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육신
死六臣(죽음으로서 충의를 지킨 여섯명의 신하)
1.1 개요
그들의 사상적 선배와 더불어 후세 역사에 충신의 대명사로서 남은 이들
"우리는 (상왕) 전하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외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순사한 조선 전기의 여섯 명의 충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다. 이들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했고, 명 사신의 환송연 때 거사하기로 했으나 계획이 좌절되어서 김질 등의 밀고로 잡혀 고문을 받은 끝에 죽었다.
덧붙여서 사육신처럼 세조를 몰아내려고 하진 않았으나, 평생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들로 생육신이 있다. 사육신에는 김문기가 포함되기도 하여 논란이 있다.
1.2 사육신은 누구인가?
이들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에게서 나이가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복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여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원래는 생육신 중 한사람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六臣轉)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처형당한 70여 명이다. 일가까지 포함하면 수백명 중에서 주요 인물 6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본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정조 때인 1791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선정한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 아래와 같은 인물을 수록하였다.
- 사육신 :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육종영 : 6명의 종친. 즉, 세조의 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과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화대군의 손자로 계유정난 당시 피살당한 판중추원사 이양 등을 가리킨다.
- 사의척 : 4명의 의로운 외척. 단종의 장인인 여량부원군 송현수, 현덕왕후의 남동생으로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경혜공주의 남편으로 단종의 매부인 영양위 정종, 단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아버지 권완(권자신과 같은 안동 권씨)을 가리킨다.[3]
- 삼대신(삼상신) : 세 명의 재상. 계유정난 때 제거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 양운검 : 복위계획 당시 세조의 좌우에서 운검을 맡을 예정이었던 성승, 박쟁(사실 유응부도 포함되므로 사실은 삼운검이 맞다).
삼중신이란 말이 근거가 없다면서 김문기가 정조 실록 15년 2월 21자 병인일 기사#에 송현수, 권자신과 같은 외척과 함께 거론되고 특히 함께 거론되는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은 계유정난 때 사망했으며, 정조실록의 해당 기사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삼상신에 드는 황보인과 김종서도 계유정난에 죽었으며 장릉배식록에는 나온다.
1.3 단종 복위운동과 그 실패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 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4] 소설 육신전에는 한명회가 이를 막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세조가 친히 운검을 취소시켰고, 성삼문이 이에 없앨 수 없다고 반대하나 신숙주가 찬성하여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 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일단 문초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되었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5] 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 박득년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 연루 사실[6]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망한 인물로 허조[7]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되었는 이유로 머릿수가 늘어나서 결국 70여 명이 된다.
실록에는 국문 때의 기록을 보면, 그저 심문과 답변 위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육신전에는 국문장에서 사육신이 세조를 디스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애초에 배경이 되는 기록이 남효온의 전기소설 육신전이므로 실제 사실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전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내용에는 전혀 없다. 그나마도 왕이 직접 국문한건 첫 국문 정도로 이후로는 구치관이 국문한다.
실록은 기록 자체가 짧고 별게 없다. 기사 자체가 두어편 있는데다가, 사육신의 반항이 묵비권 정도에 그치는지라 의외로 순순히 다 부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나마도 곤장을 치게 하면 다 분다. 거꾸로 말하면 그닥 불 것도 없었기도 했다.
아래는 신문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현대의 사육신의 이미지는 아래 소설 속 이미지가 거의 전부 다이다. 역사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거의 없어서 소설속 등장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실질적으로 대체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1.4 심문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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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성삼문
- 조선왕조실록 : 처음엔 숨기려고 하다가 세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며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변방으로 보내놓고? 참 후하다고 생각하겠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라고 묻자 가담자들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한다. 세조가 한번 더 윽박지르자, 박쟁을 추가한다.
- 육신전 :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불로 입을 지져버려도,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다. 세조가 "네놈이 나를 나리라고 부르는데 그럼 내가 준 녹(봉록)은 왜 쳐먹었냐?"며 묻자 성삼문은 "우리 집 창고에 가 보면 나리가 준 녹 따위, 하나도 안 썼으니까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보시오."라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패기있게 말했는데 확인을 해 보니 정말로 녹이 그대로 있었다.
