魯仲連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밀양 노씨(密陽 魯氏)의 시조격이다. 빼어난 안목과 언변을 지닌 인물이나, 이 무렵 유세객들이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혓바닥을 놀렸던 것과 달리 사심없이 천하를 위해 유세한 은자다.
노중련은 나이 열두살 때 유명한 논객과 설전을 벌여 발라버렸으며, 천리구(千里驅)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성한 뒤에도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았다.
장평대전이 벌어진 뒤, 백기가 군사를 몰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을 때 일이다. 조나라의 평원군이 외지에 원군을 청했지만 열국은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나서지 못했고, 이웃한 위나라[1]에서 보낸 원군도 경솔히 진군하지 못한 채 몸을 사리는 판국이었다. 위안리왕은 조나라가 자칫 멸망하기라도 하면 다음은 본인 차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상대가 강대한 진나라라 교전할 경우 승산도 없고 승전한다 하더라도 위나라의 국력 손실도 막대할 것임을 알기에 머뭇거렸던 것이다.
이러한 안리왕의 속마음을 읽은 신원연(新垣衍)이 진나라와 손실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계획을 만들어 안리왕에게 진언했다. 그 계획은 요약하면 위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하여 형식적인 모습으로 진왕을 제왕(帝王)으로 옹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진왕이 일단 군대를 일으켜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한 이상 형식적으로 제왕으로 옹립한다고 명분만 얻고 그냥 돌아갈 일은 없이 다른 땅이나 재화를 요구할 것은 뻔하다. 하지만 제왕이라고 높여준 이상 최소 신하의 나라인 조나라를 멸망시킬 일은 없다. 결국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제왕이라는 명분과 조나라 땅 일부라는 실리를 얻어 만족해 물러갈 것이고 조나라 입장에서도 일단 사직을 보존했으므로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나라는 아무런 손해없이 양쪽 나라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큰소리 칠 수 있다.
안리왕은 이 말을 옳다고 여겨 신원연을 보내 조나라의 실질적 국정책임자인 평원군을 설득했다. 평원군을 만난 신원연은 우리도 도와주고 싶지만 진나라와 싸워 이길 수가 없지 않느냐? 진왕은 사실 한단땅을 원하는 게 아니라 만천하에 제왕으로 공인받고 싶어서 저 지랄군대를 일으켰으니, 조왕이 뜻대로 추대해주면 좋아라고 물러날 것이라고 설득했다.
조나라로서는 국가의 존망위기였기 때문에 평원군은 신원연의 제안에 숨어있는 위나라의 의도는 파악하지 못하고 신원연한테 설득당했다. 위나라조차 조나라를 구원하지 않고 오히려 같이 진왕을 섬기자고 역제안을 하고 있으니 진나라에 대항하려는 의지가 꺽인 것이다. 다만 국정책임자로서, 아무리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국가의 자존심을 버리고 진왕을 주인으로 섬기자는 말을 차마 왕에게 올릴 수 없어 끙끙거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노중련만은 신원연의 개수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신원연의 계획이라는 것이 당장은 위나라는 손해보는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진나라의 군림을 합리화시켜 위나라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대강 눈앞의 불만 끄고 보자는 어리석은 계획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노중련은 일단 평원군의 저항의지를 되살려주기 위해 평원군을 만나 설득했다. 진나라의 흉포함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런 진나라를 신하로 섬기며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동해로 망명을 가서라도 계속 저항하는 것이 낫다고 설득해, 평원군이 다시 진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결심이 들게 만든 뒤에 자신이 역으로 신원연을 설득할테니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주선을 부탁했다.
신원연은 노중련이 말빨이 좋은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를 만나길 꺼려했으나 노중련에게 설득한 당한 평원군은 억지 이유를 붙여 노중련과 신원연을 만나게 했다. 만난 자리에서 신원원은 노중련의 의도를 떠보기라도 하듯 도발하듯이 물었다.
"지금 조나라는 망할 위기라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단성에서 도망쳤고 남은 사람들은 평원군에게 붙어 콩깍지라도 얻어 먹으려는 사람 뿐입니다. 선생님은 평원군한테 빌붙어 뭐 얻어 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청렴하신 분 같은데 뭣하러 조나라에 남아 있습니까? 그냥 떠나시는 게 개인 신상에 좋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소인배들만 있겠습니까. 나는 진나라의 무도함을 알고 조나라가 망할 경우 조나라 백성들이 겪여야할 고초를 알고 있기에 조나라 백성을 위해 장군을 설득하려는 것 뿐입니다."
