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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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 일가가 탈북한 이후 대한민국에 입국하면서 찍은 사진. 가운데에 꽃다발 목걸이를 한 사람이 김만철 본인.

1 개요

김만철(金萬鐵)은 청진시 출신 새터민이다. 청진의과대학에서 의사로 근무중 모종의 사건으로[1] 위험에 처하게 된다. 김만철은 당 보위부원이 상부에 보고할 것을 우려하여 탈북을 결심했다.

2 탈북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에 김만철은 청진항에서 50t급 청진호를 몰래 탈취한뒤 일가족 11명을 태우고 동해 한복판까지 도주했다. 이후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일본의 야마모토 근처에서 표류하다가 1월 20일 일본 후쿠이 외항에 도착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통역으로 하필이면 조총련계 동포인 '마쓰야마'를 보냈다.

다음날인 1월 21일 일본 해상보안청은 김만철씨 일가가 승선한 청진호를 쓰루가항으로 예인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전세계 언론에 보도된다. 이때 마쓰야마는 한국 망명은 위험하다고 위협하였다.

1월 22일 김만철은 공식적으로 망명을 요구하였다. 조총련 본부 간부들이 찾아와서 "한국에 가면 모두 죽게 된다."라고 협박하였고, 이로 인해 김만철 일행은 망명지를 놓고 가족 간에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큰처남인 최정상(30)이 한국행을 주저하였다.

1월 23일 해상보안청은 단순표류로 규정해서 식량공급과 기관수리후 공해상으로 내보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로 기관수리 작업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시간을 끌기위한 발표였던거 같다.

1월 24일 북한 적십자사가 김만철 일가의 송환을 공식요구하였다. 기관고장으로 단순표류한 자국민들이란 주장이었다.

1월 28일 김창섭 나고야 총영사가 직접 선박에 탑승해서 김만철씨 일가를 만났다. 이때 김만철은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요구하면서 '따듯한 남쪽 나라에 가고 싶다.광장?'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런 와중에 물밑에서 김만철 일가를 둘러싸고 대한민국-북한-일본의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은 초기에는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김만철 일가도 처음부터 명확하게 대한민국 행을 요구하고 있진 않았다. 단지 이대로 있다간 북한에 끌려가서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할만한 짓거리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절대 북한만은 안된다는 일념으로 제3국 망명을 강력히 희망했다. 정작 김만철 일가 내에서도 행선지가 합의가 되지 않았다. 북쪽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처음 탈북때부터 김만철은 남한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쪽 대표단의 설득으로[2] 대한민국행을 결심하고, 이를 일가족에게 밀여붙였다.

여기에 조총련계는 쓰루가 해상보안청사에서 북송 촉구 시위를 전개하였다. 니들이나 가라! 정치범수용소

2월 3일,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와의 협상끝에 단기체류 형식으로 김만철 일가족이 중화민국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김만철과 그 가족들을 중화민국으로 추방(...)했다. 2월 7일 새벽에 김만철 일가족은 오키나와를 거쳐 중화민국에 도착했고[3] 다음날 오후 대한민국 정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작전을 통해 김만철과 그 일가족들을 김포공항에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기사

3 김만철은 말한다

서울 정착 직후 <김만철은 말한다>라는 수기집을 발간하였다. 다음은 책의 머리말이다.

아, 따뜻한 남쪽나라

1987년 1월 14일 밤, 40여 년에 걸친 북반부 생활에 절망을 느끼고 10명의 가족과 함께 청진항을 떠난 저는,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남쪽으로 항행하던 도중 뜻밖의 폭풍을 만나 일본 해안에 포착, 대만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의 25일 동안 수없이 많은 번민을 거듭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남조선은 병마의 소굴이고 거지가 득시글 거리는 생지옥이라고 들어온 저희들은 당초부터 남조선에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소개 책자와 비디오를 보고 영사관 선생님들의 친절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구석에는 어딘가 찜찜한 생각이 남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저의 젊은 처남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세뇌교육을 받았던지 대만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조선으로 가는 것을 반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아무리 남조선이 못 살더라도 북반부보다야 낫겠지’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남조선행을 결심한 저는 사실 무거운 마음으로 2월 8일 밤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쭈볏거리는 마음으로 첫나들이를 나선 이튿날, 저희들은 눈앞에 펼쳐져 가는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들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숲처럼 늘어서 있는 높은 빌딩, 쭉쭉 뻗은 도로와 자동차의 물결, 상점마다 쌓여 있는 화려한 상품들,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강변의 아파트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활달하고 밝은 표정, 그 눈부신 의상들, 공원에서 만난 시민들의 자유스럽고 단란한 모습, 서울타워(남산)에서 내려다 본 영웅적인 도시, 수도 서울의 장엄하고 위대한 광경 - 그 어느 것 하나 저희들에게는 신기하고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개월, 저희들은 날마다 놀라움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렇게도 완강히 남조선행을 반대했던 큰처남 정섭이는 마침내 이렇게 외치고 말았습니다.
“아, 따뜻한 남쪽나라! 매부, 여기가 바로 매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따뜻한 남쪽나라군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었습니다. 정섭이를 그토록 감동시킨 것은 결코 제가 아닙니다. 저희들을 따뜻하게 안아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국민 여러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책을 쓰시고 발간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가족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1987년 8월 14일
김 만 철

4 탈북 이후

김만철과 그의 일가족들은 탈복한 이후 대한민국에서 주는 정착금을 받고 그의 아들 김광규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고 홍익대학교 미대에 진학했다.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낮아서 입학할 수가 없었던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4] 여기까지는 김만철이 바라던 따뜻한 남쪽나라였다. 그러나 김만철은 북한에서 취득한 의사 자격이 인정되지 않아 남한에서 다른 직업을 구해야 했고, 그 가족들은 대한민국과 자본주의의 물정을 모르는 상태라 사기를 당하고 귀농했다. 그래도 자식들은 대부분 잘돼서 큰아들 김광규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다. 둘째아들 김명일은 의자공장에 다니고 있으며 셋째아들 김광호[5]서울대학교 천체물리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큰딸 김광옥은 화물차 운전기사와 결혼했으며 둘째딸 김광숙은 같은 탈북자 출신인 한용수와 결혼했다. 김만철 본인은 사기를 당해 쫄딱 망하고 이 때의 심적 고통을 잊기 위해 종교에 투신한 게 하필이면 영생교(...). 그래도 영생교 몰락 이후 빠져나와서 2010년부터 양계장을 운영하고 있다.

5 저서

  1. 이 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이때 서울을 찍은 온갖 사진과 필름을 보여주면서 설득했다고 한다.
  3. 이 순간까지도 김만철 일가족 중에서 남한행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애초 목적대로 따듯한 남쪽 나라 제3국으로 가자고...
  4. 북한에서 남한에서와는 달리 의사는 상당히 낮은 신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의사의대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5. 김광호 씨는 정착 이후 국민학생 시절 당시의 대한민국 아이들과의 일상 및 과거 북한에 있었을 때의 과정을 일기로 엮은 '광호의 일기'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