1.4.2 박팽년
- 조선왕조실록 : 곤장을 치자 아버지를 포함해 가장 많은 인원을 말한다. 더 대지 않냐고 하니 아버지까지 대었는데 더 댈게 있느냐면서 운검을 통해 거사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다 고백한다.
- 육신전 : 친국 중에 세조가 "너 전번에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나에게 올리는 공문에 분명히 '신(臣)'이라고 써 놓고 이제 와서 반역질이냐? 게다가 너도 내가 주는 녹을 쳐먹었잖아?"고 화를 냈다. 그러자 박팽년 왈, "신(臣)이라고 쓴 적 없으니까 잘 찾아봐라. 그리고 나도 우리 집 창고에 보면 녹 하나도 안 먹고 다 쌓아놨다. 네 녀석은 어찌 하는 말이 뭐 하나도 제대로 맞는게 없는가?" 세조는 분개하여 그의 공문을 찾아봤는데 신(臣)자가 아니라 거(巨)자였다. 성삼문과 같이 창고에 녹이 쌓여있던건 덤. 그리고 세조는 이런 박팽년을 시뻘겋게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져버렸다.
1.4.3 이개
- 조선왕조실록 : 이개는 세조의 옛 친구였기에 실록에서 세조가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불지 않았으며, 이후 박팽년이 모든 것을 말하자 이개에게 곤장을 치니 박팽년이 분 말과 같은 말을 했다.
- 육신전 : 국문 중에 자신의 몸을 인두로 지지자 세조에게 "나리, 법전 어디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이 있소?"[8]라고 되묻는다. 이 항목은 다른 멤버들의 노골적인 디스에 비하면 별거 아닌 발언 같지만 이 짧은 한마디는 사육신의 성격과 특성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자신의 몸이 고문당하는 중에도 법전을 찾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원칙과 명분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질문에 세조는 어버버거리면서 대답을 못 했다. 그 당시 조선 법에는 인두로 사람 지지는 법이 진짜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개는 왕이라는 자가 법에도 없는 짓을 한다고 세조를 돌려 깐 셈. 더군다나 세조 스스로가 조선조 법제의 완비를 의미하는 법전 "경국대전" 제작을 시작했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1.4.4 하위지
- 조선왕조실록 : 실록에서도 승정원에 가서야 성변(혜성)을 알게 되었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초는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사실 실록에서도 하위지는 세조를 유난히 경계하여 세조를 견제하는 발언을 많이 했으며, 세조가 6조직계제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할 때 이를 물러서지 않고 간언하다가 빡친 세조가 "저 새퀴 관을 당장 벗겨버려!"라고 명하는 바람에 상투 머리채가 잡혀 끌려나가는 수모와 굴욕을 당하며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 세조 역시 예전부터 자신을 노골적으로 견제했던 것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던 모양. 야사나 정사나 시종일관 시크하면서도 가장 당당했던 인물이다.
- 육신전 : 국문을 가하면서 관련 사항들을 세조가 취조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반역죄라면 그 죄가 응당 죽음일 것인데 네 놈이 물어볼것이 뭐가 있다고 묻는 것이냐!"라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씹었다고 한다.
1.4.5 유응부
- 조선왕조실록 : 등장하지 않는다.
- 육신전 : 시종 국문장에서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던 성삼문을 디스했다. "자고로 서생 놈들과는 대사를 같이 하지 말라더니 정말 그렇더군. 너희들이 말려서 이렇게 됐잖아! 책만 읽으면 뭐해? 꾀가 없으니 짐승하고 다를 바 없어!"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여기서 성삼문 등이 말린 것을 다른 야사에서 자세하게 다루는데, 별운검이 한명회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유응부는 성삼문에게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한명회부터 죽이고 들어가자고 말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이 이를 말렸다.[9] 유응부 입장에서는 칼질도 못해보고 잡히니 속이 터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성삼문이 그 때만 입을 다물어서 자신의 미안함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세조에 대한 태도도 당당해서 아예 세조를 나리도 아니고
조까'족하(足下)'라고 불렀다. 참고로 족하는 서로 대등한 사이의 호칭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왕의 옷을 입고 왕 행세를 하고 있지만 당신은 왕이 아닐 뿐더러 조카의 왕위를 훔쳐 인륜도 저버렸으니 왕족도 아니라는 것. 아예 어떤 책에서는 당당하게 세조에게 자네와 자네 아들놈을 죽이려고 했건만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됐구나! 라고 말하였다...능지처참을 100번 당할 기세...이에 열이 단단히 뻗친 세조는 유응부의 살갗을 모조리 벗겨버리고 말았다.
