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1 신라의 사서

신라시대 화랑을 다룬 사서. 신라 중대의 진골 역사학자 김대문이 저술하였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에서 신라의 왕호에서 각 화랑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인용되어있다.

적어도 고려시대 후반, 화랑세기가 편찬된 시점에서 500여년이 지난 원간섭기까지는 원본 화랑세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서적에서는 이미 화랑세기가 실전되었다는 언급이 있는 만큼 이 무렵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여진다.

2 현대에 발표되어 진위논란을 일으키는 문제의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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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이 진본이라면 그것은 사료 부족에 허덕이는 고대사 연구에 백년대한(百年大旱)의 단비와 같은 것으로,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의 출현은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인지 분석하는 과정에서 한 발언으로 이후 검토 후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2.1 개요

1989년 남당 박창화(1889~1962)의 제자 김종진의 아내 김경자가 박창화가 남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이후 등장한 필사본에서 발췌한 저본으로 밝혀짐)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6년 뒤 1995년에는 그 전보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이 추가된 필사본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 필사본은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으며 위서론과 진서론 사이에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상호한 치열한 논박이 이루어졌다. 남당의 자세한 행적.

다만 현재는 고고학적인 발견등의 내용에서 화랑세기가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고 서강대 학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위서론을 밀고 있어서 거의 위서로 가는 분위기이다.

2.2 박창화 필사본의 내용

유교 문화가 정착된 고려 중후기 이후에 쓰여진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비해서 고대국가의 국풍이 강했을 신라 당대 기록(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화랑세기(이하 화랑세기로 칭함)의 내용은 성적으로 상당히 파격적이다. 하급 낭도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왕족이나 자기 상관과 동침시키는 등 현대인의 시각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1]가 나오는가 하면 미실에 관련된 부분은 아스트랄한 내용들이 넘쳐난다. 6세 풍월주 세종의 기사에선 진흥왕과 미실이 서로 눈이 맞았을 때 서라벌의 다른 남녀들을 다 불러모은 다음 예절염치 다 팽개치고 단체로 검열삭제를 했다는 기록이 버젓이 나와있다. 흠좀무.

은근히 화랑들 간의 동성애를 의미하는 듯한 내용도 있기 때문에 역사 관련 부녀자들의 좋은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사다함무관랑의 이야기가 대표적. 물론 아주 친한 친구 사이로도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러기엔 내용이 너무 끈적해서 문제.

하지만 화랑세기 내에서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성적인 내용들은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책 전체로 본다면 그런 건 곁가지에 불과하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았을 때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저자로 되어있는 김대문의 출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의 서문에 따르면 김대문의 집안은 초대 풍월주를 비롯하여 5대에 걸쳐 풍월주를 배출한 화랑의 최고 명문가였다. 그러던 것이 681년 신문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화랑 세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진압 후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풍월주 중심의 화랑 시스템을 해체시키게 되는데, 김대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자신의 집안을 비롯한 화랑의 수장이었던 역대 풍월주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 내에 등장하는 풍월주 중에는 사다함이나 김유신, 김춘추 등 잘 알려진 인물들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신라 궁중 내에서의 혈통 문제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이 된다. 진골정통(眞骨正統)과 대원신통(大元神統)이라 불리는 이 두 혈통은 인통(姻統)으로 일컬어지며, 왕과 그 일족의 부인을 공급하는 핏줄을 의미한다. 그냥 신라 지배층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고 보면 된다. 위로는 왕부터 아래로는 귀족이며 화랑들까지.[2] 이 인통은 반드시 모계로만 이어진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인통에 관계없이 어머니의 인통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3] 때문에, 신라에서 모계 중심사회의 흔적이 존속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례로, 왕이나 풍월주 등을 어느 계통에서 배출하느냐는 그 어머니에 따라 결정되므로, 왕족 여성들이 속한 인통의 세와 핏줄의 범위를 늘리고자 일부종사하지 않고 여러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을 두는 케이스가 많았다.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만 하더라도 입종, 이사부, 박영실 등 여러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았다.

