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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兌榮
1914년 8월 10일 ~ 1998년 12월 17일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출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사망
사망원인(사인) 은 알츠하이머
1 소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 1952년 사시에 수석합격하여 판사가 될 뻔 하였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되지 못하고 변호사가 된다. 이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가정내의 분쟁을 해결해 주었으며, 가정법원설립청원, 호주제페지운동, 동성동본결혼가능운동을 펼쳤다. 부군은 전 외무부 장관이었던 정일형 박사였고, 아들은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였던 정대철이다.
2 경력
1952년 :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954년 : 한국 YMCA 전국연맹 이사
1956년 : 여성법률상담소 설립
1963년 :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교수 겸 법정대학 학장
1974년 : 민주회복국민선언 참가
1976년 : 여성백인회관 건립
1977년 : 3.1민주구국선언 참가
1984년 :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 회장
1986년 : 국제법률가 위원회 위원장
1995년 :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명예 이사장
3 학력
1931년 정의고등보통학교 졸업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졸업
195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LL.B.
195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196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4 상훈
1971년: 제1회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
1975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1984년 국제변호사협회 국제법률봉사상
장한어머니상
법률문화상
1989년 브레넌 인권상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0년 3‧1문화상
제3회 세계법률구조상
세계감리교 평화상
1991년 제1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
5 저서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
《가정법률상담실기》(1958)
《한국 이혼제도 연구》(1969)
《북한의 여성생활》
《여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운동사》
《현대여성의 모럴》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1972)
《쪽박으로 한강물을》(1985)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
《나의 만남 나의 인생》(1991)
《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1992)
《북한 여성 연구》
《정의의 변호사가 되라 하셨네》
6 참여 운동
1970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가 되고 같은 해 국제법률구조연합회 부회장에 선출 되었다. 1971년 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재직 중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1971년 '법을 통한 세계평화센터'로부터 '법을 통한 세계 평화상'을 받았다. 1973년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남편인 정일형과 함께 1974년 11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 하였다. 1976년 3.1 민주선언 서명에도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또 수많은 민주화 유공자들을 법적으로 변호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여성인권, 여성운동에 주력하여, 1989년 가족법 개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가족법 개정운동을 추진하여 이혼녀의 재산분할 청구권 인정과, 기존의 친척 관계를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 이내로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 밖에 호주제 폐지[1], 부모친권, 동성동본 결혼금지 제도의 폐지 운동을 주관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 때문에 남성중심적인 성리학자들은 인간관계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그녀를 맹비난했다.
또한 1976년 국내외 여자 정치인 및 여자 지식인 100명의 서명·동의 지원을 얻어 서울에 여성운동가들의 회관인 여성백인회관 건물 부지를 매입,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3월 3·1 민주선언에 참여 하다가 이듬해인 1977년 실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 뒤 여성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1980년 복권해 변호사 자격을 돌려받았다.
7 일생
2살 때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홀어머니와 두 오빠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한 뒤 남편의 응원으로 194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52년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하지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야당 의원 정일형의 아내라는 것을 트집 잡아 판사 임용을 거부하자 1954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야당 국회의원의 아내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소박맞은 아내, 첩, 시국사범들이 그녀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게 되었고, 이들을 변호하면서 법률이 남성에게 유리하도록 적혀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운동에 앞장서며 한반도 페미니스트들의 대모로 1994년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한다.
1996년에 당선을 장담했던 아들 정대철이 9시 뉴스 앵커 출신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자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지, 그에 노환이 겹쳤는지는 몰라도 치매에 걸려 2년 간 가족도 못 알아보고 지내다가 1998년 12월 17일에 별세했다.
장면 전 총리, 남편 정일형 박사와 함께 김대중의 최대 후원자이자 정치적 선배로 꼽을 수 있는 분이다.
정일형 박사가 김대중과 같은 계보에서 활동한 인연도 있었겠지만,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폐인처럼 지내던 김대중에게 자신의 후배이자 비서 이희호와의 결혼을 주선한 분이 바로 이태영 변호사..
98년 사망 후,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다.
2015년 8월 10일에 올라온 탄생 101주년 기념 구글 두들. 좌측에는 호주제 폐지 및 가족법 개정을 위해 애쓴 법조활동을, 우측 상단에는 저술 및 학문활동을, 우측 하단에는 가정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여성 및 가정문제 관련 상담활동을 하던 장면을 담았다. 여담으로, 생전에는 아직 여성 변호사가 쏟아지기 이전 시기라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들이 연수원 입소 전후로 단체로 인사드리는 일이 잦았다.
8 기타 이야깃거리
가족법 개정안 진정서를 들고 당시 대법원장인 김병로를 찾아가자 김병로가 "천오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 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승만이 판사 임용을 거부할 당시 이태영을 임용할 것을 건의한 사람이 김병로였다는 것이다. 판사 임용을 건의할 권한이 대법원장에게 있긴 했지만 말이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는 김대중의 증인으로 출석해 군 검사를 향해 호통을 치는 패기甲을 보여주셨다. # MBC 제5공화국 드라마에 따르면 “눈이 나빠 사람이 잘 안 보이면 이 안경을 하나 더 쓰고 사람을 똑똑히 봐! 김 선생이나 나를 뭘로 보고 이따위 행동들을 하는 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해 보란 말야! 자식들한테 부끄럽지 않아!”라고 일갈했다고.- ↑ 남편인 정일형이 운동에 같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