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phenomenology
데카르트 이후 자아는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으로서 여겨왔다. 그러나 과학혁명을 거치고 관료제가 고도로 발달해가면서 목적성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라고 여겨왔던 자아가 관리의 대상이 되면서 철학의 영역 안에서조차 자아를 목적을 가진 주체성에 입각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되는 것으로서 파악하기 시작했다. 에드문트 후설은 이러한 현상에 철학이 귀속되어 이에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자아가 정말로 뭘 지향하고 있는지 찾아보는 게 철학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자아의 목적 의식을 외부 요인을 배제하고 나서 파악할 수 있는 학문 체계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되었고, 20세기 초반에 들어와 괴팅겐 대학에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현상학을 창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상학에서는 관료주의적 압력이나 신체의 생물학적 특성에서 철저하게 독립된 자아의 그 자체로서의 방향성을 탐색한다. 이를 위해 외부 세계와의 일체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자아를 떼어놓고 보기 위해 자아 그 자체로 환원을 시행하는데, 이를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른다.
또 후설은 객관적 학문으로 인한 당대 유럽학문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현상학을 제시한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치환하려는 실증주의의 대두는 학문을 단순한 사실학으로 환원하고 인간의 삶을 지탱하던 모든 가치와 규범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 인간 현존의 문제까지 야기했다.[1] 이에 후설은 실증주의의 배타적 태도를 극복하고 근원적 명증성의 세계인 생활세계의 복권을 위해 객관적 학문 일반과 주관성의 정초관계를 시작으로 "사태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정신을 통해 위기 극복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며 현대철학의 시대를 열게된다.
2 현상학의 개념들
2.1 의식의 지향성
지향성 개념의 시초는 라틴어 intendere 에 있다. 이 단어는 '무엇을 가리키기' 혹은 '무엇을 겨냥하기' 를 의미한다. 의식이 어떤 대상을 표상한다, 겨냥한다, ~에 대한 것이다 등을 말할 때 그것이 지향성이 있다고 설명된다. 중세철학에서 지향성은 꽤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현상학적 의미의 지향성의 직접적 시초가 되는 것은 후설의 스승인 프란츠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에 해당한다. 후설은 지향성을 의식의 근본적 특징으로 삼았는데, 의식은 대상과 마주하는 순간 그 대상으로 향해있는 상태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2] 결국에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이러한 대상과 의식의 관계가 의식의 근본이라는 것이 후설의 요지이다.
후설의 후기 현상학에서 대상과 의식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며, 우리에게 특정 대상은 항상 의식에 대한 관계로서 주어지는 것, 즉 현상에 해당한다.
후설의 후기 현상학이 '초월론적 환원' 을 실시하여 관념론적인 것은 사실이나, 실재론적 현상학 realistic phenomenology 라 하여 의식 밖의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상학의 학파도 존재한다. 그것을 괴팅겐 학파라 부른다. 이것은 현상학이 형이상학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의식과 대상, 혹은 행위자와 행위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는 2세기의 걸출한 불교철학자인 용수보살(Nagarjuna)의 저작 [중론](Fundamental Verses on the Middle Way)에서도 발견되는데, "눈(eye)은 (대상 없이) 스스로를 볼 수 있는가" 혹은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등의 역설로 표현된다. 즉, 눈의 본다는 성질은 그 대상이 있기에 성립하며, 눈과 대상 사이의 관계가 없이는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간다는 성질은 아직 간다는 성질을 가지지 않은 자를 표현하기위해 주어지지만, 이미 가는 자에게는 간다는 성질을 더할 수 없으며 가지 않는 자 또한 이미 가지 않기에 간다는 성질을 더할 수 없다는 귀류논증법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가는 행위는 가는 자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어 '간다'라고 하는 것은 개념으로서의 가설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일련의 논리들은 결국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발생하는 불변하고 고정된 자성(아트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무아 및 공 사상으로 완성된다.
2.2 현상학적 에포케
에포케epoché는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판단 중지'를 의미하는 단어다.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이 과도하게 치우치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피론주의자들이 주로 사용 해왔는데, 현상학적 에포케도 마찬가지로 현상학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식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의식 그 자체를 판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상학적 에포케를 전제 해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유행하는 옷을 사서 입었을 때, 그 옷이 유행하게 된 배경이나 그의 소득 수준, 사회적 직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식 속에서 일어난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현상학적 에포케를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가 그 옷을 사게 되기까지의 사고 과정을 살피고, 그럼으로써 그 자신에게 있어서 그 옷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흔히 사용되는 '청개구리의 비유'가 있다. 청개구리 형제의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자신을 강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외면적으로 드러난 사실, 행태이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맥락을 살피면 청개구리 형제는 항상 시킨 일을 반대로 하고 있었고, 청개구리 어머니는 속으로는 자신을 산에 묻어달라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유언을 남겼을 수 있는 것이다.
