔을 가져가 마신다던가... 하지만 전설적인 존재이고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보수적인 바둑계에서도 큰 문제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바둑 대중화에는 큰 공헌을 하는지도...
이 입담은 바둑 해설에서는 같이 해설하는 상대에 따라서는 상당한 포텐이 터지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2014년에 있었던 제69기 혼인보 도전기 제3국에서의 해설이다. 조치훈의 예측도에 만나미 나오 二단이 백 (6 十三) 을 제안하자, 맥이 안 좋다는 변명을 해대면서 시간을 버는걸로 시작해서, 만나미 二단이 계속 수를 물리면서 여러가지를 연구하자 "실패를 인정하라"면서 투덜대며 같이 두다가[27], 결국 좋은 수라는걸 인정하는 과정이 상당히 재밌다. 여기에 클라이맥스로 이다 아츠시 八단이 정말로 (6 十三)에 두어서, 만나미 나오가 맞췄다면서 신나하고, 옆에서 조치훈이 당황해하면서 몇분동안 해설을 버벅이는 것은 덤. 그 와중에도 전설답게 묘수일지도 모르는 수를 하나 제시했다.[28] 그의 기행목록 그 외
5 어록
"앞으로 나아가다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난다면, 그 벽에 손톱자국이라도 내고 물러나와야 한다."
"바둑에 진 사람의 제한시간이 남은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 바둑이, 컴퓨터에게 지게 될 때, 그 때가 인류가 끝나는 날입니다. 로봇에게 인간이 지배당하는 날입니다. 그런 때가 옵니다. 그러니까 로봇을 위해 우리가 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뿐입니다. 맛있는거 먹고, 즐겁게 놀고, 오늘도 즐겁게 즐기고, 팝콘은 안 먹는게 좋습니다"
- ↑ 일본기원에서 오래 활동하여 아예 로마자 이름이 Cho Chikun으로 알려져 있고, 여권에서도 일본어 발음대로, 즉 조 치'쿤'으로 개명되어있다. 유사 사례로 린하이펑(Rin Kaiho: 린 카이호) 九단이 있다.
- ↑ 말은 25대지만, 44기~53기 혼인보전 10연패.
- ↑ 여성 기사는 후지사와 리나가 특별 채용을 거쳐 11세 6개월에 입단
- ↑ 1999년 한국 출신 조선진 九단이 11연패를 저지한다.
- ↑ 한국기원에서는 조훈현이 최초인데, 한국인 전체를 놓고 보면 조치훈이 먼저다.
- ↑ 형 조상연은 일본기원 五단, 외조카 최규병/이성재는 한국기원 九단
- ↑ 똑같이 일본기원에서 한국 이름을 드높이던 신인 조훈현도 병역면제 이야기가 나왔었지만 거절되고 결국 조훈현은 귀국해 병역을 마친다.
- ↑ 조치훈이 가지고 있는 명인 타이틀전에서 도전자에 올라가야겠군.(1980년에 명인 타이틀을 조치훈이 딴 이후 다른 타이틀을 1982년에 잃어서 1983년 시점에서는 조치훈은 7대 타이틀 중 명인 하나만 갖고 있었다)
- ↑ 선배님이 갖고 계신 기성전의 도전자가 되겠습니다.
- ↑ 4:0으로 이겨 주겠다.
- ↑ 세 판만 져 주고 4판을 이기겠다.
- ↑ 기성(棋聖), 명인, 혼인보, 천원, 왕좌, 기성(碁聖), 십단전을 일본 7대 타이틀로 친다.
- ↑ 사실 처음엔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치훈이 차에서 내려 이를 수습하려던 와중에 갑자기 다른 차가 나타나서 그대로 그를 치어버린 것. 당시 의사가 밝힌 부상 부위는 다음과 같았다. 1) 오른쪽 정강이의 두 뼈가 모두 부러지고 뼈가 살밖으로 삐져나옴. 2) 오른쪽 무릎 관절에서 퇴골(허벅지뼈)의 연골이 떨어져 나감. 3) 왼쪽 무릎 관절에서 전십자인대 파열, 후십자인대 손상, 대퇴골의 연골 골절. 4) 왼손 관절부에서 요골과 척골 골절 5) 머리의 외상. 진짜로 머리(안쪽)과 오른손을 제외하고 전신이 너덜너덜해진 것. 다른 기사들도 뇌를 다치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고 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 ↑ 86년 기성전 도전기였는데 결과는 2승 4패로 타이틀 방어 실패. 일본기원 규정은 천재지변 정도가 아니면 대국이 연기되는 일은 없다. 그 정도의 심한 부상도 대국 연기 사유는 아니며 기권패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휠체어 대국을 감행한 투혼 그 자체로 사람들의 감탄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타이틀을 획득한 고바야시보다 '그 상태로 2승이나 거두다니 대단하다'라며 조치훈에게 갈채를 보냈다.
