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학교 감독 | |
김병수 (金炳秀 / Kim Byoung-Soo) | |
생년월일 | 1970년 11월 24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강원도 홍천군 |
포지션 | 미드필더 |
유스팀 | 미동초등학교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 (1985~1987) 고려대학교 (1988~1992) |
소속팀 | 코스모 석유 FC (1993~1997) 오이타 트리니타 (1997) |
지도자 | 고려대학교 코치 (1998)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코치 (1998~2002) 포항 스틸러스 2군 코치 (2003) 영남대학교 감독 (2008~) |
국가대표 | 확인 불가[1] |
목차
1 개요
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끌어나갈 천재라 불렸으나, 결국 비운의 천재로 끝나고 말았고, 현재는 영남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고 있는 축구인.
2 선수 시절
강원도 홍천초등학교 재학 시절 축구화를 처음 신은 김병수는 축구를 잘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 미동초등학교로 스카우트되었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어영부영하다 스코어가 뒤집히기 일수였다.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선수'라는 말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한 한 그보다 나은 선수는 없었다. 이 무렵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가 그의 축구 실력을 눈여겨 보아 포항제철 선수들과 함께 연습시키기도 하였다.
관련된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한홍기는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 (현 교육부)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축구 명문인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87년에는 제6회 KBS배 추계 중고축구대회에서 16강전 결승골, 준결승전 동점골 및 결승골, 결승에서는 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고, 본인은 대회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포항 스틸러스 선수들과 훈련했으며, 그들을 상대로 개인기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최순호를 비롯하여 박창선, 조태천 등 역대급 선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다만 그의 불운이 시작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관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 리 만무였다. 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는 소리가 그를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1988년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카타르에서 열린 제26회 U-1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그는 고질적인 발목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겪었던 발목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 아픔을 무릅쓰고 운동에 매진했던 결과, 양쪽 발목 인대가 1인치 가량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가운데 세 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2] 어찌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김병수의 아버지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겠지만,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한 달 이상 운동해본 적이 없었고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김병수 본인은 후에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고 한다.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3]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 그러고보니 현대 축구의 영웅도 허카우터가 인맥빨로 뽑았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 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4]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1992년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선발되었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삼락 감독이 당시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5]의 훈련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사건건 부딪혔는데, 당시 고려대학교 소속이던 김병수를 대표팀에 선발했다. 당연히 크라머는 노발대발했고, 이후 김병수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빼어난 활약을 보고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를 1분 남기고, 극적인 발리슛 결승골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다시 발목 부상이 재발하면서 끝내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의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 소속 구단들은 한국의 유망 선수 영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쓰다 자동차도 그런 구단 가운데 하나였다. 물밑 작업이 한창이던 91년 그들은 김병수를 점찍고 가계약을 맺었다. 올림픽 최종예선이 끝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92년 2월 스카우트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통보한다. 재기 가능성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쓰다는 93년 '산푸레체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J리그에 참가했고 고려대 1년 후배인 노정윤이 그를 대신해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조금씩 잊혀져 갔다.[6]
이후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JFL의 코스모 석유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적지않은 연봉에다 부상 부위의 재수술과 재활 훈련까지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1992년 초여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92년 7월. 김병수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엔 발목이 아니라 무릎이었다. 수술 이후 약해진 발목 탓에 양쪽 무릎까지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리고, 93년부터 코스모 석유에서 뛰기 시작했다.