1.5 사형과 후일담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박중림·성승·유응부·박쟁·권자신·윤영손·송석동·이휘·석을중·아기지[10]·불덕[11]은 작형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을 당하였다. 박팽년은 고문중에 사망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 사당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또한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12]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묘의 시초가 된다.
또한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개박살나서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 이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은 외부에 보수라고 하여 보증인이 신분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방면하였다가 나이가 되면 위리안치하게 하였다. 나중에 연결된 이들의 친자로 15세 미만의 경우도 보수하였다가 관노가 되게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고, 그들의 전지의 상당수 역시 대신들에게 넘어간다. 이외에도 이미 결혼한 부녀의 경우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이미 시집가 있던 딸들은 화를 면했다.[13][14] 직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 뿐으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산, 하위지는 살아 남은 조카 중 한 명인 하원이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직계를 제외한 친족들은 10여 년을 노비로 살아가다가 세조가 승하하기 이틀 전에야 사면을 받아 원래 신분을 회복했다.[15]
특히 박일산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로 천운으로 이것에 대한 이야기로 그야말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위지의 가문은 미성년자였던 조카 하분, 하포, 하원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고 대신 변방으로 유배가게 되었다.[16] 성삼문의 경우를 보면 아들들은 물론 조카들과 종손들까지 모두 처형당해 직계가 단절되었으니 그나마 나은 경우다.[17]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청의 기생, 관비로 분배되었다. 공신의 한사람인 권람은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분배받는 식으로 일부 친족에게 정속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신가에 종과 노리개로 분배되었다. 사육신은 절개를 지키다 죽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대부분 공신들에게 겁탈당했거나, 공신의 첩이 되거나 아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절개를 지키지 않고 공신의 첩이 된 여성들을 비판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아내와 딸 중 공신들의 성노리개로 겁탈당한 여성들의 기록은 실리지 않았다.
그 중 박팽년의 형수로 봉석주의 첩이 된 윤씨는 윤연령의 딸이며, 후일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가 된다. 윤씨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의 존재가 언급된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여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봉석주의 첩이 되기를 자처한 것 등만 문제시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6 육신사(六臣祠)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구 묘리 640)에 있는 사당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초기에는 박팽년 후손에 의해 박팽년만 배향되었으나, 그의 현손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사육신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육신사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하여 오다가 1691년 낙빈서원[18]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낙빈서원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
사우건물인 숭정사에는 사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숭절당, 외삼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1979년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한 육각기념비가 있다.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용산역이나 문양역에서 성서2번을 타면 갈 수 있다. 하루 13회 운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편수는 많지만 성서2번이 모두 육신사를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면 LED에 하빈육신사 방면라고 적혀 있거나 행선판에 묘리 or 묘골 or 육신사라고 적혀 있는 것을 잘 보고 타야 된다. 아니면 성서2번 항목에 있는 시간표를 참조하고 가는 것도 좋다.
낙빈서원의 경우 달성삼가헌[19] 뒷편에 있는데 마을 입구에 버스가 있긴 있지만 하루에 9번 다니며 왜관북부정류장~문양역 구간을 운행하는 칠곡 20번 버스가 전부이며 그나마 환승도 안 되는 버스다. 차라리 성서2번을 타고 묘1리 정거장에서 내려 1.5km 정도 걷는게 낫다. 아니면 애초에 자가용을 이용하는게 가장 현실적이다.
