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카날 전역 | ||
날짜 | ||
1942년 11월 12일(1차) ~ 1942년 11월 14일(2차) | ||
장소 | ||
솔로몬제도 과달카날 앞바다, 헨더슨 비행장 | ||
미 해군 | 일본 해군 | |
지휘관 | 데니얼 켈러헌† 노먼 스콧† 윌리스 리 | 아베 히로아키 곤도 노부타케 |
병력 | (1차)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8척 (2차) 전함 2척 구축함 4척 | (1차) 순양전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2차) 순양전함 1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1척 구축함 6척 |
피해 규모 | (1차) 중순양함 2척 대파 경순양함 2척 상실 구축함 4척 상실 (2차) 전함 1척 중파 구축함 3척 상실 | (1차) 순양전함 1척 상실 구축함 2척 상실 (2차) 순양전함 1척 상실 구축함 1척 상실 |
결과 | ||
일본 해군의 물자 수송 실패. 미 해군의 승리 | ||
기타 | ||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확정시킨 해전. |
목차
1 개요
영어 : Naval Battle of Guadalcanal, Third and Fourth Battles of Savo Island, Battle of the Solomons, Battle of Friday the 13th
일본어 : 第三次だいさんじソロモン海戦かいせん
짤막하게 과달카날 해전을 정리한 글
과달카날 전투 당시 1942년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해역 등지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야간 해상전.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하고 과달카날의 일본 육해군을 지원하기 위해 진격한 일본 해군 함대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투입된 미 해군 함대간의 전투로서 최종적으로 일본이 패배했다. 이 전투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기는켜녕 오히려 순양전함 2척을 손실하고, 지상군용으로 딸려 보낸 수송물자마저 죄다 잃어버린 일본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
일본측에서는 제3차 솔로몬 해전이라고 부른다.
2 배경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후로 핸더슨 비행장은 일본군에겐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미군이 비행장을 틀어쥐고 있는 바람에 과달카날 상공의 제공권은 미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고, 제해권 역시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무력화 내지 탈환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지상 전투는 병력의 숫적,질적 열세로 인해 실패했고, 라바울에서 출격한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라바울과의 거리와 비행장 자체의 대공방어로 인해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상함대에 의한 포격만이 효과를 거두었지만, 이것은 전함급은 되어야 효과가 있었다.
일본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화기를 포함하여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한 번에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산타크루즈 해전의 결과로 미군 항공 전력의 또 다른 축이었던 항모기동부대가 전열에서 이탈한 상황이었으므로 미군의 항공 전력 거점은 헨더슨 비행장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 보급이 성공하려면 수송함대를 위협하는 핸더슨 비행장을 확실하게 무력화시켜야 했으므로 공고급 순양전함 2척이 포함된 별도의 대함대를 비행장 포격차 투입시키기로 했다.
수송선 11척에 38사단의 병력 1만명과 50문의 중포,8만발의 포탄과 1만톤의 보급품을 싣고 11척의 구축함에 의한 근접 호위와 중순양함 2척을 포함한 5척의 외곽 호위를 붙였다. 비행장 타격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를 포함한 14척으로 구성된 11전대가 아베 히로아키 제독의 지휘하에 출격했다. 이 전함 부대의 후속타로 곤도 노부다케 제독의 중순양함 부대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미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있던 해군중장 곰리 제독이 해임된 뒤로,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나서서 과달카날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지만, 그 전폭적인 지원이 제대로 결실을 이뤄서 미군이 공세로 나설 역량을 갖추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편, 과달카날 현지의 미군들은 이미 10월에 일본 전함의 포격에 의해 비행장이 무력화 되었을 때 일본군의 증원과 역습에 한동안 고생한 바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핸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어서 일본군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면 공세로 나서기도 전에 승기를 놓치고 이 일대에서의 전투가 장기화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일본군의 급습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미군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뒤 수리 중이던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고속전함들을 계속 수리해가면서 전장으로 투입시켰지만, 엔터프라이즈가 11일에 누메아를 출항하였고 고속전함인 사우스다코타와 워싱턴은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행동하는지라 도저히 시간에 맞춰 올수가 없었다 . 결국 터너 제독은 전함 중심의 일본함대를 1차로 막아야 하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증원 부대를 호위하던 순양함 부대에게 맡길수 밖에 없었다.