"말은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힘이 없는 게 현실 아닌가요? 힘이 없으면 진나라가 나쁜 줄 알지만 굽혀야지 어쩌겠습니까? 뭐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말씀하시니 조나라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나 보군요.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내가 능히 설득하여 연나라와 위나라가 조나라를 돕도록 만들면 되잖소. 멀리 있는 초나라나 제나라는 조나라를 돕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인접한 위나라 태도가 애매하니 망설이고 있는 것 아니겠소? 위나라, 연나라만 설득하면 다른 두 나라는 알아서 참전할 것이니 조나라 백성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노중련의 호언장담에 어이가 없어진 신중연은 비웃듯이 답했다.
"훗, 백번 양보해서 연나라왕이 선생 설득에 넘어가 조나라를 구원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제가 위나라 사람이고 신하라서 아는데 우리 왕이 마음을 돌리는 건 절대로 없을 겁니다. 제가 우리 왕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왕을 설득하여 사신을 뽑혀 이곳 조나라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저도 설득 못하는 걸 선생이 도대체 뭔 재주로 설득할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노중련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답했다.
"내가 볼 때 (신원연 당신을 비롯해) 위나라 사람들은 안목이 없는 거 같소. 진나라를 제왕으로 섬겨 발생하는 해악이 무엇인지만 깨달으면 조나라를 발벗고 도와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얕은 수작이나 부리고 있고 말이오."
"그 해악이라는 게 도대체 뭐라는 말씀입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릴까요? 옛날 제위왕은 주왕실을 받들어 천하 군림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아무런 실권도 없는 주왕실을 지극히 모셨소. 아무리 실권이 없는 주왕실이지만 신하로서 섬기기로 했으면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다해야 하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실을 존경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이용해 먹으려만 든다고 남들에게 욕을 먹어 오히려 권위가 떨어지고 처음부터 주왕실을 모른 척 했던 것만도 못하게 돼버리죠. 그래서 제위왕은 주왕실을 지극히 모실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비용이 결코 적지 않았소. 뭐 그렇게 해서라도 왕실의 권위를 빌린다는 본래의 목적이 달성된다면 손해라고 할 순 없겠죠. 하지만 과연 그랬소? 오히려 주왕실 쪽에서 제위왕이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걸 깨닫자 점점 더 무리한 요구를 해왔죠. 그러한 요구를 참다 못한 제위왕은 결국 주나라 사신 앞에서 주열왕을 '종놈의 자식'이라고 욕했고 그로 인해 주왕실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소. 하지만 사람들은 무리한 요구를 한 주왕실을 욕하지 않고 신하의 예를 다한다고 했으면서 그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에게 종놈이라고 욕을 했다며 오히려 제위왕을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소. 왠지 아시오? 원래 왕과 신하의 관계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오. 결국 제위왕은 주왕실을 섬긴다고 굽신거리고 돈까지 썼지만 비웃음만 당하고 원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소. 그만큼 신하로서 남을 섬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오. 강대한 제나라가 아무런 힘도 없는 주왕실을 섬기는 것도 그러했는데 힘이 약한 위나라가 강한 진나라를 신하로 섬긴다면 포악한 진나라의 요구를 감당할 수 있겠소? 주왕실에서 문책할 힘이 없었기에 제위왕은 비웃음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진나라를 섬긴다고 했으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과연 비웃음을 당하고 마는 것으로 끝이 나겠소? 아직 조와 위 두 나라가 힘을 합친다면 진나라를 물리칠 여력이 남아있소. 어찌 서로 도와 진의 폭압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신하를 자청해 수모를 감당하려 하시오."
"……."
답이 궁해진 신원연은 창밖을 보고 있다 말을 돌렸다.
"저 하인들을 보십시오. 하인 열 명이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은다면 주인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열 명의 하인이 공손히 주인을 따르는 것은 주인의 위세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비록 두 나라가 합치면 진나라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이미 진나라는 주인이고 다른 나라들은 하인과 같은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진나라는 주인이고 당신이 섬기는 위나라왕은 하인과 같은 처지라는 말씀이시오?"
"(인정하긴 싫지만) 그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하, 그러면 내가 당신네 왕을 죽여서 젓갈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그런 심한 말을 하십니까?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합니까?"
