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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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금성지구전투전적비.

1953년 6월과 1953년 7월에 한국군중공군금성 돌출부를 놓고 격전을 벌인 한국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

1 전투 전 상황

1953년 3월 휴전에 반대하며 전황을 지지부진 끌게 만들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회담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53년 4월 즈음 휴전은 미국중국 내부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직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만이 휴전은 불가하다면서 단독 북진을 외치는 상황이었다. 1953년 6월, 휴전협상은 종반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중국은 휴전이 맺어지기 전 마지막을 자신들의 승리로 끝내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2 6월 중공군의 대공세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전쟁 중 으레 그랬듯이 미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노렸고, 이런 결정에 따라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금성 돌출부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이 때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공격하는데 6개 사단을 동원했으며, 다시 후방에서 4개 사단을 증원시켰고 34개 대대 포병 390문의 야포와 말 1만필과 마차 1500대도 동원하는 등 1951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병력을 투입하였다.

물론 한국군도 이에 맞서 선전했으나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지 얼마 안돼 실전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인데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형편이라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을 내주고 저지선에서 후방 4km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은 11일에 하루에만 6만발을 기록하는 등 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유엔군과 미군의 전투기 출격횟수 또한 2143회를 기록함으로서 참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비록 전선 전체의 돌파에는 실패했으나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지키던 국군의 방어지역 일부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다.

3 묻혀버린 승리

중국은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연일 북진을 외치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세를 꺾고 전쟁에서 자신들이 우세하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하려 했으나 6월 18일에 터진 핵폭탄 같은 사건에 묻혀버렸는데 그게 바로 이승만 대통령반공포로 석방 사건.

자국의 포로가 '자유중국' 대만으로 가는 걸 용납할 수 없었고 또한 휴전 회담을 원점으로 되돌릴지도 모르는 이 사건에 중국은 큰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자신들이 힘들여 얻은 승리를 모조리 묻히게 만든 상황에 격분하기에 이른다. 또한 휴전 직전 한국군에게 최종적인 패배를 안기고 중동부 전선 전역을 다시 빼앗아 전쟁 이후의 대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필요성도 제기되었다.[1] 이에 따라 7월 중국은 금성 일대에 다시 공세를 재개하기로 결정한다.

4 7월 중공군의 공세와 국군의 반격

중국이 휴전 직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싶었듯이 한국 또한 마지막 전투를 패배로 기록해두고 싶지 않았기에 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953년 7월 중공군 5개 군(약 24만명)이 금성 돌출부로 모이기 시작하자 긴장한 한국군 또한 6개 사단을 동원해 방어에 나섰으며,[2] 휴전을 직전에 둔 시점에서 한국군과 중공군은 그 규모가 개전 이래 최대급이었다.

7월 13일부터 중공군은 한국군이 방어하는 전선에 대한 대규모 집중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의 이같은 공세로 미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국군의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재조정하여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7월 15일 국군 제2군단은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배치하고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군의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화천 저수지까지 노리며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저지했다. 더욱이 홍수로 인해 보급이 곤란해진 중공군에 비해 한국군은 미군의 막대한 보급물자를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으며, 새로 도착한 증원군들에 힘입어 병력을 보충하고 화력을 충원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폭우로 중공군이 재정비하는 사이 7월 16일부터 김종묵 소대장이 이끄는 특공대의 활약과 더불어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구성)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을 북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미 제8군의 공격목표인 아이슬랜드 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하였으나,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다. 중국군이 전선 전체를 돌파당할 경우 증원군을 투입하여 반격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휴전을 눈앞에 두고 대규모 전투를 지속하기를 원하지 않은 UN군의 제지로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한 채 전선 일대에서의 공방전만 이어가다가 종전을 맞게 되었다.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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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의 전선보다 4km 뒤로 밀려났으며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비롯한 고지를 잃었다. 1주일간 진행된 전투에서 한국군은 전사 및 실종자 수천 명을 포함하여 14,3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중공군은 66,000여 명[4]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다 끝난 전쟁 마지막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 지못미 이렇게 사상자가 많은 것은 양측 모두 많은 병력[5]을 투입했다는 점, 그리고 한국군이 중국군에 비해 자질 및 장비 면에서 그다지 나은 점이 없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후 한국군의 자질을 강화하고 무기 및 장비를 새로 지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정전 협정의 조인 휴전 2주만 남겨둔 상태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 협정을 연기시켰으며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금성 전역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한다. 실로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수천명의 귀환하지 못한 국군 포로를 낳게 되었다.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 이어졌지만 소규모 전투만을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을 맞게 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는 휴전 상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언제 전쟁이 재개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1. 당시 마오쩌둥은 한국을 휴전협정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한국군 1만 5천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 이때 해당 부대 사단장들을 도미 유학 등의 관계로 교체하려고 하던 시기여서, 이임하던 사단장을 다시 전선으로 불러 1개 사단의 사단장이 2~3명씩 존재하기도 했다.
  3. 지도상의 붉은 지역이 금성 돌출부 피탈지대.
  4.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32,000여 명이다.
  5. 한국군 18만 명, 중국군 24만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