1.7 평가와 논란
1.7.1 역사성 논란
많은 이들이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 인물인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많지도 않고 연구도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설 육신전의 영향이다. 그런데 이 육신전 문제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 굉장히 복합적을 진행되었다. 사림의 일파인 김종직, 김굉필, 남효온 등으로 이어지는 학파적 정당성 문제[20], 왕권과 신권의 대립관계[21], 성리학적 명분론과 정통성의 문제[22], 관련된 인사들이 소속된 가문의 지위 문제[23] 등이 무척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육신전은 성리학적 명분론 관점에서 긍정되어서 조선후기를 풍미하였고 이 이데올로기는 민간까지 퍼져서 특정인물이 지은 소설이 야사처럼 전해지면서 이미지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볼 때는 굉장히 조심해서 봐야 한다. 배경이 소설이고 이게 이미지화 된 경우에는 이들에 대한 미화를 걷어내는 작업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실제 생애는 '당에서 인정받은 천재가 국가적 한계에 의해서 좌절하게 되는' 최고운전의 이미지와 다르다. 소설 임경업전 속의 조선 후기 최대의 명장은 역사인물 임경업과는 유사성이 그리 크지 않다. 임진록에 등장하는 소설속 인물 사명당이 실제 조선승려 유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신전과 비슷한 시대를 그린 고전소설 운영전에서 묘사된 안평대군은 역사적 인물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육신전 속 안평대군과도 다르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육신전 속 사육신은 어떨까? 고민할 대목이다.
단적으로 학계에서 계유정난을 연구하는 이들의 연구속에서 사육신의 상당수는 계유정난에 협조, 동조, 적어도 방관 했던 인물들로 평가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24] 문제는 문중의 영향력을 우습게 볼 수 없는 한국 특성상 이런 평가들이 양지로 나와 대중들의 인식으로 자리잡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 아래의 사칠신 논쟁에서 엿볼수 있듯이 조상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문중의 호전성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다.[25]
여담으로 하나 더 언급하자면, 사육신들이 죽기 전에 썼다는 일종의 절명시들이 구전되는데, 일단 죽기전에 시나 읊고 있을만큼 여유로웠던 상황이 아닌만큼[26] 절명시가 아니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시의 저자가 해당인물인지도 의심을 받고 있다. 죽음과 연관이 조금 적은 시들로 저자가 시에 조예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나마 연결고리를 찾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후대에 저자 불명인 시들을 해당 인물과 엮은 결과물일 뿐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1.7.2 조선 전기의 미복권
사육신은 단종과 마찬가지로 사육신의 난 이래 수백년간 신원이 되지 못하고 역적으로 여겨졌다.
남효온의 육신전은 위에 언급된 심문과정 등이 모두 실려 있어서 사육신의 행장에 연결될 정도이나, 생육신으로 1454년생인 남효온은 성삼문이 죽은 1456년에는 겨우 3살이었으니 이를 직접 봤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전기문학으로 분류된다.
당연히 이런 책은 임금이 유학자들과 토론하는 경연에서 강의가 될 수가 없다. 헌데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연관 판서 박계현이[27] 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선조에게 남효온의 육신전을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문제는 애초에 경연은 책 구절 하나 하나를 국왕과 경연관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이지 책 추천하는 자리가 아니다. 아무튼 선조는 책의 이름이 나왔으니 호기심을 느꼈는지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그 반응은 매우 격렬했다. 성삼문 등의 행적이 말도 안 된다고 깠다. # 주 내용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된 것이 말이 안되면 그 때 바로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거나 자결을 하거나 했어야지 세조를 국왕으로 두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말도 안된다는 논리였다.[28] 선조는 이런 논리로 책을 찾아서 모조리 불사르고 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까지 치죄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선조 자신은 노산군(단종) 묘에 망주석과 상석,표석 등을 세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무조건 세조만을 옹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육신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삼공이 들어서서 반대하는데, 이 때 논리가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에 차이가 있다. 자세한 건 육신전 항목 참조.