J리그도 아니고 일본실업리그 소속팀, 그 것도 만년 하위권으로 처지는 팀이었지만 그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국내 선수 연봉 최고액에 못지않은 금액이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기록도 찾기 힘들지만 김병수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4년간 그가 출장한 경기는 대략 100여 게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70골 이상 넣은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도 부상 때문에 팀 훈련은 거의 못하고, 하루 2시간 정도의 훈련 후 집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합에 출장했다고...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푸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주목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그나마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코스모 석유 당시 김병수의 포지션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프리롤인 듯? [7]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일왕배 경기에 출전한 적이 있는데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었다. 여담으로 이 당시 유고슬라비아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인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나고야에서 뛰고 있었는데 이 팀을 이긴 것이다. 세계적인 선수를 발라버린 한국 축구 천재의 위엄 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히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김병수 입장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돌았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인의 주선으로 오이타 트리니타를 입단했고,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하기에 이른다. '비운의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을 만큼 안타까운 은퇴였다.[8]
3 지도자 시절
갈등 끝에 은퇴를 결심하고 짐을 꾸린 것은 98년 봄. 조용히 귀국한 그는 모교인 경신고에 잠시 머무르다 고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게 됐다. 당시 고려대학교는 94년 이후 계속된 스카우트 실패로 라이벌 연대는 물론 아주대학교 한양대학교등에 밀려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남대식 감독이 퇴진하고 김성남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당시 고려대에 속해있던 선수들은 박진섭, 최철우, 조세권, 박동혁, 이성재, 박민서 등이었다. [9] 그 해 연고전은 연세대의 2:0 승리였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고대의 압도적 우세였다. 페널티킥 두 개를 실축하는 바람에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는 선이 굵은 전통적인 팀 컬러 대신 개인 전술과 아기자기한 조직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섬세하고 효과적인 축구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욕 무대는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대학 선수권 대회였다. 1회전에서 연대와 맞붙어 접전 끝에 3 대 3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른 고려대학교는 양현정이 이끌던 단국대학교를 4 대 3으로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고려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이었다. 김병수는 포철공고의 코치를 맡게 된다. 이후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 [10]
포철공고의 포메이션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팀과 유사한 형태의 3-5-2. 중앙 수비수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고 다시 그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는 다이아몬드형 시스템이다. 그런데, 한가지 독특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 보기 힘든 컴팩트 사커를 구사한다는 것. 전후방은 물론 좌우 측면의 간격도 극단적으로 좁히는 압박 전술이다. 스리백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더블 블란치로 세우고 때때로 4-4-2 나 3-4-3으로 급격한 전술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지 않아 어설픈 면도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다. [11] 오히려 선수들의 공부를 강조했다. 이론을 중요시해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금방 선수들이 이해한다고. 심지어 한글도 잘 못 쓰는 선수들이 많다고...
이후 2008년 영남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12] 그의 부임 이후 영남대는 포항 스틸러스의 2군에 가까운 팀으로 거듭났으며, 그 패스 축구를 그대로 영남대에 이식시켰다. 그 결과물이 2013년 U리그 우승과 2014년 FA컵 16강. 손준호의 말에 따르면 패스의 숫자로만 따지면 포항보다 영남대 시절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선수들의 패스 플레이를 훈련시킨다. 영남대 감독으로서 배출한 선수들이 자리잡아가기 시작한 시기라 유명한 선수가 많지 않지만, 2012~5년 K리그로나 국가대표팀으로나 가장 핫한 선수중에 하나인 이명주와 김승대가 그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특히 이명주의 경우, 원래 센터백이였으나, 수비수에 비해 공을 잘 다뤄 미드필더로 전향시켰고 이것은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훈련을 많이 시키지 않는 타입이다. 훈련은 오후에 90분만 하고 선수들에게는 그저 축구에 대한 기본과 방향을 제시한다. 선수들 스스로 빠른 템포를 추구하는 스타일에 적응하면서 실력이 향상된다고 믿는다.
4 여담
4.1 개인기로 교통체증을 만들다
상술했던 일본 프로축구팀과의 계약이 불발되고 김병수가 큰누나 집에서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끼는 못 속이는 것인지 조그만한 고무공을 들고 가게 앞으로 나가 리프팅을 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들 가지고 노는 공으로 '묘기'를 부리자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꼬마들이 주된 관객(?)이었다. 공을 빼앗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마들 틈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요리조리 피하며 리프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제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관중석(?)에 합세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멈춰서서 이 희한한 남자의 재주를 지켜봤다고 한다.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어났다.
4.2 아내와의 만남
김병수가 다니던 헬스클럽이 있었는데 헬스클럽 관장이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관장님의 딸. 그런데,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났다. 김병수를 만났을 때 부인 허은영씨는 고등학생대도가 요기잉네?이었다. 어린 딸을 믿고 맡긴 장인도 대단한 분이지만 겁(?)도없이 시커먼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은영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김병수 감독은 그의 어두움을 걷어낼 한줄기 빛같은 여인을 만났다고. [13] 부인 허은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을 못채우고 김병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남편이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들 '다훈'과 딸 '사이'가 태어났다. 당시 훈련 부담이 적다보니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많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필름으로 보관된 그의 경기 장면은 많지 않다. 다행히 아들 다훈군에게 보여주려고 그가 몇 장면 녹화한 것이 있다고 한다.
4.3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한 회고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김병수의 노트 중에서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한 김병수 감독 본인의 회고가 적혀 있다.
현대 축구는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최전방과 최후방의 거리를 30m 이내로 축소하여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팀이 상대편의 볼을 가장 빠르게 빼앗아서 가장 빠르게 공격하겠다는 공격 지향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성에 대한 개념에 속도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술적인 면보다는 개인 기술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패스의 질, 킥의 질, 원터치 볼 컨트롤의 질, 움직임의 질 등이 그것이다.
