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양궁)


위는 현재 교수로 재직 중인 모습이고, 아래는 타임지가 찍어 준 선수 시절 모습이라고 한다. 당시 대학 1학년.

대한민국 여자 양궁 신궁 계보
김진호서향순김수녕조윤정김경욱윤미진박성현기보배장혜진


대한민국의 전 양궁 선수이자, 현재는 한국체육대학교의 교수 겸 대한양궁협회 이사.

대한민국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로서, 여자 양궁이 세계 최강이 되는데 그 주춧돌을 놓고, 가장 먼저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양궁 선수다. 대한민국 양궁에 미친 영향력 하나만큼은 절대적이었던 선수로, 가히 대한민국 양궁의 어머니라고 할 만하다. 현역 시절 별명은 양궁 여왕.

1961년 12월 1일 생으로,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여고 출신으로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양궁부에 가입하면서 양궁 선수로서의 길에 접어들었다. 실력이 없었으면, 그냥 고교 시절 취미로 하는 정도로 끝났을 텐데, 막상 해보니 실력이 넘사벽. 손가락이 부러진 상황에서 대표 선발전에 나가 1위를 했을 정도면 말 다 했다.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개인전 금메달과 1979년 베를린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에서 전무후무한 5관왕에 등극하면서 이름을 알렸다.[1] 그래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급부상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 터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이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였고, 대한민국도 모스크바 대회 보이콧에 동참함에 따라 선수 생활의 최절정기에 타의에 의해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면서 올림픽 메달의 기회는 어이없이 날아갔다.

그래도 포스는 여전해서 1983년 LA 세계 양궁 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등극했다. 마침 이듬해 열릴 올림픽이 LA 개최라서 금메달 후보로 유력했는데, 정작 1984 LA 올림픽에서는 컨디션 난조로 부진하면서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긴장감 때문에 흔들리면서 0점을 두 번이나 쏘는 등 전반적으로 많이 흔들렸다. 그 결과 금메달을 차지한 서향순이 신궁의 계보를 이어받았고, 김진호 자신은 결국 올림픽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단체전이 없던 시절이라 그걸로 올림픽 경력은 끝났다. 선수 생활의 절정기에 실패했다는 좌절감 때문에, 결국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것 대신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하는 것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쳐 1995년 한체대에 정식 임용되어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여러 모로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던 선수였지만, 올림픽과 이상하게 인연이 없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여자 양궁의 전설의 첫 장을 장식한 선수이기 때문에, 매번 신궁의 계보를 논할 때, 반드시 그 첫머리에 등장하는 선수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조할 것.

고향인 예천군에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김진호 국제 양궁장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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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5관왕은 지금 제도 아래서는 불가능한데, 이는 당시에는 거리별 궁사 성적에 따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