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3년 6월 18일,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 출신의 반공포로를 석방한 사건.[1]
2 사건의 배경
1951년 이후 6.25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UN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의 휴전 논의가 이어졌으나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은 채 교전과 휴전 협상이 오랫동안 병행하게 되었다. 이 때 협상 내용 중 큰 문제점으로 떠오른 사항이 있었는데 바로 전쟁 포로의 송환 문제였다. 포로를 송환할 때 단순 국적에 따라 일괄적으로 본국에 보낼 것인지, 아니면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선택권을 줄 것인지를 두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6.25 전쟁이 사실상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충돌한 이념 전쟁이었고, 국가 간의 전쟁이면서도 동시에 내전의 성격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측의 주장이 대립하긴 하였지만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공산군 포로 중 공산주의 국가에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반공 포로'의 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는 점이다. 이게 문제가 된 건 남한에서 강제로 입대한 북한군이 상당히 많았고, 당장 공산화된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과 북한에서 내심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징집되어서 포로가 된 뒤 반공주의를 드러낸 사례도 적지 않았다. 당시 중국과 소련, 북한 등은 만약 포로 개개인에게 송환국의 선택권을 줄 경우 포로 중 공산주의를 버리고 남한 등 상대편으로 전향해 버릴 포로들이 대거 등장할 것을 우려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일괄적으로 포로를 송환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 UN군 측에서는 개개인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자유 송환을 주장하였다. UN군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미국, 영국 등은 자국 포로 중 공산주의 측으로 전향할 포로들의 수가 극히 적을 것이라고 자신하였고[2], 공산군 포로에게 선택권을 줌으로서 자본주의 진영으로 전향하는 인원을 늘림으로서 자신들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선전하고 공산주의 진영에게 정치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1953년 6월 지루한 협상 끝에 포로송환 문제가 일단락되었는데, 송환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1차로 자국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송환한 다음, 양측 대표단이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에게 방문해 자국 송환을 권유하게 하고[3], 그럼에도 송환을 거부할 경우 중립국에 이송한 다음 그곳에서 포로 개개인의 의사를 수용하도록 하였다.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며 모든 반공포로들은 일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로들이 공산 측의 위협에 노출되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이승만의 계산도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미국은 휴전 후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 여부에 대해 어느정도 약속은 있었으나 확약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휴전 협정에 참여하지 못한[4] 남한은 UN군의 휴전회담을 파기시킬 영향력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이승만은 UN군, 특히 그 대표국인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선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고 그 카드가 바로 반공 포로의 석방이었다.[5]
3 사건의 전개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헌병 사령부 주도로 한국 정부와 한국군에 의한 반공 포로의 석방이 강행되었다. 당시 작전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다른 부대와는 달리, 헌병 사령부는 한국 정부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포로 석방'이란 명칭 때문에 단순히 수용소 문을 열고 포로들을 풀어준 평화로운 한낮의 행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 형태는 전국 각지의 수용소에서 일어난 한밤중의 대탈주극이었다.
당시 공산군 포로의 수용 및 감시는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고 당연히 이들은 반공포로들을 얌전히 수용소에 가둬 둘 의무가 있었다. UN군과의 사전 동의가 없는 한국정부 측의 일방적인 석방 행위였으므로, 그 과정은 사전에 몰래 언질을 받은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한국군과 한국 경찰, 그리고 이에 협조하는 민간인들의 보호를 받아 도망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포로들은 국군과 경찰이 뚫은 전기 철조망을 통해 탈출한 뒤 민간인으로 위장해 전국에 골고루 분산되었다. 국군은 심지어 '미군을 무력으로 제압'한 후 포로들을 탈출시켰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는 말 안해도 다들 알 것이다. 이후에도 미8군 사령부는 미군 방송으로 반공포로들에게 돌아오라 하는데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전신)에선 외국기관(미군) 말 듣지 말라고 방송에서 말하는, 아군 방송끼리 싸우는 희귀한 장면이 연출됐다.
6월 18일부터 약 5일 동안 35,400명의 반공 포로 중 약 26,900여 명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탈출 도중 UN군의 사격으로 인해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당했다. 나머지 8,200여 명은 미처 석방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UN군의 진압 등으로 인해 수용소에 잔류하였다.
