錦城大君
(1426 ~ 1457)
이름은 유(瑜)이며 세종 때는 화포발사시험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참가한 기록도 있다.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당한 방석의 양자가 되어 그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모반혐의를 받아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광주로 이배되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의 아들 중에서는 단종과 가장 가까운 관계로 추측한다. 세종과 세자 문종이 온천행이나 강무 등으로 함께 궁궐을 비울 때 세손 단종을 금성대군의 집에서 지내도록 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사육신이 단종을 복위하려던 운동이 실패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순흥부(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안치되었고 거기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했다. 사육신과는 달리 금성대군의 시도는 실록에 그 전말이 확실하지 않아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 당시에는 상당히 큰 고을이었던 순흥의 부사와 연결을 맺었다는 점, 무사(武士)를 모았다는 기록, 사민(士民)들이 동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를 가진 봉기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있을듯 하다.
하지만 결국 정보가 누설되어 풍기군수의 고변으로 사사되었으며 세조실록에서는 이보흠이 고변했다고 나오지만 금성대군 사건 전후의 기록은 흐름이 앞 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고, 이보흠도 유배당했다가 사망한다. 사실 이보흠 역시 문종과 가까운 인물이며, 금성대군이 유배된 순흥은 단종이 있는 영월과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 이 모든 것이 한명회가 금성대군을 제거하려고 짜놓은 계략이 아닌가 추측된다. 원래 사약을 받을 때 죽기 전에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는데 금성대군은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고 하며 한양 쪽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결국 순흥부가 해체된 사건을 정축지변이라고 부르며 자세한 사항은 피끝마을 참조.
사후에 후손들은 관노로 전락했으나 안평대군의 자손들과는 다르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후 복권되어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지금도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사사 후 금성대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그의 묘는 없으며, 대신 그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제단을 만들어 그와 이보흠 등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를 금성단이라고 한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으며 영주시에서 매년 제사를 지낸다. 이와는 별개로 금성대군파 문중에서 금성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데, 충북 진천군 초평면에 위치해 있으며 전주 이씨 문중에서 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