1.7.3 사육신의 신원
효종대에 노론의 핵심인사인 송준길이나 은퇴하는 판사 조경 등이 사육신의 충성을 기리려 했다. 효종은 이에 대해서 대신들과 의논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긴 하였으나 결국 실제로 배향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추증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현종의 적자로 세자가 되어 순탄하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면에서는 탄탄하며 무엇보다 기반이 약한 후계자(경종)를 둔 숙종에겐 어리고 힘없는 단종의 충신으로 이미 여론이 조성된 사육신이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였다.[29] 1691년 숙종 주도로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사육신묘 아래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숙종조가 되면 육신전이 사실상 정식 사서처럼 다뤄진다.) 김문기의 문중인 김녕 김씨는 이들보다 40년 뒤인 1731년에 복관되었다.
숙종 이전까지 노산군으로 불리던 단종도 노산대군을 거쳐 단종을 신원되고 묘가 정비되었다.
1.7.4 또 하나의 충신, 박심문(朴審問)
1804년, 순조대에 사육신이 사형당한 당시 질정관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박심문이 본래 사육신과 동지로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귀국 당시 사육신이 이미 사망한 사실을 알고 음독자살한 사실이 새로이 발견되어, '가선대부이조참판'을 추서하고 1828년에는 영월 창절사(현 창절서원)에 사육신과 함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이후에도 철종 때인 1856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871년 고종이 '충정' 시호를 내리는 등 조선 시대에는 사육신의 동지로 인정받았지만 어쩐지 현대에 들어서서 인지도는 없다(후손 중에 권력자도 없고 드라마도 없어서 그런가…). 현재 공주 숙모전, 진안 이산묘, 대전 숭절사, 진주 충정사, 해남 죽음사(竹陰祠), 장흥 세덕사, 영주 영모정 등에 배향되어 있다.
1.7.5 김문기의 포함 여부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관련 문중의 탄원으로 제기되어, 이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결국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조판서이자 삼군도진무 김문기가 새롭게 헌창되었다.
이에 대하여 사육신묘를 관리하는 서울시와 그리고 교육부, 문화공보부, 관련 학계가 심도있게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을 참조하여, '기존의 사육신을 변경하지 않고, 김문기 선생을 헌창'하고, 사육신묘에도 김문기의 자리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의 사칠신
문제가 된 것은 이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으려고 시도한 사람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 김문기의 후손인 김재규는 자신의 선조를 높이려는 생각에 학계에 압력을 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웃긴 것은 김녕 김씨 문중에서조차 구한말인 19세기 말까지 조상 어르신인 김문기를 그저 사육신에 연좌되어 화를 입은 이들 중 한 사람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인식은 김문기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가 터에 세워진 서원 경내 추모비의 내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략) "공의 이름은 문기(文起)이고 김녕(金寧) 사람으로, 백촌은 호이다. 선덕(宣德) 병오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문과에 급제하여 세 왕을 모셨다. 관직은 판서까지 올랐다. 세조 병자년 사육신과 연루되어 사형을 받은 사람이 30여 명이었는데 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들 현석도 같은 날 목숨을 잃었다." (후략) - 김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소재 백촌김선생원허비(白村金先生院墟碑) 중 |
정조실록에서 보듯 권자신, 송현수 등과 함께 김문기가 있었으므로 단종 복위 운동에 대한 공로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육신의 인지도가 워낙 높은 탓에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문기의 경우 조선 정부에서도 인정할 만큼 사료 자체는 충분히 뒷받침되니,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니지만 사육신 항목에 들어가기에는 논란이 있다. 그래서 헌창이라는 방식으로 추가한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벌어졌는데, 사단법인 한국학 연구회가 아래의 합작드라마 사육신(드라마)의 상영회에서 김문기가 군 동원을 맡았고, 또 문초에 불복했음을 집어넣지 않은 왜곡드라마라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아무튼 문중이 개입한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분명히 김문기가 사육신이 아닌 삼중신(三重臣)에 따로 있었는데도 사육신에 넣으라는 압력을 넣는 것은 문중이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2 남한과 북한의 합작 사극
KBS 2TV 수목 드라마 | ||||
경성스캔들 | → | 사육신 | → | 인순이는 예쁘다 |
사육신(문화어:사'륙'신).