3 전개
3.1 1차 과달카날 해전
11월 13일 새벽 첫번째 야간 해전이 일어났다. 일본의 11전대가 전함 키리시마와 히에이를 보유했던 반면, 인근에 배치된 미 해군 호위함대는 순양함 위주로 비교적 약체였기 때문에, 아베 제독은 미군이 정면으로 덤빌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이 일본전함부대를 막아야 하는 미군 순양함 부대의 경우, 원래 2개 부대였던 것을 일본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급히 하나의 부대로 묶어서 편성한 것이었다. 이 통합부대의 지휘를 맡게 된 캘러헌 제독은 함대지휘 경험이 없었지만 실전 경험이 있는 스코트 제독보다 2주 먼저 진급된 짬밥으로 지휘권을 부여받은 상황이었다.[1]
적과의 충돌을 고려하지 않은 공격부대와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이 이끄는 수비부대가 맞붙게 된 1차 과달카날 해전은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의 경과는 문자 그대로 난장판, 개판 5분전의 혈투가 된다.
상대방을 먼저 발견한 건 미국함대였으나, 함대 지휘 경험이 일천했던 캘러헌 제독이 혼란에 빠져 시간을 허비한 동안 양측의 구축함들끼리 갑자기 마주치면서 놀란 미 구축함들이 변침하는 바람에 미 함대의 진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일본 해군도 미 해군의 존재를 눈치챘고 결국 일본 해군에 첫번째로 포착된 미 해군 경순양함 애틀란타가 사격을 시작함으로서 전투가 시작된다. 애틀란타가 일본 해군 구축함 아카츠키에 의해 곧바로 무력화 되는 동안 캘러헌 제독이 사격 명령을 내렸으나 그 명령이 심히 괴랄했고 그마저도 혼선이 거듭되는 바람에 미군 함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리하여 전투는 서로가 뒤섞인 가운데 혼전, 난타전 양상으로 전개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스코트 제독은 캘러헌 제독이 지휘하는 샌프란시스코의 팀킬로 전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캘러헌 제독도 히에이와의 난타전 끝에 전사해버렸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가 계속 버티고 히에이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나머지 미 군함들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일본 함대 진형 사이를 무턱대고 비집고 들어가서는 정체와 위치가 확인된 히에이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그 와중에 양측 함정이 마주치면 또 서로 쏴대는 식의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아베 제독은 이런 난장판의 상황에 기가 질린데다 자신이 승함한 히에이가 난타 당하는 와중에 참모장이 전사하고 그 자신도 부상을 입는 바람에[2] 그만 전의를 잃고 말았다. 결국 전투 20분만에 비행장 포격을 포기하고 퇴각명령을 내렸다. 정작 실제 상황은 전함 한 척 없는 미 해군보다 일본 함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난전의 한복판에 휩쓸려 있던 아베 제독은 실제 전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미 함대는 대부분의 함정이 피해를 입은 반면 일본함대는 전함 히에이, 구축함 유다치, 아카츠키를 뺀 나머지 함선들(전함 기리시마도 포함된)이 거의 건재했기 때문에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면 일본함대의 압승으로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되었건간에 일본 함대가 꼬리를 말고 물러남으로서 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날이 밝아지면서 피해가 심해 전장을 이탈하지 못한 군함들끼리 마저 포격을 교환한 끝에 일부는 끝내 격침되고, 일부는 겨우 탈출했다. 일본측 기함 히에이는 근거리에서 받은 집중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나머지 전투력과 항행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날이 밝으면서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기들의 타겟이 되어버렸고 끝내 항행능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이제 함을 살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아베 제독은 13일 오후 6시에 함을 자침시킨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뒤이어 진입하는 아군 함대의 안전을 위해 히에이를 그대로 둬서 미군의 시선을 좀 더 끌기를 바랬지만, 그의 명령이 도착한 건 자침을 시작한 뒤었다. 굳이 야마모토의 명령이 아니었어도 히에이는 13일 낮 동안 미군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었던터라 뒤에 오던 순양함 중심의 호위함대는 미군의 방해 없이 과달카날로 접근할 수 있었다.
3.2 막간극 - 일본 해군 중순양함들의 습격과 미 해군의 반격
비행장 공격부대의 작전 실패로 상륙부대는 작전을 일단 취소했지만, 11월 14일 새벽 수송함대를 호위하던 미카와 제독의 함대가 비행장에 공격을 가했다. 이들은 미군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은 채 과달카날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들 함대가 미군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은 데엔 상술한 히에이 외에도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가 USS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임무부대의 위치를 착각한 것도 한 몫했다. 일본 호위함대의 남하를 감지한 미군은 13일 저녁에 해군소장 윌리스 A 리 제독에게 엔터프라이즈를 호위 중이던 미국의 신예전함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네임쉽 사우스다코타를 이끌고서 연료를 가장 넉넉하게 실은 4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64기동부대로 재편성하여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16임무부대의 위치가 과달카날에서 상당히 멀리 있다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14일 새벽에는 과달카나에 도착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몰랐다. 결국 64 기동부대는 당일 북상을 포기하고, 과달카날 남쪽에서 대기하다가 14일 오후에야 북상하게 된다.