"위나라왕이 당신의 말을 듣고 하인을 자처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원래 종은 주인을 잘못 만나면 파리 목숨 아니오? 그 옛날 은나라 폭군 주왕의 이야기를 모르시오. 주왕에게는 삼공(三公)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구후는 주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쁜 딸을 주왕에게 시집보냈으나 주왕은 오히려 딸의 미모가 변변치 못하다는 이유로 구후를 젓갈로 만들어 버렸소. 또 다른 삼공인 악후가 이 일을 알고 바른 말로 간하니 그 말도 듣기 싫다 하여 젓갈로 만들어 버렸지. 이 소식을 들은 서백이 단지 안타까운 마음에 짧게 탄식을 했을 뿐인데 주왕은 이를 트집잡아 10년 동안이나 그를 감금했소. 하인이기 때문에, 주인을 잘못 만나 비위를 맞춰도 죽고 바른 말을 해도 죽고 그냥 한숨 한 번 쉬었을 뿐인데도 수모를 당한 셈이오. 신하가 되어 진나라의 하인이 된다는 건 그와 같은 의미요. 요즘 진나라왕들이 한 악행은 그리 옛날 일도 아니니 당신도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않소? 폭군 주왕보다도 더 했으면 더 하지 못하지는 않죠. 당신네 왕이 진나라왕의 신하가 되면 당신네 왕의 생사여탈권은 진나라왕이 쥐게 되는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가서 나쁜 말로 몇번 꼬드겨 위나라왕을 젓갈로 만들어 버리라고 설득한다면 진나라왕이 하지 않을 것 같소? 당신이 착각하는 게 있소. 위나라가 주도해서 조나라와 함께 진왕을 제왕으로 받든다면 지금 당장은 진나라가 위나라를 건들지 않고 조나라에게만 으름장을 놓을 것이며 옹립을 주도한 위나라를 위해주는 척해서 위나라가 손해 보는 것이 없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오. 하지만 조나라에 뜯을 만큼 뜯어서 더 뜯을 것이 없어 위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굳이 내가 시키지 않아도 진왕은 갖은 트집을 잡아 신하된 도리를 하지 못했다며 위왕을 젓갈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날 것이며 굳이 젓갈로 만들지 않더라도 진나라 공주와 결혼을 강제하고 신하들도 자기네 마음에 드는 신하로 바꾸라며 온갖 내정간섭이 들어올 것이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치는데 위나라 병력을 내놓으라고 우길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위왕은 물론이요, 당신도 지금처럼 위왕의 총애를 받으며 안녕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정녕 당신이 바라는 것이 그러한 것입니까?"
이 말을 듣고 기겁한 신원연은 노중련에서 무례를 사과하고 모든 논의를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갔다. 이후 위나라 신릉군이 독단으로 원군을 이끌고 와 마침내 진군은 물러났다.
국가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자 평원군은 천금을 주어 노중련에게 사례했으나, 노중련은 '곤란에 빠진 이를 돕고서 대가를 바라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며 끝내 사양하고 빈손으로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연나라가 제나라를 침공했을 때 일이다. 연나라 장수 악영[2]이 요성(聊城)을 점령하자 제나라 측에서 계략을 써 연왕에게 악영을 모함했다. 여기까지는 모략의 정석대로인데…, 문제는 악영이 요성을 점거한 채 눌러앉아 버렸다. 더 이상 전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연왕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아예 배 째라고 드러누운 셈.
제나라 장수 전단이 1년 가까이 요성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벌였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그러자 더 이상 분란이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노중련이 화살에 편지 한 통을 매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냈다.
그리고 사흘 뒤 악영은 자살했다(…).
무슨, 매섭게 꾸짖자 수치를 느껴 자살했다는 소설 같은 얘기는 아니고, 편지 내용은 당시 국제정세를 냉철히 분석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악영에게 살 길을 귀뜸해 준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지금 연나라 국력이 메롱이라 니가 조용히 군대를 끌고 물러나도 왕이 좋아 죽을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넌 이미 승장인데다 전력을 온존해 귀환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정 연왕이 께름직하면 안면에 철판 깔고 제나라에 귀순해라. 귀순용사 대접을 거하게 받아서 자손 삼대가 호의호식한다.'는 내용이었다.
카오스나 다름없는 전국시대에선 어느 쪽이든 타당한 해결책이었는데, 악영은 무엇을 택해도 백배 천배 보복을 받을 것 같아 그냥 제 손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장수를 잃은 연나라 군대는 힘을 쓰지 못하고 마침내 제나라가 요성을 탈환했다.
여담으로, 조선시대 정조에 관련된 민담과도 관련이 있는데 정조가 왕세손이던 시절, 영조가 요새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은 질문에 실수로 강목이라고 답해버려서 홍국영이 등장하는, 이른바 질차 이모비야(叱嗟 爾母碑也, 네 어미는 종년이다) 사건이 바로 이 노중련의 말에서 비롯된 것.[3] 그러나 사실 이 구절은, 사기와 전국책에는 나와있지만 강목에는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