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끝마을

피끝 마을
땅끝 마을과는 관련이 없다.

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의 다른 이름. 조선 시대의 슬픈 역사 중 하나인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이 있다. 이 사건으로 순흥안씨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평민으로 추락했으며 대부분의 순흥 안씨들이 순흥을 떠나 전국각지[1]로 흩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마을 이름은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 멈춰 "끝"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2 발단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축출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동복동생인 금성대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의 왕위찬탈을 반대하여 눈 밖에 난 금성대군은 계속하여 유배지를 옮겨다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순흥 도호부(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로 보내진다.

그러나 의지의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입을 맞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시녀 김련과 관노가 격문을 빼내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 버렸다. 당시 풍기(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감이던 김효급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다.[2] 이때가 세조 3년이던 1456년.

이에 안동부사 한명진(세조의 최측근인 한명회의 6촌)이 독단적으로 군세를 이끌고 와서 순흥 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군이 출동하여 2차 학살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당시 도호부였던 순흥은 황폐화 되었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정축지변)

이때 순흥 청다리 아래 목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나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이며 때문에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3] 당시 순흥에 본적을 두고 있던 순흥 안씨는 이 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3 뒷 이야기

순흥은 역모의 땅이라 하여 온갖 차별을 받게 되었다. 당시 도호부였을 만큼 컸던 순흥은 이 사건을 계기로 폐부가 되었으며 넓은 땅덩어리는 각각 영천(榮川), 풍기, 봉화로 갈갈이 찢겨져 통합됐다. 만약 순흥이 정축지변의 참화없이 계속 발전하였다면, 영주시(→순흥시)의 중심부는 현 시가지가 아니라 순흥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약 90여년 후 순흥에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정축지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대자 이들을 달래기 위해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이라 새겼다는 경자바위가 현재까지도 전해진다.정축지변과 경자바위

금성대군 역시 이때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왕실 족보라 할 수 있는 종적에서 지워지기까지 했다. 이때 연루된 자들은 영조 1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복권된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영조 18년 금성대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한 금성단이 순흥에 세워진다.[4]

간혹 지역 주민들이 어린 아이들을 놀릴 때 순흥의 청다리[5]에서 주워왔다고 농담을 하는데 흔히 전해지는 것처럼 방탕한 유생들의 사생아들을 이 다리에 버려 키운 것이 아니라, 정축지변 당시 고아가 된 어린 아이들이 이곳에 버려졌다가 키워진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마을은 영주시의 주요 관광지인 부석사나 소수서원(선비촌)으로 향하다 보면 길가에 세워둔 큰 비석 덕분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1. 주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등지
  2. 여기에는 다른 속사정이 존재하는데 사실은 김효급이 관노가 빼돌린 격문을 뒤쫓아가 가로채서 공을 세웠다고 한다.
  3. 원래 동촌리는 원래 순흥부 대평면 우음리(구도리)였으나, 순흥의 폐부와 함께 풍기군 동촌면으로 개편된 후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정면 동촌리로 변경되었다.
  4. 금성단 근처에는 정축지변 당시 스스로 말라죽은 후 200년 뒤 되살아나 충신수라 불리는 압각수가 있다. 이 나무가 되살아나고 불과 1년 후 순흥 도호부가 재설치되었기에 압각수는 현재까지도 영물로 전해진다. 압각수
  5. 원래 이름은 제월교로, 퇴계 이황이 이름 붙인 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