일본 해군 중순양함이 아무런 제지없이 과달카날로 온다는 소식에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미 정부 및 군부에서는 과달카날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긴장감이 높아졌다.
미군으로서는 다행히도 중순양함의 8인치 함포로는 위력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일대 해역에 소수 남아 있던 미군 어뢰정의 반격에 일본 함대가 일찍 물러나면서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14일 아침이 밝으면서 이들 호위함대와 수송함대들은 미 해군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에게 중순양함 키누가사와 6척의 수송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2함대가 1차전에서 살아남은 11전대의 잔존 세력 및 14일 미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수송함 4척과 구축함 5척을 규합하여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3.3 2차 과달카날 해전
곤도 제독의 2함대는 사전 항공정찰에서 64 기동부대 소속 미 해군의 전함을 못보던 함종의 중순양함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미 해군의 전력을 얕보고 있었다.[3] 게다가 1차전에서 함대의 주력함이 혼전에 휘말리는 바람에 전함 1척을 잃어야 했던 경험이 생생했다. 따라서, 곤도 제독은 자신의 부대를 3개로 나누면서 '중순양함 중심의 약체 미 함대'는 경순양함과 구축함들로만 상대하게 하고, 전함과 중순양함들은 과달카날 포격을 위해 후위로 배치했다.
11월 14일 오후 10시 10분경에 일본함대가 64 기동부대를 발견했고, 미 함대를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기 위해 먼저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제공격은 미 함대에 의해 이뤄졌다. 11시 17분경 레이더로 경순양함 센다이를 포착하여 포격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미 64 기동부대의 구축함들은 신형 레이더도 야간전 훈련도 합동전술도 없었다. 이들 미국 구축함들은 이미 먼저 전개하고 있던 일본 수상함들에게 이내 전멸 당하고 말았다. 미 전함들은 구축함을 어떻게든 도우려 했으나 일본함대는 분산되어 있었고 사보섬의 간섭현상이 맞물리면서 레이더를 이용한 피아식별에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사우스다코타의 함내 전원이 정비불량으로 나가버리는 바람에[4] 전원 전체가 꺼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었고, 마침 일본함대 측에서는 후위에 있던 전함 기리시마와 중순양함들이 현장에 도착하여 사우스다코타를 포착하게 된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미군의 신형전함과 맞붙게 되었음을 알게된 일본함대는 모든 화력을 사우스타코타에 퍼부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맞물리면서 격침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우선 사우스타코타는 효율적인 구조와 중장갑을 두른 신형함이었다. 총 26발의 포탄을 얻어 맞았지만 단 한 발도 주 장갑판을 관통하지 못했다. 한편, 일본 함대, 그중 기리시마의 경우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상정해서 3식탄을 미리 장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수상함과의 교전에 탄종을 교체할 틈이 없었으므로 초탄은 이렇다할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제대로 철갑탄을 날리기 시작한 건 후속타부터였다.[5] 일본 해군의 자랑인 어뢰들은 어찌된 일인지 죄다 빗나가버렸다. 덕분에 사우스타코타는 상부 구조물에 있는 사격통제장치와 레이더, 통신설비가 피해를 보아 전투력을 상실하는 등 큰 위기에 봉착했어도 격침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때 리 제독이 탄 기함인 USS 워싱턴에서 레이더 조준으로 8,000m앞에 있던 기리시마를 향해 일제사격을 날려서 한창 사우스다코타를 신나게 포격하던 기리시마를 삼도천으로 보내버렸다. 사실 워싱턴은 기리사마를 포착하고 조준까지 끝낸 상태였지만 사우스다코타에 오인사격을 할까봐 쏘지 못하고 있었는데,[6] 기리시마가 다른 함을 위해 사용한 전조등에 사우스다코다가 비치자 오인 사격할 우려가 사라졌다. 이제 마음놓고 포문을 열어젖힌 워싱턴은 기리시마를 상대로 발포 첫발부터 협차에 3번째 일제사격으로 명중탄을 기록했다. 기리시마도 반격했지만 워싱턴이 7분동안 발사한 16인치 초중량탄 75발 중 9발에 그대로 격침 당했다. 아타고와 타카오를 비롯한 잔존 일본 함정들이 반격을 가했지만 전함의 화력에 압도당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워싱턴이 일본 함대를 상대하기 시작한 덕분에 사우스다코다는 한 숨 돌릴 수 있었고, 전원이 복구되자 15일 오전 1시에 전선에서 이탈했다. 1시 33분에 워싱턴도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더 이상 쫓지 않고 물러나면서 2차전이 끝났고, 일본군의 헨더슨 비행장 포격 시도는 또 다시 좌절되었다.
