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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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민정청
Советская гражданская администрация

1 개요

일제강점기가 종식된 뒤,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 소련군이 실시한 군정을 말한다. 사실상 이 기간에 북한정권이 수립되었다.

북한에 진입할 당시, 이반 치스차코프 소련군 대장은 북한의 중심지가 함흥인 줄 알고 있었다(...)# 다만 아주 황당한 추측은 아닌 것이 흥남이 위치한 함흥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열도를 제외한 아시아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으로 육성되었고[1] 지금도 북한의 둘째가는 대도시이며, 1945년 당시엔 함흥-흥남과 평양을 비교하면 인구가 그렇게 차이나지도 않았다. 평양이 역사적인 정통성을 가지고는 있다고 해도 어차피 당시 한반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보면 그냥 북부지방 대도시 A, B 신세.... 사실 한국인더러 예를 들어 큐슈의 중심도시를 한 곳 찍어보라고 하면 어디를 찍을까.... 당연히 후쿠오카지 어디여 기타큐슈밖에 몰라.. 그보다 규슈섬의 위치를 알맞게 찍는 사람이 그리 많을까? 더불어 평양보다는 함흥 쪽이 의외로 북한의 지리적 중심, 철도교통의 중심에 더 가깝기 때문에 그가 지도만 봤다면 당연히 그리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그들이 철저히 한반도에 무관심했음을 드러내는 좋은 예이다. 애초 소련군이 조선으로 진격한 이유도 조선의 해방 때문이 아니었다. 만주 작전 당시 만주국을 비롯, 만주지역 내 일본 세력의 괴멸이 소련군의 목표였다. 여기서 일본 세력은 당연히 만주국의 실질적 통치 주체나 다름없는 관동군이었다. 1945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본은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을 관동군 위수지역으로 설정했고, 그 이남을 17방면군 위수지역으로 변경했다. 소련군의 주력은 소만국경을 돌파하며 만주의 종심을 찔렀으나, 조공은 역시 관동군의 위수지역인 조선 북부를 찔렀다. 이 과정에서 웅기, 나남을 소련군이 점령했다. 나남을 점령한 것은 소련 해군과 해군 육전대였다.

당장 김무정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 연안파가 '이제는 조선을 해방시키라'는 린뱌오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려 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저지당하기도 했다.

보통 미군정과 더불어 소군정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소련 입장에선 공식적으로는 민정, 즉 민간 정부로 칭했다. 소련은 종전 후 독일같은 전범지역에서만 군정이란 말을 썼고, 추축국의 피해지역(폴란드, 북한 등)에서는 민정이란 말을 썼다.

2 상세

1945년 8월,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며 청진 등의 북한 지역에 진입한 소련군은 8월 말경에는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1945년 8월 26일, 소련 연해주군관구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조선인민들이여, 그대들은 독립과 자유를 회복했다. 이제 그대들의 행복은 바로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고 언명했다. 또한 소련군정은 미군정처럼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표방하며 각지에 세워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였다. 이 점을 들어 '소군정이 미군정보다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장 국내파 민족지도자였던 조만식을 잡아 가둔 것만 봐도 그들은 달콤한 말만 앞세웠음을 알 수 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시절부터 조선계 소련인(고려인)들이 요직에 들어와, 소련의 의도대로 차츰 조직을 장악해나갔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명단을 살피면, 각 부처의 은 조선인이나, 부상은 거의 예외없이 조선계 소련인으로 채워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 소련군 사단 참모였던 남일,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출신인 허가이와 휴전회담 당시 북한측 대표였던 이상조[2] 등이 있다.

