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5년의 조만식.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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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의 조만식. 단 10여년만에 폭삭 늙어버렸다. | |
이름 | 조만식 |
아호 | 고당 |
출생연도 | 1883년 |
사망연도 | 1950년 |
국적 | 북한[1] |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군 |
활동분야 | 정치활동, 사회활동 |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김창숙 | 민영환 | 서재필 | 손병희 |
신익희 | 쑨원 | 쑹메이링 | 안중근 |
안창호 | 여운형 | 오동진 | 윤봉길 |
이강년 | 이승만 | 이승훈 | 이시영 |
이준 | 임병직 | 장제스 | 조만식 |
조병세 | 조소앙 | 천궈푸 | 천치메이 |
최익현 | 한용운 | 허위 | 박정희 |
북녘과 내 고향 동포들이 그 자의 통치하에 억압받고 고통받고 있는데 나 혼자 좋게 살라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 나는 이 곳에 남아서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
1 개요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5일? 혹은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아호는 고당(古堂)이다. 본관은 창녕.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 일명 조선의 간디.
2 생애
3 해방 전
22세에 숭실전문학교(숭실대학교의 전신)에 가서 당시 총장인 베어드 목사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2]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 운동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 축구통제령 반대운동,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에도 평양 일대에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3.1 해방 후
1945년 1월 한국 최초의 우파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으며, 해방이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여운형은 손치웅을 파견하여 조만식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권유하지만 조만식은 이를 거절하고 북에 남는다. 아마도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 북한을 좌파 일색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심정의 발로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정황을 토대로 추측해보면 그는 그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했듯, 친미반공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10월 5일 미군정청은 각계 명망 있는 조선인지도자 11명을 군정장관의 고문관(이 가운데 9명이 한민당 출신, 1명은 여운형, 1명은 조만식이었다.)으로 임명하였고, 북쪽 출신으론 유일하게 그가 포함되었지만 그는 이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남쪽의 민족주의자들과도 서신 등을 통해 연락을 취하였고, 미군정과도 비밀리에 교류를 가졌다. 반대로 그는 북한에 주둔한 외세, 즉 소련군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는 일부 시각에 반해 그는 내면적으로 ‘점령군’이라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행동과 태도는 소련군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가 독자적인 민주주의계열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한 것은 좌파가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는 북한에서 나름의 우파의 이해관계를 수호하고자 하는 욕구의 소산이었다. 조선민주당은 유산계층의 이익까지 옹호하는 독자적인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창당 초기에는 조선민주당이 어느 누구로부터도 통제받지 않고 자체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해방 초 조만식과 공산측은 협력의 틀을 만들어 정국을 운영하였지만 갈수록 양자의 입장 차이는 벌어지고 있었다. 자산계층의 이해관계를 일정 부분 대변했던 그가 공산당이 주장하는 개혁 방식에 우호적일 리가 없었다. 이미 소련군 당국이 그의 ‘고집’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소련군 진주 직후부터 일부 소련군 병사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한 것은 군 당국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아직 토지개혁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악랄한 유산인 소작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소작료 3:7제 운동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지주에게 ‘가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45년 11월 중순에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처리를 놓고 심한 항의를 하는 통에 이반 치스차코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노선과 정책을 두고 발생한 민주당과 로동당 간의 갈등과 공산측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점증하는 반감은 조만식을 따르던 한근조 등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일부 간부들이 남행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전부터 그의 추종자들은 남한의 민족주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민주당 지도부는 보이지 않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추종하였다.
결국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이를 불안하게 여긴 여운형, 김구 등이 수차례 월남을 권했지만 조만식은 이북의 동포들을 버릴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결국 조만식 선생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압력에 의해 1946년 3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그후 생사불명이 되었다.
사실, 소련군이 입성하고 김일성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조만식이 이북에선 민족지도자로 상당히 우세했었다. 북쪽의 자본가들과 기독교신자들[3]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 하지만 소련군이 입성하고 김일성 체제가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자본가 및 기독교 세력이 남한으로 쓸려내려가면서 조만식의 이북쪽 지지기반은 크게 위축되었다.
3.2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정권이 수립될 당시에도, 북한의 북조선노동당 일파는 그를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노선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에 실패한다. 조선민주당은 1970년대 말까지 지역조직이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엄혹한 공포정치로 인해 별 활동이 없었고, 이미 최용건이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래의 색깔을 잃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1981년 조선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면서 완벽한 위성정당이 되어버린다.[4]
1950년 5월 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5] 국내에 남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온 몇 안 되는 우파 민족주의자인데다 대중들이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껄그럽게 여긴 이승만이 조만식을 삼팔선 이남까지 데리고 내려오라.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교환을 거부했다.