4 영향
이 석방 사건으로 인해 UN군 측, 특히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 정부 내에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과 한국 군부의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여 섣불리 제거하기는 힘들었고 이 행동이 단지 동맹국에 대한 이승만의 의지표출이라는 것과 이승만이 반미주의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서 제거 논의는 취소하였다. 이승만 암살 계획(에버 레디 플랜)을 통한 이승만의 대체자로 장면과 백선엽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미국은 이미 반공포로 석방 전에 한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약속했다. 하지만 미국 내부 정책은 한국에서 철수하는 쪽에 가까웠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고 쳐도 한국 정부가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6] 즉 이승만은 자기가 맘먹으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서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확실하게 지킬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결국 내부 정책을 바꿔 한국을 적극 지키는 쪽으로 선회했으니 도박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은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얻었다"라고 말했다. 훗날 자신의 8년의 대통령 재임기간 중 자다 일어난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고 썼다. 아이젠하워는 일본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동맹국이 한국에서 퇴군했을 것이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영국의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고 까지 말하며 극단적인 비판을 했으며 나아가 영국을 구하기 위해선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고까지 말한다.[7][8] 나아가 비밀리에 이승만을 즉각 구속하거나 대통령직에서 쫓아내야한다고 미국 정부에 요청까지 했다.[9] 미 국무장관 델레스는 "등에 칼을 꽂는 짓"이라고 비난 했고,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지옥문이 열렸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대재앙'이라고 비판했다.[10]
반공포로 석방 당시 탈주하지 못했거나, 남한 잔류(혹은 대만행)가 아닌 중립국행을 희망한 이들은 휴전과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후 비무장지대에 진주한 인도군[11]에 인계되어 공산군의 설득 작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설득이라는 게 말이 설득이지 온갖 강압과 협박으로 범벅이 된 거여서...[12] 이를 두려워 한 나머지 탈주를 시도하다 인도군에게 사살된 사람들도 있었다.[13]
이 사건으로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포로에 관련된 협약을 깨버렸기 때문에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하여 북측에 사로잡힌 국군 포로들을 송환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 사건 이전에도 북한은 상습적으로 국군 포로들을 강제전향시켜 북한군에 편입시키거나 고의적으로 통보 명단에서 누락시키거나 남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포로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범 케이스로 살해해 다른 포로들을 강제로 북한에 눌러앉히는 등의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한 영향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하여 휴전협정에 대한민국 대표로서 이승만은 완전히 배제되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으나 이 역시 그닥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유엔군, 특히 미국 측은 어떻게든 대한민국을 협약 참가 당사국으로 넣으려고 했지만 한국 측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이전부터 빠져 있었던 것이다. 즉, 이 사건 때문에 못 한 게 아니라 이전부터 억지 부리고 안 하고 있었던 거다.[14] 다만 휴전 직전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철저한 이행과 주한미군 주둔 등을 약속받고 이를 사후 추인하였다.[15] 북한과 중국은 이걸 갖고 한국은 당사자가 아니라고 우기기도 했지만, 다음해 이뤄진 제네바 회담에서 한국이 휴전 당사자로 참석하고 북한과 중국이 인정한 것만 봐도 이들의 주장이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공산군과 인도군의 회유에도 입장을 번복하지 않은 반공포로들은[16] 다시 UN군에 인계되어 1954년 1월에 공식적으로 석방되었고, 북한 출신들은 남한 각지에 정착하였다.국군에 다시 징병된 사람들도 많다 카더라 중공군 출신들은 대부분 대만으로 갔으며, 일부는 대만에도 가지 않고 남한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지조를 지키며 본토로 돌아간 중공군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전쟁에서 지고 온 반동이라며 비판을 받았다.
다만 이들 반공포로에 대한 전후 처우가 나중에 문제가 됐는데, 이들에게 충성심을 보장받겠다며 한국군 입대를 요구한 거야 그렇다 쳐도 이후에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반발을 샀던 것이다. 이는 송환된 한국군 포로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용초도에서 사상 검증이 이뤄졌고[17], 혐의를 벗은 귀환 포로들도 대부분 한직을 전전하는 등 불이익을 받아 2000년대 초에 사회 문제로 방송에서 다루기도 했다.