이 두 인통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어, 사이가 별로인 모양새로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진골정통 계열)와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궁주(대원신통 계열). 옥진의 손녀가 바로 그 미실이다. 옥진의 딸이자 미실의 이모인 진흥왕비 사도부인도 시어머니인 지소태후와 사이가 안 좋았다. 이는 당시 왕의 후계를 어느 인통으로 잇느냐에 대해 알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소태후는 사도부인의 장남인 동륜태자 대신, 자신의 딸인 숙명부인이 낳은 정숙태자를 후계로 내세웠으나[4] 숙명이 바람이 나는 바람에역시 화랑세기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진흥왕의 후계는 사도의 차남 진지왕이 이었으나 곧 쫓겨나고, 동륜의 맏아들 진평왕이 이었다. 진평왕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므로 결국에는 그녀의 뜻대로 된 셈.[5]

특이 케이스로, 15세 풍월주였던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지소의 외손녀)이 진골정통, 할머니 아양공주(진흥왕과 사도의 딸)가 대원신통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계혈통은 가야 왕실이었기 때문에 '3파의 자손'이라고 불리우는 대목이 있다.

어찌되었든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신라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역사소설이나 사극들은 대부분 화랑세기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화랑세기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경우는 선덕여왕과 소설 미실이 대표적이며, 연개소문이나 대왕의 꿈 등에서도 부분적으로 화랑세기의 내용을 반영했다.[6]

2.3 필사본 진위여부 논란

금석문들을 제외하면 신라시대의 1차 사료가 사실상 전무한 현실에서[7],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라면 그 역사적 가치는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발견된 경위가 불확실한 데다 기존 학계의 연구나 다른 사서와 배치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화랑세기가 진짜라 가정하고 내놓은 논문도 상당수 있으며 학계에서는 화랑세기가 진서인지 위작인지의 여부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고,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보고 있다.

2.4 위서론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노태돈 교수를 비롯해 이기백, 이기동 등 현 한국 사학계의 주류에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위서론을 주장한다:

  •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사회상
마복자 제도 등. 마복자란 고위 귀족이 임신한 여자와 붕가붕가 하면, 그 아이를 자기 자식에 준하여 취급하는 제도라고 한다. 21대 왕, 소지 마립간임산부 취향이라 7명의 마복자가 있어서, 그 사람들을 마복칠성(摩腹七星)이라고 불렀다고 설정되어 있다.

  • 당시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의 사용(모계, 풍월주, 전주 등).
환단고기 등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장 기본적인 비판이다.

  • 본서에만 나오는 인명 중 차후에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예가 없음.
특히 화랑세기가 다루는 시대와 거의 같은 시대에 새겨진 울주 천전리 각석에 남아있는 수많은 화랑들의 이름 가운데 화랑세기에 등장해 교차검증된 예가 단 하나도 없다.

1966년 수습되어 1972년 판독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삼국유사의 교차검증 결과. 더욱이 삼국사기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는데, 이 시기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같은 이름을 두고 'ㅊ'과 'ㅅ'의 이표기가 많이 보인다. 흠춘(欽春)/흠순(欽純), 관창(官昌)/관상(官狀)이 대표적. 따라서 용춘(龍春)/용수(龍樹)의 문제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법흥왕 19년 금관가야(금관국)의 마지막 군주인 구해(仇亥)/구형(仇衡)이 가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다. 삼국사기에는 그 아들들을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이라 전하고, 삼국유사에는 세종(世宗)·무도(茂刀)·무득(茂得)이라 전하는데, 화랑세기 김유신조에는 이 가운데 무력(茂力)·무득(茂得) 밖에 없다. 게다가 사라진 노종(奴宗)/세종(世宗)은 엉뚱하게도 이사부(!)의 아들이자 미실의 남편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걸로도 모자라 세종의 향찰 표기인 노리부(奴里夫)는 미실의 외삼촌으로 설정되어 있다.

  • 모본을 작성한 후 임의로 수정한 흔적.
논쟁 초기에는 대체로 모본을 축약해 발췌본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었고 애초에 '모본'과 '발췌본'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시각에서 붙여진 것이지만, 2003년 건국대학교 김기흥 교수는 발췌본과 모본의 내용을 비교 분석하여 거꾸로 발췌본을 골격으로 모본을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를 내놓았다.

  • 무엇보다도 박창화 스스로가 생전에 '김대문 화랑세기 필사본의 존재'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 필사본은 박창화 본인이 사망하고 한참 동안 보관되고 있다가 먼 훗날에 유족들에 의해 발표된 것이다.