소군정 내내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강간, 폭행,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는 소련군이 1945년 8월부터 이후 5개월간 북한지역에서 벌인 행태를 기록했는데, 12월 29일 작성된 해당 문서에는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3]

치스차코프는 이에 대항하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조선인의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 사단장인 드리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인은 이미 35년간 노예생활을 했다. 느낌 아니까좀 더 노예생활을 지속해도 괜찮지 않은가?"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노획한 문서 가운데는 이른바 '체포인 명부'도 존재한다. 소련군에 대항하다 체포된 이들의 명단인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이들의 행방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

소련군의 만행은 조선인 뿐 아니라, 식민지 일본인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본인에게 가해진 폭력의 수위는 식민지 조선인조차 경악할 지경이라, 일부 북한 지역에서는 조선인 치안대가 소련군을 말리다 되레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이 조선북부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1945년 9월경, 김일성이 귀국하였다. 김일성은 평남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였고, 1945년 10월 북조선 5도 인민 위원회가 세워졌다. 이를 즈음하여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지부를 세워 정치 활동에 나섰다. 한편 1945년 10월 소련은 포고령을 발표하여 여러 조선인 무장단체를 해산하였고, 군대격인 조선보안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신탁통치 오보사건) 조만식 등이 반탁 운동에 나서자, 소련측은 조선민주당을 탄압하고 조만식을 가택연금해 사실상 정치 생명을 끊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등 반공 활동 또한 탄압하였으며, 조선의용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해 들어오자 소련 포고령을 들어 이들을 무장 해제하는 사건도 있었다. 연안파가 일부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을 세웠으나,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전하느라 일부 간부만이 참여했으므로 큰 세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후 김일성 등은 공산주의적 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4]가 세워진 1946년 2월부터 토지 개혁법,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등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반발하여 월남한 사람들은 남한 내 반공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이 세워졌는데 이는 남한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을 축소시킨 것이며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의도도 보인다. 이후 김두봉 등의 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으로 세력을 재편하였다[5].

이후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 위원회가 세워지고, 단독 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1948월 2월경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4월경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으나 형식상의 합의만이 이루어졌고, 김구김규식 등이 돌아간 이후로는 북한에 남은 인사들을 끌어모아 6 ~ 7월에는 북한이 남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선전용으로 2차 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한에서도 최고 인민 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 때 북한의 헌법에서는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 지역을 북한 정권의 미수복지로 보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3 종말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를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6]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미군과 달리 소련군은 사실상 철수한 척만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개전당시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한국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군 장교는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고문에서 '작전지휘'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바 있다.[7]

소설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와는 매우 다르다. 염상진과 김범우의 대화를 요약해보면 "소련은 즉각 모든 군사를 철수시켜서 조선에 어떤 야욕이 없음을 증명했지만 군사 고문단 500명을 두고 간 미국은 응큼하고 시커먼 속이 보이지 않은가? 그 군사 고문단 한 사람당 졸개 몇명씩만 붙이면 즉각 대규모 전투부대가 한반도에 전개되지 않겠는가? 고로 미국놈들은 조선을 삼키기위해 안달이 난 제국주의자놈들이다!"라고 했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8]

소련의 괴뢰가 되어버린 이런 행태는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위성국가가 된 여러 공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며, 이것을 피한 공산국가는 티토가 장악한 유고슬라비아밖에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북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상실된 것은 바로 소련이 북한의 지도자로 올려놓은 이북태조 키밀썽 김일성8월 종파사건 같은 일을 벌여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다.

3.1 관련 문서

  1. 다만 5년 뒤 한국전쟁 때 다 날아갔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으로 복구해, 지금도 북한 유수의 공업지역이긴 하다.
  2. 이상조는 훗날 8월 종파사건 때 주소대사로 재직중 현지에서 바로 망명했다. 어차피 소련공산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3. 소군정 시기 소련군의 행태에 관해선 다음 링크를 참조할 것. [1]
  4. 연구자들은 이를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부로 본다.
  5. 남한의 조선공산당도 이에 맞춰 좌익계 정당들을 통합, 남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되었다.
  6. 정확하게는 북한지역의 공업물자나 시설/농산물을 구매비용으로 대부분 다 뜯어가버렸다. [2]
  7. 한국전쟁 개전 직후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가 본국에 타전한 전문에 따르면, 개전 당시 북한군 각 부대마다 배치된 소련 고문관의 작전지휘는 훌륭했으나, 38도선을 넘어선 뒤부터 소련 고문관이 동행하지 않으면서 북한군의 작전은 매우 졸렬해졌다. 일부 부대의 경우 사령부와 48시간 이상 교신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8. 사실 소설 태백산맥에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나 이중잣대가 넘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