2차전에서 미 함대를 이끈 리 제독은 미 해군에서 레이더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었으며[7], 포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서 그가 이끄는 함대의 포술 숙련도는 최고였다[8]. 이 두가지가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리 제독은 레이더를 활용한 야간 포격전의 권위자가 되어 있었고 이 전투를 통해 그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했다.
과달카날에서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미 해병대원들은 검은 배경 속에서 둔중하고 거대한 함선들이 무지막지한 포격을 주고받는 모습이 마치 거인들의 싸움 같았다고 회고했다.
3.4 피날레 - 수송작전 대실패
2차례에 걸친 수상함 간의 야간 포격전 끝에 헨더슨 비행장 포격은 무산되었다. 이제 일본 함대에게 남은 선택지는 수송작전마저 포기하느냐 마느냐였다. 상황을 보고 받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남아있는 4척의 수송함들을 모두 과달카날의 일본군 장악 지역 해안에 좌초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 수송함들이 일제히 해안가로 돌진해 좌초했고, 일본군은 이 수송함에 실린 물자들을 양륙하기 위해 기를 썼지만...... 15일 날이 밝자마자 헨더슨 비행장으로부터 미군 항공기들이 들이닥쳐서 수송함들과 물자들을 죄다 불태워버렸다. 결국 일본군은 6천 명의 전사자와 함께 화포와 식량, 탄약 등을 포함한 보급품 1만톤 중에서 단 5톤만을 건지게 되었다. 99.95%의 수송물자들이 수장되거나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걸로 과달카날 일대의 주도권을 건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4 결과
과달카날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일본 육군 역시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일본군이 취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구축함이나 잠수함을 이용한 소규모 수송 밖에 없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과달카날 일대에서 해전이 이어지긴 했지만, 일본군의 과달카날 탈환 시도에 의한 것은 전혀 없었다. 반면, 미군은 과달카날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덕분에 보급과 증원에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를 시점으로 미군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게 된다.
이 전투로 미군이 제해권을 장악했지만 여전히 수상함 대 수상함 간의 교전, 특히 야간전에 있어서는 미 해군이 여전히 한 수 아래임을 확인했다. 2차전을 승리로 이끈 윌리스 리 제독은 미군이 유리했던 건 레이더 뿐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때의 경험은 이후로도 미 해군의 전술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 리 제독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것이 훗날 리 제독이 참가한 필리핀 해 해전의 양상을 결정짓는데 작게나마 일조하게 된다. 당시 마크 미처 제독은 고속전함들로 야간전을 벌이고 날이 밝으면 함재기로 마무리를 하려고 했는데 이를 만류한것이 고속전함부대를 지휘하던 리 제독이었다.[9]
상술했듯이 이 전투의 승패는 미 해군의 개별 전투력이 일본 해군보다 뛰어나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일본 해군은 미 해군보다 우세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을 거치면서 양측의 항모 세력들이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남태평양 일대에 야마토를 포함한 전함 7척을 비롯하여 보다 많은 수상함들을 배치하고 있던 일본군이 유리했던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전함의 투입을 주저하고 그나마도 축차투입 함으로서 패배를 자초했다. 반면, 미 해군은 수리중이던 엔터프라이즈도 투입할 정도로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과감하게 밀어 넣었고, 이 결과 승리를 거머쥐었다.
헨더슨 비행장은 미군의 불침 항모로서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엔터프라이즈가 투입되긴 했지만 이전 전투의 피해를 계속 복구하고 있어서 함재기 운용 효율이 뚝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은 헨더슨 비행장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해야 했다. 만일, 헨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절름발이 신세인 엔터프라이즈만 투입되었을 경우, 주간에 일본 함대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고, 일본군의 물자 수송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 해전의 경과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 수송함대를 박살낸 건 미군 항공기들이었다.