3.3 북녘의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북에 남겠다
그가 그렇게 지인과 제자들의 월남 권유와 김일성과 북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월남(越南)을 거부한 이유는 바로 그의 고향인 평안도 향민들과 북녘의 동포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당 치하에서 우리 북녘 동포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내가 남(南)으로 가게 된다면 북녘의 동포들은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치하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1천만 북녘 동포와 함께하기 위해 북에 그대로 남을 것이오."
그리고 이 말이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3.4 사망
1948년 3월 북한 정권에 자택 연금되었다. 감금 2개월 후인 5월 3일, 아내인 전선애 여사와 자녀들에게 월남을 권유하며 떠나기 직전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남겨주었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역이 이를 안장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유엔군과 국군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끌고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그의 시신이 어디있는지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많다. 평양이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고, 훗날 모든 정치활동이 배제된 채 시골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택연금이 오래된 탓에 고령의 조만식이 허약해졌고, 계속되는 한국전쟁 중의 폭격에 적절한 대피를 하지 못하여 사망했다'[6]라는 설도 있으나 북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남한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세한 상황을 확인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뭐 어느 쪽이든 북한의 불법 감금으로 인해 사망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항간에는 NKVD가 친일파라는 모함을 믿고 굴라그에 끌고 가 죽였단 얘기도 있다. 조만식 선생의 1948년 이후 행적이 불분명한 것을 볼때 소련으로 북송된 것도 일리가 있는 얘기다. 더구나 당시 선생은 고령이어서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와 간수로 있는 소련군인들의 학대를 못 견뎠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4 평가
안타깝게도 사후 남한과 북한 각각에서 왜곡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북한에서는 그를 친일파로 몰아 죽였으며(...), 남한에서는 보수세력들이 그를 '반공주의자'의 상징으로 삼아서 찬양하고 있는 실정이다.[7] 사실 신탁통치 반대 보다는 북한의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다 죽어간 점 때문에 반공 우익민족주의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조만식의 정치사상이나 노선은 당시 남한 내 주류 보수세력들(이승만 일파)이 주장하는 바와는 차이가 있다.[8] 오히려 그는 '중도우파' 성향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대표적인 예로 신간회 활동 당시 그가 사회주의자와 어느정도 연계 맺었던 것도 있었고, 남한에서 여운형, 홍명희와 친분이 있었던 것도 있었고) 이는 중산계급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한 기존의 보수 우파와 달리, 그는 일찍부터 도시 서민과 소농민의 입장을 폭넓게 대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치노선은 북한 공산당의 급진적 노선을 거부하고 회유에도 거부한, 우익 민족주의자로 적어도 현준혁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하고도 같이 협력할 수 있을만한 역량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여담
숭실대학교의 조만식 기념관은 이 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 현재 사회과학대학 건물로 사용 중이다.
만화가 조경규가 이 분의 손자이고, 조세호는 먼 친척이다.
시인 김소월이 오산학교에서 조만식을 만나면서 사상적 스승으로 대했다고 하며, 그를 소재로 "JMS"절대 이 사이비종교집단과 관련없다!!라는 시를 썼다.
ITF 태권도의 고당 틀이 이 분을 뜻하는 틀이다.
파주시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조만식 선생의 동상이 있다.
- ↑ 그가 살아있을 시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다. 그의 사후 한국 정부가 국적을 부여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 ↑ 여담으로 베어드 목사를 찾아가기 전날까지 술을 마셔 만취 상태였던(!) 그 자리에서 조만식은 자신을 숭실전문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베어드가 입학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조만식은 기독교 활동을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그대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
- ↑ 당시 평양을 비롯하여 평안남도 지역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신교가 강성하였다
- ↑ 이것이 북한과 다른 공산국가의 차이인 것이,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우는 사실상 야당이 남아있었고, 이러한 야당들이 민주화와 개방의 보루 역할을 어느 정도 맡았다. 북한의 변화가 어려운 것은 이런 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 이것은 박헌영의 제안이었다.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는 사실상 남로당의 활동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
- ↑ 이미 구금될 당시 그는 고령의 노인이었는데, 노인을 3년 동안 연금시키면 어떻게 되는지는 불보듯 뻔하다.
- ↑ 이들 보수세력에서 그를 '반공주의자'의 상징으로 근거로 드는 가장 큰 것이 '신탁통치 반대'를 강하게 주장했었기 때문이라고 들고 있는데, 실상은 조만식이 '신탁통치는 자치론과 비슷한 것'으로 여겼고, 또 '동아일보'의 오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도 있었다. 그래서 신탁통치='독립을 유보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일제강점기 시기 신간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협적 무저항의 시민불복종 노선을 걸은 것으로 해석하는게 옳을 것이다.
- ↑ 조만식은 이북지역을 대표했던 지도자로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기 때문. 만약 그가 한국전쟁때 살아남아 3백만의 실향민과 함께 남으로 왔으면 조봉암 못지 않은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