축구의 미래는 개인 기술, 개인 전술, 그룹 전술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11명의 특성을 살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시합 도중 시스템에 급한 변화를 주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98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활약한 세계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화려하고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기본이 완벽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격은 공격만, 수비는 수비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 축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메인이 되었다.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를 길러냈다.
4.4 2군 리그에 대한 생각
스포탈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2군 리그가 중요함을 언급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를 가면 경기를 뛰며 동기부여를 하고 실력이 향상 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프로로 가는 경우에는 마땅히 뛸 기회를 잡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2군 리그가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제대로 된 선수 육성을 하려면 2군 리그가 필수적이다. 2군 리그가 정착되면 구단에서 선수들을 스스로 수급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팀에 이적시키며 자금을 만들 수도 있다라며 2군 리그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이 인터뷰에서 명주 도플갱어가 너무 일찍 1군에 올라온거 아닌가라고 언급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이명주가 중동가고나서 드러났다 자세한 것은 포항스틸러스 2014년 항목참조
4.5 그 외
포철공고 선수들에게 경기가 끝나면 트랙 한켠에 모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게 했다. 하지만 러닝은 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선수들이 시합 후 또 뛰는 것을 싫어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는데 고려대 코치를 할 당시 결승전에 올랐다고 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경기장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우승을 했으니 높은 사람들 앞에 도열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라는 것은 당시 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김병수가 누구냐고 난리가 났었다. 높으신 분들의 갑질이지 뭐.
이명주가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면서 이에 관한 인터뷰가 많다. 그중에 2013년 인터뷰가 어마어마하다 김신욱과 MVP경쟁을 하던 리그 씹어먹던 폼이었음에도“아직까지 중원에서의 위치 선정 부분에서 조금 취약점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활동량이 좋고' 기술이 좋은 선수이기에 상대 선수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를 선보인다. 템포 또한 빠른 선수다.”라며 여전히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릴적 포항 한홍기 감독이 1군에 합류시켜 훈련시킨 인연과 이후 포항에서 코치를 하고 영남대에서 포항 선수를 많이 길러낸 것으로 포항팬들 중 김병수를 반레전드 취급하는 사람이 꽤 있다. 거기에는 포항에서 지원해주려고 했던 브라질 유학을 다녀올수 있었다면 몸이 성하게 축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포함된 듯.
선수로서 유럽 진출을 해보는 게 꿈이긴 했으나, 그 꿈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45세가 되기 전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아 세계로 나가보는 게 꿈이라고 한다.
당신은 지금 불행하냐는 질문에 선수로서의 김병수는 불행했으나 인생에서는 불행하지 않다고 답했다. 축구가 여전히 꿈이기 때문이라고. 마음에 흔들릴 때면 '나는 한국 축구를 위해 큰 일을 해야 한다.'라는 사명감을 자신에게 부여해서 자신을 다잡는다고 한다.- ↑ 분명 출전했다는 말들은 많은데 정식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추가바람
- ↑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했다.
- ↑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의 경기장면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 ↑ 차후 이 때를 회상하며 인터뷰하기를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라고...
- ↑ 일본 현대 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며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독일 국적의 감독.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일본 올림픽 축구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 공로로 3등급 국가 훈장을 받았다. 이후 서독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 아인라흐 프랑크푸르트 감독,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을 역임한 이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 ↑ 비디오 대여점을 하는 큰 누나 집에서 가게를 봐주며 아무런 낙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 ↑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한다."포지션이 없었죠. 그냥 공격이었어요."
- ↑ 당시 오이타 트리니타에 한국 선수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언급한다.
- ↑ 하지만 당시 연세대학교에는 장대일 서동원 이동욱 성한수 등 프로1순위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하고 정상남 정재곤 서기복 이승엽 같은 스타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 ↑ 페어 플레이를 강조하고 절대로 거친 반칙을 못하게 했다.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다고 선수들에게 역설했다.
- ↑ 신선한 전술인 만큼 선수들의 이해도가 낮았지만, 그 당시에는 폭력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병수는 선수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주로 나타나는, 자신의 능력을 기준으로 잡고 선수들을 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수들을 낮은 곳에서부터 이해했다는 것.
- ↑ 당시 영남대의 축구부 상황은 아주 안 좋은 상태였다. 축구를 쉬었던 선수들이 대부분이고 선수들 자체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 ↑ 학교 앞에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바래다줬다고 한다. 밝고 착하고 건강한 면에서 끌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