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진

金翼鎭
1896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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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및 제2대 검찰총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법조인.

1896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경성전수학교[1]를 제1회로 졸업하고 재판소 서기 겸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경성지방법원, 공주지방법원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조선총독부 판사특별임용시험을 통과하여 평양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다.[2] 이후 공주지법, 평양지법, 함흥지법을 거쳐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3]

1927년 사직하고 평양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다. 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족주의, 계몽주의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재야 법조인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제4차 조선공산당 평양지부 사건의 변론을 맡았고, 평양 기생에 대한 경찰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는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평안남도에서 순사가 도박 혐의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가한 사건에서 순사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소련군정의 반탁진영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간첩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하였고 1948년 정부수립후 최초의 대법관 인사에서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에는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는데, 당시 반공 정책을 강화하던 이승만 정권은 공산 치하에서 고생을 한 김익진이 검찰총장으로 적격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이후 여러 사건에서 대통령과 검찰총장은 대립하게 된다.

김태수 등의 정치 브로커들이 공산 게릴라가 봉기할 것이라는 날조된 정보를 보고하고 사설 수사기관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여 공산당으로 몰아가다가 발각이 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에서 이승만은 검찰이 관여하지 말 것을 특명하고 기소하지 말라는 친서까지 보냈으나, 김익진은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직접 지휘하여 수사 및 기소하도록 하여, 108명이 검거되고 김태수 등 11명을 기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담당 검사들이 기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친서를 공개하지 않았고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는 답신을 대통령에게 보내 부당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성을 지키려 애썼다. 이 일로 인해 이승만은 격노하였고, 1950년 6.25 전쟁 사흘 전 검찰총장에서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좌천되고 만다. 김익진은 정치적 압력으로 검사를 몰아낼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치욕스런 강등에도 불구하고 서울고검장 직무를 수행하였다.

1952년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이 터지자, 김익진이 평소 좌천 인사에 대해 정부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배후인물로 지목된 김시현과 연좌하였다는 피의사실로 구금되었는데 1심과 2심에서 무죄, 상고심에서는 면소판결을 받았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1세대 민법학자인 서울대 법대의 김증한 교수와 대한민국 최초의 로펌인 김장리를 설립한 김흥한[4] 변호사가 그의 아들이다.
  1. 해방 후 서울대 법과대학으로 통합되는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
  2. 당시 경성전수학교-재판소 서기-판사특별임용시험은 조선인이 일본 유학을 하지 않고 판검사가 되는 전형적인 진로였음.
  3. 7년간의 조선총독부 판사 경력 때문에 친일 논란이 일기도 하였으나, 친일인명사전에는 최종적으로 수록되지 않았다.
  4. 서울지법 판사출신으로 1954년 미국유학을 떠나 4년만에 귀국해 국내 최초의 국제거래 전문변호사로 변신하여 1958년 장대영, 이태영(국내 여성변호사 1호이자, 김흥한의 장모이기도 하다) 변호사와 함께 국내 최초 로펌 김장리를 설립하였으며, 김장리는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외국계 회사의 국내 자문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