2007년 8월 8일부터 동년 11월 1일까지 총 24부작으로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최초의 남북 합작 사극.
KBS의 자본과 장비 등의 하드웨어와 조선중앙방송의 배우, 극본 등의 소프트웨어로 제작된 작품. 제작 의도는 사육신의 충절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남한에서는 KBS 2TV에서 방영되었고 북한에선 조선중앙방송에서 방영되었다[30].
기획부터 3년, 이후 총 제작기간 2년에 제작비 20억여원(210만 달러)이 소요되었다. 제작비의 3분의 2 가량은 발전차나 조명차 등의 현물로 지급되었다. 즉위식 묘사 등을 위해 1만여 명이 동원됐으며, 전투장면에서는 300여필의 말이 등장했다. 북한으로서는 엄청난 스케일의 드라마인 셈이다.
제작사가 북한 측이며 연출, 각본, 배우 등의 제작자들이 전부 북측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껍데기만 남북합작이지 내용물은 실질적으로 북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발연기가 없다고 하여 훌륭한 평가를 받지만, 엑스트라 배우들의 연기는 그와는 반대로 극악을 달린다.(…) 북한 드라마라 그런지 화면이 KBS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매우 다르며, 특히 한국에서는 이미 10년도 더 전에 사라진 후시녹음을 했기 때문에 실제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질감이 꽤 컸다는 반응.
파일:Attachment/사육신/sayuksin1.jpg
세조를 시종일관 "수양"이란 이름으로 표현한 게 특징. 세조로 분한 최봉식 분이 뭔가 세조의 어진을 배낀 이미지와 잘 맞는다.
이런 때문에 시청률이 매우 부진하였다. 첫 화 시청률은 7.3%로 시작했지만 2화 시청률은 4.7%로 떨어졌다. 이후 시청률은 더 떨어져 애국가(3%)만도 못한 1.9%[31]를 기록하여 역대 최저 시청률 드라마 3위에 올랐다.[32][33]. #
오프닝.
참고로 방송 80주년 드라마다.
여하간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 KBS 연기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이게 북한 최초로 조선시대의 (림꺽정이나 민란 등을 다룬게 아닌) 정사를 다룬 TV 드라마이자 조선중앙TV가 만든 첫 사극이란 의미가 있다. # 제작비 문제로 유일한 사극이 될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아기씨" 등 그 전에는 북한 사극에서 나오지 않았던 남한 말투가 등장했다는 평가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선 극단적으로 재미없는 사극이 북한에선 컬쳐 쇼크가 되는 셈.
파일:Attachment/사육신/sayuksin2.jpg
이효리와 애니콜 광고를 찍기도 했던 무용수 조명애는 KBS의 요청으로 야사의 인물인 히로인 "솔매"로 캐스팅 되었다. # 첫 연기 캐스팅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뭐가 돌아오는건 아니라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
새터민들에게는 "저기 조맹원[34]이다. 저 배우는 정말 명배우야.”, “막봉[35]이도 나오더라, 여전히 막봉이 답다.”, “붉은 흙의 도위원장도 나왔어.[36]”, “배우들은 배급을 주는 모양이지, 전에 보다 얼굴이 보기 좋은 걸 보니.” 등의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3 온라인게임
홈페이지
본격 나으리가 최종보스인 게임
플레이어블 케릭터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깜놀닷컴이라는 곳에서 서비스 예정인 온라인 액션RPG게임. 12월 26일부터 클로즈 베타 테스트에 돌입한다.
2014년 2월 12일에 신규 서버 오픈 때문에 갑작스레 검색어 순위권에 올랐다.- ↑ 가장 유명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는 조선 후기에 씌여진 소설 속의 대사이다. 아래 참조.
- ↑ 실제라면, 애초에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의 찬탈로 상왕이 된 것이니 '상왕 전하'가 아닌 그냥 '전하'라고 불렀을 것이다. 단종을 '상왕'으로 부른다는 것은 결국 저 '나으리'를 '금상(지금의 임금)'으로 인정하는 꼴이니...
