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毛
? ~ 576
1 개요
2 상세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 37년(576년)[1] 원화라는 화랑(역사)의 전신이 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두 여인이 초대 원화로 뽑혔다.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라고 기록에서 공인된 셈... 진흥왕의 생각은 이 둘을 아이돌격으로 삼아서 이런저런 활동을 시켜서 유능한 젊은이들을 모아서 인재를 등용하려 했던 것인데 남모와 준정은 서로를 질투해 기싸움을 벌였고, 결국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해서 독이 든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여버렸는데, 후에 이 사건이 발각되어 준정도 사형당했다.[2] 원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진흥왕은 여자들 대신 곱상하고 잘생긴 꽃미남들을 대신 뽑아서 비슷한 일을 시키는데 그게 화랑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자면 법흥왕과 모과 공주 부여씨의 딸이자 백제 동상왕의 외동손녀. 화랑의 3세 풍월주 모랑의 동생이라고 전해진다. 즉, 신분은 공주. 또한 지소태후와 미진부[3]의 도움을 받아 원화로서의 입지를 다졌다고 한다. 그 뒤로는 삼국사기와 동일하다.
그러나 남모의 가족관계와 미진부와의 관계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확인할 법이 없다. 그저 화랑의 탄생배경에만 언급된 인물일 뿐. 거기다가 유일하게 남모의 신분이나 가족을 언급한 화랑세기 역시 내용을 놓고 학계에서의 진위논란이 여전한만큼 아직까지도 그녀가 공주였는지 미진부와 어떤 관계였는지에 관해서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