특히 조치훈이 완승한 제 3국은 도저히 그런 중상을 입은 사람의 바둑으로는 믿을 수 없을정도로 명국이었다고.참고로 그 당시 기성전을 비롯한 일본바둑의 메이저 타이틀 도전기는 제한시간 8시간(…)으로 이틀에 걸쳐서(…) 두는 방식. 히카루의 바둑에 보면 봉수(封手)하는 장면이 나온다. - ↑ 조치훈은 당시 3국에서 흑을 잡았고, 251수 끝에 1집반 승을 거두었다 당시 기보 보기. 바둑 역사에 보기 드문 중앙 혈전이 벌어진 대국이다.
- ↑ 3국에서 조치훈에게 지자, 고바야시는 자기는 역시 의자에 앉지 않고, 정좌한채로 두겠다고 주장. 4국 이후로는 주최측의 조정으로 고바야시는 무릎을 꿇고, 조치훈은 휠체어에 앉을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고바야시의 승부욕도 잘 보여주는 장면. 조치훈과 고바야시의 나빴던 관계는 서로 전력을 다한 이 도전기를 통해 크게 호전되었다고 조치훈은 회고했다
- ↑ 참고로 이 사진만 보면 고바야시가 조치훈의 휠체어 투지에 감명받아 머리를 짦게 깎고 대국에 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아니고 이 대국전에 있던 중일 슈퍼대항전 매치에서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다고 다짐하고 갔던 고바야시 포함 일본 대표팀이 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갔던 일본 대표선수 전원이 모두 삭발을 했기 때문이다(...)
- ↑ 그러나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뼈가 약해져서 의자에 앉는 평소 대국과 달리, 무릎을 꿇은채 두는 도전기에 대비해서 수영장에서 무릎을 단련한다고 한다
- ↑ 21대까지는 에도 시대에 역사적으로 혼인보를 계승한 인물이고, 22대 이후로는 타이틀 전에서 조건을 만족한 사람에서 주어지는 형식이 됐다.
- ↑ 혼인보의 존칭은 선대 혼인보 처럼 이름에 '秀', '丈', '元', '昭', '寿' 등의 글자를 넣어 실명과 다른 존칭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나 조치훈은 본명 이외의 다른 이름을 쓰는 것을 거부하여 본명인 치훈을 그대로 쓰게 되었다.
- ↑ 링크된 영상을 보면 그림자로 조치훈 9단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것이 보인다.
- ↑ 1983년 기성棋聖전(후지사와 히데유키), 1984년 명인전(오오타케 히데오), 1992년 혼인보전(고바야시 고이치)
- ↑ 조치훈,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5명의 레전드 기사가 출전해 5인 풀리그로 우승자를 가리는 대회다.
- ↑ 대국을 하다가 조치훈 九단이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 반상까지 땀이 떨어졌고 이를 닦다가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초읽기까지 시간을 지체해버리는 바람에 이 상황이 벌어졌다. 상대였던 유창혁 九단도 당황했다고.
- ↑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위에서 언급된 대로 조치훈 九단은 툭하면 자기 머리를 때리는 습관이 있는데 이 날도 어김없이 자기 뒤통수를 가격했다가 맺혔던 땀이 대량으로 튄 것....이다.
- ↑ 손이 빨리 나가는 것으로는 스포츠계 콩라인의 전설 서능욱 九단도 유명하다. 이쪽은 더 심해서 염주를 들고 대국장에 들어갔는데 하도 염주를 돌려대다가 염주가 끊어져 버렸다고....
- ↑ 그 와중에 조치훈도 한수 물린다(...)
- ↑ 실전에서는 구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