등으로 요약이 된다.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박창화의 소설 화랑세기 잔본을 발견하여 1930년에 박창화가 소설 화랑세기를 집필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 역사서라고 주장되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의 글을 동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다. 기사 즉 박창화는 부남자.

박창화의 행적을 살펴보면 추모경연의 등 역사 배경 한문소설 다수를 집필했으며 그 중에는 역사서 형식을 빌린 것도 있다. 그 저작들 중 화랑세기만이 소설이 아닌 진짜 역사서라고 볼 수는 없으며 그는 어을우동전 같은 역사 배경의 야한 한문소설도 창작해 내었으므로 화랑세기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인 탓에 박창화가 야한 내용의 신라사 소설을 쓴게 화랑세기가 아니냐는 평가가 나왔고, 1989년에 공개된 발췌본은 1995년 공개 필사본의 요약본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구나 '정말로 귀중한 사료를 필사한 것이라면 박창화 본인이 죽을 때까지 진본 화랑세기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왜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 수밖에 없다.

일단 진위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필사본 화랑세기의 경우 주류 사학계에서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 할 수 없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원본이 아닌 필사본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신빙성은 없다는 것. 이 원본이란 김대문의 저술을 신라인 혹은 그 후대 사람이 편찬한 경로가 명확한 사서를 말한다.

2.5 진서론

위에서 언급된 위서론에 맞선 화랑세기 진서론은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총장을 역임한 이종욱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실상 화랑세기를 포함한 한국 고대사 논쟁은 좁게 보면 서울대 vs 서강대의 학파 간 대결이기도 하다. 이종욱 교수는 주류 한국사학계가 정립한 고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현행 국사 교과서의 고대사 부분 또한 전방위에 걸친 비판을 계속했다. 재미있는 것은 서울대에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고려대는 정작 화랑세기 논쟁에서는 별로 끼어들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암암리에 위서론을 지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서울대 편을 들지도 않는다(...). 한편 이종욱은 환빠유사역사학 비판으로 유명한 인터넷 블로거 '초록불'의 학부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진서론의 근거도 나름 짜임새가 있으며 대략 다음과 같다. 다만 화랑세기가 진서기 때문에 화랑세기의 내용을 긍정한다는 식의 순환논법적 자세는 오히려 진서론의 근거를 약화시키는 점이니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발췌본과 필사본을 비교했을 때 발췌본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짐.
이는 박창화가 화랑세기 내용을 발췌하면서도 자기가 그 내용이 뭐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는 정통 한학에 능통했던 박창화가 멋대로 지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님.
다만 향가 연구의 권위자인 김완진 교수는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들이 너무 쉽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고어인 신라어가 변변한 자료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인 걸 생각해보면 쉽게 해석된다는 점은 큰 약점이다.

  • 쇼킹한 성적 내용은 위작의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가령 가장 큰 논쟁점인 마복자의 경우 하급 낭도가 자기 처를 바침에 따라 왕족이나 상관의 비호나 후원(화랑세기 내용에 따르면 마복자로 태어난 아이는 사실상 상관이 대부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을 받을 수 있는 신라만의 사회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각종 고고학적 자료들을 보면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신라 사회의 성 인식이 생각보다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대중역사가 임용한도 화랑세기가 위서일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 신라의 정치 상황이나 고대 사회의 생활상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주장하며 저서 '전쟁과 역사', '한국고대전쟁사'에 중요 자료로 인용하였다.

  •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화랑세기의 내용이 발굴성과와 부합.
대표적인 것이 경주 월성 발굴과 포석정 발굴이다. 월성 발굴을 통해 해자에 빠져 죽었다는 동륜 태자의 일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고, 포석정 발굴을 통해 나온 '포사' 라는 기와 명문은 포석정이 유흥지가 아니라, 화랑세기에서 나온 문노와 윤궁의 결혼처럼 경건한 의식을 위해 쓰인 공간이라는 증거가 된다. 다만 이 경우에도 월성 정도의 성이라면 해자가 충분히 있을수 있다는 가설을 내세울 수 있고 화랑세기 이전에도 포석정이 의식을 위한 공간이라는 설은 이미 나와있는 상태였다. 현재는 포석정이 의식을 위한 공간이었다는 설도 반박이 나오는 상황.