5 여담
여담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는 이런 석방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데, 거제도 수용소는 1952년 5월 포로 폭동 사건이 벌어진 뒤 반공포로들을 분산, 분리시켜서 다른 지역의 수용소로 이전시켰기 때문에 거제도 수용소에는 반공포로가 없었고, 따라서 석방 또한 없었다.
영국의 처칠이 면도 중에 이 소식을 듣고 얼굴이 베였다고 한다.- ↑ 남한 출신 반공포로들은 늦어도 1952년까지 모두 석방되었다.
- ↑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공산군 측에서 포로 감시를 맡은 중공군이 매우 교묘한 형태의 선전 활동을 벌였고, 여기에 설득되어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UN군 포로들이 소수 있었다.
- ↑ 이 과정은 최인훈의 소설인 '광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유명한 '중립국' 대사가 이것.
- ↑ 혹은 유엔 측의 일방적인 휴전 진행에 항의하여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UN군의 힘으로 전쟁을 유지하여 북한정권을 소멸 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통일도 못한채 죽음과 파괴만을 남길 것이고 이승만은 1953년 4월 9일 트루먼에게 휴전에 반대하는 정식 항의문도 보낸다. 한국군만이라도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 ↑ 허나, 미국의 지원 자체는 후술과 같이 이미 예정된 상태였다. 한미상호방호조약의 발표시기에 대한 문제와(미국은 휴전협정 이후 체결/발표할 예정이었고 이승만은 휴전협정 후 UN군이 철군하고서 미국이 약속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서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호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했다.) UN군에 의한 한국전쟁을 통한 북한정권의 소멸, 멸공통일의 목적도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 후 일주일 후에는 가인 김병로 등을 포함한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각료와 함께 6.25북진통일의 날 국민대회까지 열었다.
- ↑ 사실 국제관계에서 구두약속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일례로 미국의 헨리 키신저는 남베트남에게 유사시 즉각적인 군사지원을 구두로 약속하며 파리 평화회의에 서명하게 했지만, 남베트남의 멸망할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뭐, 미국내 반전분위기 때문에 한미상호방위조약 같은 걸 추진했어도 의회에서 통과될리 없긴 했지만.
- ↑ 영국의 경우 2차세계대전 이후 전후복구 사업이 한창 중이었고 미국에 대해 갚을 부채도 엄청났다. 없는 살림 쪼개서 6.25전쟁에 파병규모 2위로 참전한 것도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지원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것이었다.
- ↑ 사족으로 처칠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나는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악마에 대한 지지연설을 할 것이다."고 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우리의 편이야.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지."라고 말한 적 있다.
- ↑ 김창훈, 한국외교 어제와 오늘(다락원 2002) 60
- ↑ 이후 중국은 신문을 통해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승만의 독단적 결정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구를 삽입하여 UN과 휴전협상을 계속한다.
- ↑ 이승만 정부는 인도가 친공적이라 하여(후술하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애초에 이 당시 인도 대통령인 자와할랄 네루가 사상이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인도군의 영토 통과를 거부했고, 인도군은 별 수 없이 육로로 이동하지 못하고 미군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여러 차례로 나눠서 비무장지대로 들어가야 했다.
- ↑ 반공포로가 설득이랍시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늘어놓는 공산군 군관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촬영한 기록사진이 있을 정도다.
- ↑ 중립을 지켜야 할 인도군들이 반공포로들에게 북한행을 은근히 강요하고 심지어 위원장이라는 인간이 포로들에게 북한행을 권유한 데에다 반공포로를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강제 북송한 일까지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 ↑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은 해야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빠지게 된 거라는 주장은 정당한 비판의 동력까지 약화시키는 억지다. 사실상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이 아닌 북으로 계속 진격하자는 무력통일을 주장했으니...
- ↑ 정전협정 서명 대표는 국제연합군 사령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다. 유엔측은 유엔군 사령관 한 명이 한국을 비롯한 모든 참전국을 대표했고 공산측은 북한군 사령관과 중공군 사령관이 각기 북한과 중국을 대표했다.
- ↑ 물론 북의 위협에 인도의 강요에 반강제로 뜻을 굽히고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다. 소수지만...
- ↑ 이 과정에서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