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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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국회 진술 모습. 당시 한국 나이로 여든여덟.

1926년 5월 1일 경상남도 양산시 출생.

1 생애

양산 보통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세월이 하 수상해 어머니에 의해 집에서 보냈다. 그의 언니들은 먼저 시집을 갔다. 1941년, 열여섯이 되는 해에 동네 구장과 반장, 일본인에게 속아 징용으로 알고 정신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

대만, 광둥 성을 거쳐 홍콩, 싱가포르,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자바, 말레이시아, 방콕 등으로 이동하며 성적으로 노예적인 만행을 당하셨다. 일제 패망 후 5년만에 귀국했다. 후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게 되었고, 재결합 후에 얼마 못가 남편과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홀로 살았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다가 철거아파트를 보상으로 얻게 되고 이후로는 채소밭 일을 하며 살아오셨다. # 2013년 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세계 여러 곳을 돌며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1992년 피해자임을 밝히고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유럽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기거하는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나비기금'을 발족시켰다.

2 국정감사 참고인

2016년 9월 2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김할머니는 <우리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자기들끼리 속닥속닥해서 (<위안부> 합의를) 타결했다.>며 박근혜<정부>를 향해 일갈했다.

이어 <아베가, 일본정부가 직접 나서서 법적으로 합의하고 배상하기 전에는 합의할 수 없다.>며 <이렇게 일 할거라면 차라리 정부가 손을 뗐으면 좋겠다. 우리가 국민하고 싸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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