2.6 국문학계의 상황

화랑세기는 비단 역사학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은 작품이 극히 드문 향가 연구에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참고로 현재 전해지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11수를 포함하여 총 25수뿐이다. 그리하여 국문학계 내에서도 위서론과 진서론이 치고 받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세기에 수록된 향가는 송사다함가, 청조가 두 수이다.

이쪽의 쟁점은 역시 수록된 향가인데, "향가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 연구들은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06.04~1944.02.08)의 1929년 발표 '향가 및 이두의 연구'와 무애 양주동의 1935년 발표 '고가연구'인데, 박창화의 필사시점은 1930년대로 추정되며 이 시점에 향가를 맘대로 지어낼 수 있을리 없다" 등의 진서론 쪽 주장과, "필사자 박창화가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수록된 두 향가의 해석이 너무 쉽다. 또한 송사다함가의 1, 3연에 나오는 '~라고 해도'라는 표현은 19세기 후반에나 최초로 발견되어 20세기 초기에 와서야 일반적으로 굳어진 표현이므로 신라시대에는 있지 않았다"고 보는 위서론의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

또한 보통의 신라 향가와 일부 다른 향찰 표기를 두고 위서론에서는 '근대에 향가를 창작한 근거'라 하고, 진서론에서는 '보다 오래된 향가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향가가 분석된 게 1930년대였다는 사실을 위서론에서는 '1930년대 이후에 창작되었다'의 근거로 내밀고, 진서론에서는 '그 시점에서 향가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근거로 보고 있다.

진서론 쪽 주장을 한 번 살펴 보자. 출처는 여기.

이 작품에 대해 주로 문법적 파악에 주력한 김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김영욱 교수)는 이 향가가 가짜일 가능성을 두 가지, 조작이 불가능한 까닭을 다섯 가지를 각각 들었다.

먼저 조작 가능성으로 문장 종결 어미로 19세기 이후에 발견되는 奴(노)가 쓰이고 있는 것을 근대 국어문법적 요소가 발견되고 있고 기존에 알려진 신라 향가와 일치하지 않는 문법적 요소가 많은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의문사와 설명형 종결어미가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이 국어학계에 보고가 된 것이 1965년이고 이를 향가 해독에 응용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임에도 1930년대에 필사됐다는 필사본에 이미 그러한 향가문법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 등을 비롯해 조작할 수 없는 고대 문법적인 요소 5가지를 지목했다.

이에 김 교수는 "향가가 가짜라면 그 창작자는 1990년대 국어학계 연구성과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대단한 문법사학자여야 한다"고 전제한 뒤 "향가가 완전한 창작물이 아님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향가에서 근대적인 문법요소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화랑세기」가 처음 나온 이래 필사 과정에서 변개(變改)가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이 작품의 저자(?) 박창화는 1960년대까지 생존해 있었고 이 시기는 양주동 등이 1940년대에 향가 해독에 대한 연구를 일정 정도 내놓은 상태였다. 박창화가 1930년대에 책을 지었(?)다고 해도 이후 이런 점을 반영하여 개작했을 공산은 얼마든지 있는 셈. 이렇게 본다면 화랑세기 필사본의 향가가 현대의 해독법으로 쉽게 해석되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2.7 필사본의 발견 경위

진서론 측에서는 박창화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일했던 까닭에 을사조약 ~ 일제강점기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규장각에서 빼간 도서 중 화랑세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이 일본의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되어 그곳에서 근무하던 박창화가 이것을 보고 필사했다는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8]

하지만 현재 데이터베이스화된 서릉부 도서목록에는 화랑세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 서적 관련 조사 결과

문제는 궁내청 서릉부가 보유 도서의 목록을 전부 공개하고 있지 않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건물 공간에 비해 목록에 나와있는 도서의 수는 지나치게 적다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며, 특히 한국인이나 한국학 연구자들의 자료 열람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도 사실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매우 많다. 진위 여부를 가장 명쾌하게 가리는 방법은 박창화가 필사한 원본이 실제 궁내청 서릉부에 있는지만 알면 되는데, 궁내청 서릉부가 폐쇄적이며 특히 외국인의 접근에 비협조적이라서 논란이 길어진 측면이 있다. 한창 선덕여왕(드라마)가 방영되어 화랑세기가 화제가 되었던 2009년 8월 13일MBC 뉴스후 취재진이 궁내청 서릉부를 방문하여 이를 재확인했다.

