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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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平
(? ~ 219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관우의 장남.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자는 탄지(坦之).

주창처럼 아버지 잘 만나서 수호신으로까지 떠받들어진다. 아버지 덕에 나발 부는 격.

2 정사

정사에서는 양자라는 언급이 없으니 사실상 친아들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관평은 정사에서 딱 3번 등장한다.

관우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에 따르면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관우는 10여 명의 기병과 함께 맥성에서 도주한다. 반장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관우전에 따르면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임저에서 참수했다.

관우와 함께 행동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어느정도 되고 전장에 나설 정도의 나이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사에서 장자라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관흥이 관우 사후 관우의 작위를 계승한 이후로 약관의 나이에 시중에 되었으니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관평이 관흥보다 나이가 많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은 조운의 딸 조씨와 결혼했고 213년에 아들 관월을 낳았다. 방회가 촉에 살고 있던 관우의 후손들을 죄다 죽였으나 관평의 후손들은 강릉에서 가문을 이어왔다고 한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 뜬금없이 관우의 양자로 등장한다. 삼국지연의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도 양자로 설정된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양자란 설정을 넣은 데는 마찬가지로 같은 양자인 유봉과 대립시켜 관평의 충의를 더욱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란 말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천리행 당시 관우가 유비와 함께 하북을 지나다가 어느 집에선가 하루 묵게 되었다. 공교로운 점은 일행을 묵게 해준 이 집의 주인장 관정도 관우와 같은 관(關)씨였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장남 관녕은 학문을 수양하는 젊은이였고 차남 관평은 무예를 수양하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우는 이 중에 차남 평을 마음에 들어 부자의 연을 맺고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후 유봉과 짝을 이뤄 활약한다. 유비가 서천을 공략하자 유봉과 함께 종군했으나, 방통이 전사해 관우와 더불어 형주를 수비하고 있던 제갈량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나서면서 운명이 바뀐다. 번성 공방전에서는 관우도 인정한 방덕을 상대로 맞짱을 까고도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관흥은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승리를 거두고 유비에게 승전고를 전하는 사자로 파견되면서 목숨을 건졌지만 관평은 관우와 남아 있다가 결국 둘 다 목숨을 잃게 된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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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에선 잠깐 나오는 인물이 연의와 아버지 덕에 제대로 출세했다. 아버지가 신격화되자 덩달아 알충왕(謁忠王)이라는 이름으로 신격화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영후태자(靈侯太子), 관평제군(關平帝君)으로 불리며 군신의 황태자가 되었다. 관제묘에서 주창과 함께 아버지의 좌우를 시위한다.

5 미디어 믹스

6 관련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