- ↑ 다만 송현수의 경우 역모가 일어난 직후에는 세조가 직접 불러 옛 친구였기에 깊게 의심하지 않았다며 위로하긴 했다. (음력 6월 13일 기사)
그래봐야 다음해 금성대군 때 죽이잖아다만 정치적인 죽음이었던 모양으로, 그뒤 아들 송거(琚)가 과거를 보려고 하자 대간의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이 특별히 허락하였고 조카인 송영(瑛)도 대간에 임명되는 등 그 일문에 대한 서용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 ↑ 실록에 따르면 이들의 계획이 세워진 시점에 혜성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 역시 이 문제를 성변(星變)이라고 표현한다. (남이의 옥에서도 혜성은 중요한 떡밥거리가 되는데 흥미롭다.)
- ↑ 이때 연계된 함경도 온성 절제사 유사지(유성원의 삼촌)와 그 아내는 연좌에서 빠져나온다. 양성지는 첫날부터 혐의에서 제외된 케이스.
- ↑ 그 날 아침, 상왕이 직접 긴 칼을 내려주었다라고 말한다. 이 사실이 성삼문의 입으로 언급되면서 1년 뒤 단종이 상왕의 지위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가게 되는 단초가 된다.
- ↑ 전 집현전 부수찬. 이개의 매부, 스스로 목을 멤.
- ↑ 문헌에 따라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이런 형벌을 안 쓴다고 하오." 라는 버전도 있다.
- ↑ 《추강집》, 《해동야언》
- ↑ 단종의 유모가 데리고 있던 하녀
- ↑ 권자신의 어머니가 데리고 있던 하녀
- ↑ 혹은 성삼문의 사위 박임경.
- ↑ 사실 이 정도에서 끝난 것도 다행일지도 모른다. 갑자사화때는 아예 1~8촌까지 싸그리 몰살당한 집안도 있다. 특히 친자식이나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심지어 시집가 있던 딸들의 집안까지 모조리. 더 무시무시한건 노비로 보내기에 쌀이 아깝다고 여자들까지 다 몰살해버렸다.
- ↑ 실제로 사육신의 경우에는 직계후손만 끊긴 경우가 있다면 이쪽은 직계를 제외한 친족들도 대가 끊겼다.
- ↑ 직계를 제외한다면 여기에 성삼문의 사촌들과 유성원의 조카 몇 명 정도가 더 살아남았지만 이들 중에서는 하위지 집안처럼 양자로 입적한 사람이 없었다.
- ↑ 하분은 일찍 죽어 화를 입지 않은 형 하강지, 하포, 하원은 동생 하기지의 아들이다. 하기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으므로 하포는 생부인 하기지의 대를 잇고 하원은 사형 직전에 하위지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로 지명되어 그의 친필 유언장을 받고 세조 말년에 방면되어 성인이 된 후 하위지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게 되었다. 앞서 언급된 유언장은 하씨 집안에서 대대로 보전하다가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조선 전기 고문서 대부분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 타버려 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귀중한 유물이기도 한 셈.
- ↑ 세조의 후궁이었던 근빈 박씨는 박팽년과의 누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근빈 박씨는 선산 박씨, 박팽년은 순천 박씨로 본관부터 다르다. 한국의 박씨들이 신라 왕가였던 경주 박씨를 공통의 대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두 본관은 전혀 접점이 없는 남남사이나 마찬가지다.
- ↑ 대구광역시 하빈면 묘동4길 21(구 묘리 산15)에 있으며 육신사 서남측에 있는데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산을 넘거나 달성삼가헌 쪽으로 돌아가야 된다.
-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15(구 묘리 800)에 있는 조선시대의 한옥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04호이다. 이 집은 현 소유자의 6대조 박광석(朴光錫)이 1747년(영조 23)에 건축한 것이다.