한편, 이 전투는 당시 일본 해군의 야간 포격전 전술에 취약점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군 야간 포격전 전술은 고도로 훈련한 견시로 상대를 발견하고 조명탄, 또는 상위 함정의 서치라이트 조사로 목표를 포착하여 휘하 함정들의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간에 서치라이트를 조사하면 상대방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미군의 경우 서치라이트 사용을 가급적 자제했으며, 서치라이트를 조사하는 함정은 하위 함급인 구축함이었다. 하지만, 본 해전 당시 일본해군의 경우 함대내 최상위 함급의 함정이었던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휘하 함정의 목표 포착을 위해 서치라이트를 사용했다가 미군에게 자신의 위치를 폭로 당하고 미 함대로부터 집중공격을 당해 전투력을 잃고 격침 당했으며 더 나아가 함대 전체의 전투력 격감으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히에이의 경우 1차전 당시 기함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향력은 더욱 컸다.[10]
또한, 과도하게 수중탄의 개념에 집착한 일본 해군의 포격전 교리도 본 해전에서 일본군의 패인으로 꼽힌다.
본 해전에서 전사한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은 후일 나란히 키드급 구축함의 함명으로 이름이 붙었다.
캘러핸 제독의 기함이었던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는 일본군의 집중 포격으로 함교 인원이 거의 몰살당하고 선체도 대파되었으나 남은 장교들과 승조원들의 필사적인 보수작업으로 침몰을 면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과달카날 해전 한 번의 전투로 캘러핸 제독을 포함, 총 4명이 명예 훈장을 수훈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미군의 경우 고위 지휘관 2명을 한꺼번에 잃었지만, 일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차전의 함대 지휘관이었던 아베 제독은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본토로 소환되어 강제퇴역 당했고, 2차전의 지휘관이었던 곤도 제독은 이후 한직을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해전에서 대파당한 뒤 잔존 아군 함선과 함께 전선에서 이탈 중이던 경순양함 주노가 일본 잠수함의 뇌격에 침몰했는데 이때 주노에 같이 타고 있던 설리번 5형제가 모두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해 그 이후부터 미 해군에서는 형제들의 동일 함정 및 동일 부대 근무를 금지시켰다.[11]
5 관련 문서
The Battle of Guadalcanal- ↑ 짬밥도 있었지만 캘러헌 제독의 경우 불과 얼마 전만해도 곰리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터라 터너 제독으로선 함부로 지휘권을 내놓으라는 소리를 하기가 힘들었을 거란 추측도 있다.
- ↑ 포격도 아니고 플레처급 구축함 래피의 20mm 대공기관포 사격이 함교를 휩쓸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거리를 감안하면 대항해시대급의 근접 난전이 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졌다는 얘기.
- ↑ 물론 정찰에서 함종을 오인하는건 종종있는 일이기도(비스마르크급으로 오인받은 프린츠 오이겐등) 하고 미 해군의 전함(특히 사우스다코타)는
누구와는 다르게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건함 쿼터를 준수한 덕분에덩치가 작은편이라 오인히기가 쉽기는 하다. - ↑ 전자장비를 정비하던 고참병이 안전수칙을 무시해서(...) 이후 과부하가 걸리자 전원이 나가버렸다.
- ↑ 곤도 제독의 명령으로 3식탄을 먼저 장전했지만 승조원들이 돌발상황을 예견하여 포탄 승강기에 3식탄과 91식 철갑탄을 반반 섞어 놓았다.
- ↑ 레이더 장착 위치의 문제로 인해서 우측 후방의 80도 정도가 포착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하필이면 사우스다코타가 거기에 있었고, 때마침 사우스다코타의 전기계통이 나간 바람에 교신도 안됐다. 따라서 사우스다코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 조준하고 있는 전함이 사우스다코타일 가능성을 배재하지 못해 쏘지 못하고 있었다.
- ↑ 어지간한 전탐병이나 레이더 제조사의 엔지니어는 명함도 못 내미는 기술자 수준이었다고 한다.
- ↑ 그가 승좌한 워싱턴의 경우 주포탑 배치 인원들 이외에도 다른 특기의 승조원들도 주포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또한 16인치 주포탄의 장전 속도는 교범상 30초당 1발이었지만 워싱턴의 승조원들은 무려 14초로 끊었다고 한다.
- ↑ 미군이 확실하게 야간전의 우위까지 점하는 것은 알레이 버크 제독(당시 중령)의 새로운 야간전술이 빛을 발하는 1943년이나 되어야 했다. 그나마도 전함 등 주력함들의 야간전술이 아니라 구축함들의 야간전술이었고, 전함이 야간전의 주력이 되는 경우는 이 이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 ↑ 일본이 이런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레이더의 성능이 형편없었고 전함등이 서치라이트를 조사해서 탱킹을 하는 동안 다른 함정들이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 전함의 화력은 순양전함정도로 견딜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레이더가 형편없는 이유가 레이더를 켜면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게 된다고 생각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래놓고 서치라이트는 잘만 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 ↑ 엄밀히 말하자면 이전에도 금지사항이기는 했으나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고 설리번 5형제가 사망하면서 확실히 지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