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思想
공 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교리이다.[1] 도교의 일부에서도 채용되며 원불교에서도 나타난다. 서방에서 나타난 허무주의와는 다르며 모든 것의 덧없음을 뜻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필요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념과 물질적인 것(모든 공간과 시간,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해탈했음을 나타내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공(空)은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대승불교 계통에서 특히나 강조된다. [2] [3] 여기서 공은 존재가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연기#s-4에 의해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아는 자아가 자성을 가지지 않고 공함을 말한다. 설일체유부 등의 학파에서는 법#s-3만은 실제로 존재함, 즉 공하지 않음을 말했다.[4][5] 그런데 용수의 중관학파는 이에 반대하여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한 것들도 전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공한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함도 공하다. 용수의 해석에서는 공(空)과 연기#s-4가 아주 밀접한 개념이 된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자아를 비롯한 모든 것에 자성이 없으므로 집착할 대상이 없음을 말하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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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공(空)을 이러한 태양계형 원자모형에 대입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공의 개념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 자주 인용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원자모형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현대철학적으로 보면 공은 존재들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있다고 믿지만 이것은 나에 해당하는 영혼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부를 것을 우리가 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혹 현대과학에서 원자의 대부분이 실제로 비어있다는 것을 공과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접근이다[6]. 불교에서 공은 실제로 사물이 비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7]. 일부 과학사회학이나 반실재론에서 말하듯이 원자를 비롯한 과학적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게 그나마 올바른 접근 방식이다. 그래도 옛날과 달리 원자의 구성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그나마 공 사상의 내용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위와 같은 태양계형 원자모형 그림은 비록 나중에 잘못된 것임이 밝혀지긴 했어도 종종 인용된다.
'개념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논점에 대해 용수의 대표저작인 [중론]을 인용해보자면 대강 이런 식이다.
"누군가 (공하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고 개념적으로 조립되어 구성되지 않아 영원히 고정불변한 자성[8]이 있어, 즉) 근원적으로 실재하는(intrinsically real) 번뇌를 지녔다면, 어떻게 번뇌를 없애겠는가? 누가 근원적인 본질(intrinsic essence)을 없앨 수 있는가?
누군가 근원적으로 실재하지 않는(intrinsically unreal) 번뇌를 지녔다면, 어떻게 번뇌를 없애겠는가? 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없앨 수 있는가?"
(p 265, Nagarjuna's Middle Way, M. Siderits and S. Katsura)
'개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아 세상 모든 것은 이슬과 같고 눈의 티끌과 같고 벼락과 같고 신기루와 같다'라는 부분을 읽고나서 '실존한다'에서 '실존하지 않는다'의 반대 극단으로 빠지기 쉬운데, 여기서 용수는 깔끔하게 반대 극단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없앨 수 있는가'라는 말로 논파한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음'을 자성으로 지닌다면 그 또한 다른 것을 자성으로 지니는 것만큼이나 모순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논점이다. 엄격한 사람이었다.(...) 사실 이런 '양 극단을 모두 거부한다'라는 전통은 원시불교 때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석가모니 또한 '사람은 죽은 이후에 존재합니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존재한다고 하면 상견(eternalist)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견(annihilist)이다. 둘 다 바른 견해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용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상술된 대로 '자성이 없어 공하다'라는 주장은 즉 모든 것의 '성질'은 다른 것들과의 연기적인 관계성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 스스로만으로서는 성질을 성립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눈은 볼 대상 없이는 그 자신을 볼 수 없고, 본다는 성질을 획득할 수 없다. 길다는 개념은 짧다는 개념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결과가 없다면 원인은 원인으로 불릴 수 없다. 이는 유명론적으로도 그러하고 실존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언어'는 그 성질 상(자성이 없다고 했음에도 성질을 따진다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이런 파라독스는 중관학파와 선불교에는 널리고 널렸다!) 지칭하는 대상에 '자성'처럼 느껴지는 성질을 부여한다. 이 언어를 잘 분석해보면 자성이 있다는 생각은 결국 어떤 경우에든 모순으로 귀결되고, 따라서 편리한 도구에 불과한 언어에 지나치게 얽메이는 것은 어리석으며, 이런 잘못된 견해가 뭇 중생을 고통으로 이끈다는 주장.(하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불도는 이룰 수 없다고도 또한 주장한다.)
언어의 사용은 심리적인 현상이기에, 마음을 아뢰아식을 포함한 팔식으로 나누어 그 작용을 연구한 유가유식행파는 종종 중관학파와 대치되는 주장을 했지만, 사실 서로의 논서에 열심히 해설본을 적어가며 공부하는 상호보완적인 부분도 많았다고 한다. 유가유식행파가 해석하는 공사상은 '모두 마음에 비친 그림자(projection)일 뿐, 마음을 떠나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유심론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고, 또한 모든 장식이 아뢰아식에 이미 내재되어있다는 주장을 따르자면 확실히 그렇게 해석되어야 할 당위가 커지지만, 단지 마음이 경험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주장인 현상학적인 해석 또한 가능하다.('모두 마음 속에 있다'는 주장을 철두철미하게 믿어서 달리는 버스 앞에 망설임없이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언어로는 진리를 표현하지 못한다'라는 주장은 중국의 도가사상과도 궤를 같이하고, 그 영향을 받은 선불교가 이어받아 '교외별전, 불립문자'와 좌선수행을 교학수행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를 낳았지만, 오히려 수많은 화두와 그에 대한 해설집, 그리고 해설집에 대한 해설집 등을 낳았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또한 전부 다는 아니라도 적지않은 경우 선불교의 조사들이 선불교적인 깨달음을 얻기 전 교학에 이해가 깊었다는 부분 또한 아이러니. 하지만 상기한 공사상은 부파불교에서의 논장의 발달과정처럼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어 초기불교의 소박하고 단순한 힘을 점점 잃게 되었기 때문에, 선불교의 불립문자는 사실 이런 실용적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자정운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 (네이버 지식백과) 공사상 (空思想)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 ↑ 반야심경 이전에 성립한것으로 보여지는 금강경은 공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공 사상을 표현했다.
- ↑ 상좌부 불교의 주요경전인 니까야경에서도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승불교에서의 공의 표현과는 맥락이 살짝 다르고, 빈도수가 매우 적다. 무아론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과, 명상 중에 경험하는 체험에 대한 표현으로 쓰였다.
- ↑ 여기서 법은 실체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 ↑ 그러나 자아와 같은 대상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법이 아니라 법에 의해 생겨난 가법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공하다.
- ↑ 원자를 이루는 전자와 원자핵은 존재 여부만 입증되었지, 어느 특정한 색과 모양을 갖고 있음이 입증된 게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실제로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모양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 공을 단순히 '비어있음'으로만 보게 되면 공 사상에 대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 ↑ svabhava라고 불렸다. 초기불교에서 반대한 아트만과 비슷한 개념이다. 무아는 anatman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