- ↑ 사림의 학맥의 큰 줄기중 하나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묘배향 18현에도 포함된 김굉필의 활동으로 실록에 실리면서 일어난 일이 무오사화였다. 조선왕실은 세조의 후손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사림들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의 정통성을 복원하면서도 세조의 후손이 왕으로 있는 조선왕실에 출사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 해야 한다는 모순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세조의 정통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하는 대신에 사육신의 충성심만 강조한다라는 편법이었다. 이는 정몽주와 같은 조선건국 반대파를 띄운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 ↑ 세조는 대표적인 왕권지상주의자였고, 대간들은 딱 그 반대였다. 때문에 세조 직계가 왕위를 계승해 나가고 명분상 중흥의 군주로 대우받음에도 유학자인 신하들 입장에선 마냥 긍정하긴 껄끄러운 군주였다. 당대에도 마찬가지라서 단종복위운동에 나선 인물들의 상당수는 세조 즉위 후 왕권주의 일변도로 나가 때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거나 정계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부류들이다.
- ↑ 사림 내부나 명분상으로는 대표적 간판이고 현재로서도 이 부분이 가장 강조되긴 하는데, 정작 조선시대에는 대놓고 언급하기도 뭐하고 진짜로 깊게 파고들수도 없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단종이 정통성이 있고, 세조는 없다"라고 하면 간편해보이지만, 모두가 아는바와 같이 조선의 왕실은 세조의 직계로 이어졌고 단종의 후대는 끊어졌다. 사림도 관직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어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나 그 제자인 김굉필만 해도 세조 당대나 예종 성종 시기에는 관직에 나서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없는 왕 밑에서 일하는 것이 되므로 완벽한 모순을 이룬다.
- ↑ 조선시대에는 유명인사의 몇대손도 그 조상의 이득을 봤고, 역적이나 반역자로 찍히면 그 가문은 몇 대가 지나가도 그로 인한 피해를 봤다. 주요관련자의 직손들이야 대부분 죽었다고 하지만 엮여있는 가문들이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 사실 동조 안 하면 "날 죽여라!"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박시백 등의 평가)
- ↑ 이는 당시 김종서의 비대해진 권력의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세조가 단종이 장성하면 권력을 내려 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리를 내쫓으려다 범을 끌어들인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 이다. 그리고 그 대가가 단종 폐위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공주의 남자에서 묘사되는데 단종이 쫓겨날 위기에 쳐하자, 사육신을 비롯한 신하들이 모여 김종서의 죽음을 묵인한 것에 사죄한다. 그리고 세조를 내쫓으려 하나 실패하고 죽는다.
- ↑ 박팽년의 경우는 애초에 정식으로 처형되기 전에 고문으로 죽었다.
- ↑ 이 사람 아버지는 중종 시기 영월 군수로 부임한후 단종의 넋을 위로하는 제를 지낸바 있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중종 연간에 이미 영월 지역에 단종에 대한 설화가 만들어져 있었고 사대부와 백성들 사이에 단종에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이건 성리학적 입장에서만 보면 틀린 논리가 아니다. 나으리니 신하 신 대신에 거 자를 썼느니 하면서 육신전에서 쉴드를 중점적으로 치고 있는 부분도 이 대목으로, 세조의 정통성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튀어나가야 한다.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뭔가를 해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원래 성리학의 명분론은 그렇게 융통성이 있는 체제가 아니다.
- ↑ 마찬가지로 세손-세자-왕 단계를 거친 아버지 현종은 사육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나, 왕권은 강했으나 기반 약한 후계자(순조)를 둔 점에서 숙종과 유사한 정조가 아예 배식단까지 만들어 단종과 연루되 죽은 사람들을 전부 복권시켜 준걸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 ↑ 물론, 동시 방영은 아니다. 관련 기사.
- ↑ TNS미디어코리아 집계.
- ↑ 같은 시간대에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가 바로 태왕사신기였다.
- ↑ 1위는 SBS의 주말 드라마 심야식당(1.4%), 허준과 경쟁했던 바보같은 사랑(1.8%)
- ↑ '석개울의 새봄'(90년대 초반작)에서 협동농장의 간첩 조맹원 역할을 맡았던 방석운(유응부 분)을 말한다.
- ↑ 림꺽정에 출연한 길막봉 역으로 출연한 최봉식(수양대군 역)을 말한다.
- ↑ 성삼문 역의 박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