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남승룡(南昇龍)
1912년 11월 23일 ~ 2001년 2월 20일 향년 88세.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2년 전일본마라톤선수권과 1933년 극동선수권에서 잇달아 우승했으며, 일본건국기념 국제마라톤에서는 1934년과 193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손기정을 제치고 1위로 골인하며 일본 대표로 뽑혔다. 원래 일본에서는 손기정은 세계최고기록 보유자이니 마지못해 선발하더라도 남승룡만은 뽑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권태하 코치[1]와 당시 조선 육상계의 후견인 격이었던 기업인 정상희가 "선발전 1위를 한 선수를 탈락시키자니 뭔 헛소리들이냐"고 강하게 반발했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일본 최초의 금메달을 딴 육상영웅 오다 미키오가 남승룡을 지지하면서 논란이 정리된다.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2시간 31분 42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다. 2위로 앞서 골인한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는 거의 실신할 듯이 기진맥진한 반면 남승룡은 완주하고도 기운이 남아서 제자리뛰기를 하며 손기정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고 하는데, 남승룡의 레이스 운영 자체가 후반에 전력 스퍼트하는 스타일이었기에 조금만 빨리 역주하기 시작했다면 금-은메달 석권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흔히 이야기된다. 당시 로마자 표기는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은 '난 쇼류'(Nan Shoryu)를 사용했다.[2]
그리고, 당시의 1위를 차지했던 선수는 손기정이었다. 훗날 그는 손기정이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게 그가 금메달 딴 것보다 더욱 부러웠다고 했다. 훗날 그는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를 지내고 전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국민체육진흥공단으로부터는 '경기력 향상 연구 연금'을 받았다. 2001년 2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2 기록
- 제20회 일본 선수권 마라톤 2위 (2시간 32분 33초. 1933. 11. 3.)
-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파견 최종 선발전 1위 (2시간 36분 05초. 1936. 5. 21.)
-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 (2시간 31분 42초. 1936. 8. 9.)
-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10위 (2시간 40분 10초 .1947. 4.)
3 여담
-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못 받았는데, 절친한 친구였던 손기정 선생이 입버릇처럼 “같이 고생했는데 나만 대접받는 것 같아서 언제나 미안하고 큰 빚을 진 기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 순천시에 그의 이름을 딴 남승룡로가 있다.
- 이 분의 이름을 따온 "남승룡 마라톤 대회"가 매년 순천시에서 열리고 있다.
- 현재 대한민국 영토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서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이다.
- 2013년, 구글에서 국적을 일본이라고 표기해 논란이 있었다. 관련기사
- 구글에서 남승룡을 검색하면 프로필에 동생 남기룡 씨의 사진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