외면에 드러난 행태에 근거하여, 청개구리 어머니와 그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사회과학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 비추어 섣부른 판단을 한다면 이는 현상의 본질을 왜곡하게 되기 쉽다. 따라서 충분한 이해를 거치고 상당한 정도로 간주관성을 확립하기 이전에는 일단 판단을 미루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2.3 노에시스와 노에마
노에시스noesis는 그리스어로 지식, 혹은 지성을 의미하는 누스nous와 지각을 의미하는 노에인noein을 합성해서 만든 용어로, 지향성을 가진 자아가 대상으로서 접하게 되는 실체의 대상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것을 대상으로서 여길 수 있으려면 그것이 지각의 대상이 되어 지성의 작용을 촉진시켜야 하는데, 그것을 알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이 방향성을 지닌다는 전제 하에서 그 방향은 항상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역으로 말해 자아는 지각할 수 있는 것만을 대상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현상학은 존재하는 것으로서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 이외에도 의식이 향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도 마찬가지로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자아가 신에 대해 생각하려고 한다면 신 또한 현상학에서는 탐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에마는 생각, 혹은 생각 하고 있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그리스어의 νόημα, 로마자로 옮기면 noema로 그 의미는 동일하다. 노에시스가 지향하는 대상과 결합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고 작용 전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은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래야 할 것과 그래서는 안 될 것, 그럴 필요가 있는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명확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등의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는 반드시 지속하게 되는 사고가 있고, 이것이 노에마다. 이는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과정 전체에 대한 개념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을 예를 들어서 사용해 보자면 신을 향한 노에시스에서 사람은 신이라는 관념의 의미에서부터 신의 존재의 유무, 그것의 자기가 속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지는 일반적인 감각 등을 노에마한다.
2.4 이념의 옷
후설이 극복하고자 한 주요 세계관은 과학혁명을 시작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자연과학에서 비롯된 과학주의적 세계관이었다. 자연의 참된 인식은 오직 자연과학에서만 가능하며 그 외의 지식이나 관점은 무가치하다는 인식을 담은 이 세계관은 후설이 보기에 당시 유럽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고, 적극적 극복 대상이었다. 후설은 이러한 관점을 이념의 옷이라고 명명하였다.
근대 자연과학의 토대가 되는 수학은 자연과학의 확실성을 보증해줄 지표였고, 자연과학은 수학적 논리에 따라 구성된다. 정밀한 수학적 논리에 따라 구성된 자연과학은 엄격한 인과에 따른 자연의 설명을 추구하였고, 이러한 지식체계가 일상에까지 영향을 끼쳐 일상의 다양성을 은폐하게 된 것이다. 후설은 그 시초를 갈릴레이로 지목하면서 자연의 폭넓은 발견과 동시에 다양한 일상을 은폐했다고 하여 갈릴레이를 발견의 천재인 동시에 은폐의 천재라고 평하였다.
2.5 현상학적 환원
현상학의 핵심은 바로 의식에 주어진 사태 그 자체, 즉 현상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실재론적 의미의 우리 외부의 것도 관념론적 의미의 주관적 현상도 아닌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고 체험되는 현상 그 자체이다.
후설은 이를 위해 현상학의 판단중지를 통해 단계별 환원을 거쳐야 할 것을 명시했는데, 각각 자연적 태도와 반성적 태도로 나뉜다.
자연적 태도는 자연주의적 태도와 심리주의적 태도로 구별된다. 자연주의적 태도는 자연과학으로 규정된 현 시대의 세계관에 젖어있는 가장 일반적인 태도인데, 이 상태에서는 모든 현상을 자연과학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심리주의적 태도는 19세기말 당시 한창 떠오르던 심리학에 힘입어 탄생한 태도이다. 이는 사람의 모든 작용과 현상을 심리학의 지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심리주의적 태도는 심지어 논리학마저도 심리학으로 정초하려고 했고, 후설은 이와 같은 태도를 결과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진다고 비판하였다.
반성적 태도는 심리적 현상학의 태도와 선험적 현상학의 태도로 나뉜다. 전자는 위의 자연적 태도의 한계를 깨닫고, 사람에게 주어진 현상을 판단중지하여 그 자체를 알아보려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관념론적 주관이 아닌 우리가 현상을 통해서 겪는 모든 경험과 체험의 속성 및 맥락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속해있는 세계를 괄호치는 대상에서 빼버리는 한계를 갖고 있는데, 후설은 이를 방지하고자 선험적 현상학의 태도를 제시한다. 마지막에 해당하는 선험적 현상학의 태도는 나의 체험과 정체성을 규정짓는 자연주의적 태도와 심리적 현상학의 태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내가 속해있는 세계까지 괄호쳐서 나에 대한 체험으로 만들어 자아로서의 나를 규정짓는 궁극적 원인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원들을 통해 후설이 결과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 뿐만이 아닌 경험론의 독단적인 성격까지 넘어 나라는 현상이 이 세계와 함께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다.
2.6 생활세계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에 해당한다. 이는 우리가 아는 일상과 구분되는 개념인데, 우리가 아는 일상은 사람에 따라 각종 이념과 지식체계에 영향을 받아 구성된 특정한 관점에 따라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은 이를 자연과학적 지식에 비친 세계관에 대비해 사용하였다. 생활세계는 주어진 모든 선입견과 체험을 괄호친 후에 드러나는 것이며, 이는 습관적 선입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나에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사회과학의 연구방법에 있어서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하며, 후설은 이를 통해 선험적 자아[3]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2.7 상호주관성
현상학이 유아론이라는 오해를 풀어내고자 후설이 창안한 개념. 후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을 빌려와서 이 개념을 고안해낸다. 각각의 개인은 하나의 모나드이지만, 그 모나드는 타자와의 감정이입을 통한 소통이 가능하며 이러한 소통의 중첩을 통해 주관성의 그물망을 형성해나간다. 이렇게 구성된 상호주관성은 객관성의 토대가 되며, 자연과학 역시 과학자사회라는 상호주관성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