서릉부에 들어가 본 유일한 한국인 학자로는 울산대 역사문화과 허영란 교수가 있는데, MBC 뉴스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취재진이 갔던 서고 이외에 다른 서고를 방문했으며 서릉부의 목록은 1950년대에 작성된 것인데 그 목록에 누락되거나 이후 정리했거나 새로 추가된 부분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서릉부 내 한국 관련 사료의 전체 현황도 모르기 때문에 화랑세기 원본이 거기에 없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 일개 촉탁사원(계약직)에 불과했던 박창화가 이런 비밀서고를 들여다 볼 수 있었는지는 대체적으로 회의적이다. 하지만 박창화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12년간 서릉부에서 자신의 전공인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에 회의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1999년 방영된 역사스페셜 35회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편 참조.

필사자(?) 박창화 자신은 해방 이후에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다.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뿐이다. 신라의 나정 선도성모, 탈해의 까치, 알지의 닭 같은 것과 고구려의 단군, 유화, 금와 등의 전설과 백제의 소서노 같은 것이다. 이 전기(傳記)를 기록한 고기(古記)가 지금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아니하므로 삼국유사같이 허황된 기록이라도 유일한 사료로 참작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개찬된 흔적이 있다.

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한 증언에서는 화랑세기라는 책이 있으나 별 것 아니라고 했다니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야설작가였긴 했지만 필사한 내용이 어쨌든 유학자였던 그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였을지 어땠을지 진실은 저 너머에. 은근히 삼국유사를 디스한 셈이고 화랑세기 위작설에 한 표를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진서론을 주장하는 소수계열에서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 원본을 어느 정도 보존한 책이었을 것이라고 인식하며 '지금의 도덕적 잣대로 신라를 재단하여 위서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신라 중대에 상류계층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여기고 있다. 다만 필사자의 전력으로 인해 성적인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필사되었을 가능성(…)까지는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계열 중 일부에서도 박창화가 화랑세기 원본과 연관되거나, 그 내용을 반영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여 필사본을 '제작'했을 가능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주류 사학계를 비롯한 대다수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이 책을 한마디로 신라시대를 무대로 한 잘 만들어진 동인지(...)로 인식하는 중. 이런 관점에선 "저자의 후손들이 저작권 소송을 내어 선덕여왕(드라마) 등의 2차 생산물에 대한 로얄티를 받는게 이득이 아닌가"라는 우스개 소리로 나온다.

일각에서는 "조상을 모욕하다니!"라면서 분개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동성애나 자유분방한 관계가 뭐가 나쁘냐"[9]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일종의 정치적 논쟁이 불거지기도 한다.

한편 박창화의 유언은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할 것이며, 강역고(疆域考)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한 책'이라는 내용이었다고.

3 관련 카테고리

  1.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아내나 딸을 집에 방문한 손님이나 웃어른과 동침시키는 관행은 비슷한 시기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누군가가 집에 오게 되어 접대를 하게 되면 먹을 것과 잠자리만을 제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고려 초기의 기록이나 혹은 성경에도 등장하며, 현대에도 이누이트 족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2. 대신,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성골, 진골골품제의 표현이 등장하지 않기도 하고.
  3. 세종과 미실의 아들인 하종은 아버지 세종이 진골정통이었으나 어머니인 미실을 따라 대원신통이다.
  4. 이 과정에서 이미 진흥왕에게 멀쩡히 왕비 사도부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딸 숙명부인을 또 다른 왕후로 삼았다.
  5.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인 진지왕을 쫓아내고 진평왕을 앉힌 것은 다름아닌 사도태후였다.
  6. 대왕의 꿈의 경우 기존 사서만으로 부족하거나 밋밋한 내용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을 참고는 하되, 미실과 용수처럼 기존 사서와 정면 상충되는 부분은 사서를 우선해서 따르고 화랑세기의 비합리적인 부분은 배제한다는 자체 방침을 두었다.즉 일종의 설정집화
  7. 삼국사기삼국유사는 신라가 망한지 몇백년 후에 남아있던 사서들을 짜깁기해 씌여졌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8. 실제로 없어진 줄 알았던 고서가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이 약탈 혹은 반출하여, 외국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실제로 종종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직지심체요절과 어람용 외규장각 의궤.
  9. 박노자 같은 사람은 현재의 성적 소수자를 보는 관점과 연계시키기도 하는데 역사서의 진위를 논의하는데 있어서는 잘못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