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대전

長平大戰

장평대전
날짜
기원전 260년
장소
조나라의 장평
지휘관백기
왕흘
사마착
조괄
병력10~20만으로 추정10만 이상으로 추정
피해 규모불명전멸
결과
진의 압승
기타
조나라의 국력 크게 약화

1 소개

는 죽어 마땅하구나. 장평 땅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내가 속이고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 소양왕의 명령으로 자결하는 백기의 유언

기원전 3세기 중반인 BC 260년 전국시대 막바지에 벌어진 최대의 전투이자 진나라(秦)가 조나라개발살낸 전투. 기록상으로 조나라 병사 약 30만명이 생매장당했다.[1] 물론 실제로는 심한 과장으로 보이는데다 그 많은 병사들이 저항 한 번 없이 학살당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긴 하기 때문에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 전투에서 조군이 전멸한 것 자체는 역사적 사실이다.[2]

진은 6국에게 '성 안 내놓으면 쳐들어 간다'는 식으로 말도 안되는 공갈협박을 일삼았다. 겁을 먹고 성을 주면 좋고, 반항하면 그걸 꼬투리 삼아 짓밟아버리고 성을 빼앗는 식으로 실속을 챙겨왔다. 자연히 6국은 서로 힘을 합쳐 진에 대항했으니, 바로 유명한 합종책(合縱策)이다.

한편 진나라는 자칫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합종 연합군이 단숨에 함곡관까지 밀고 들어올 태세였다. 결국 매번 죽기살기로 싸워야 했으며, 6국을 각개격파할 궁리를 하니 바로 유명한 연횡책(連橫策)이다.

당시 진나라의 제도로 '목 하나를 베어오면 일계급 승진'이어서, 이미 장평대전 이전에도 (韓)의 15만 병사를 참수한 사건, 한·의 연합군 24만 명을 참수한 사건 등 무자비하고 잔혹하기로 악명을 떨쳤다.

합종연횡에 이어 진나라의 대외 전략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었는데, 바로 진 소양왕(昭襄王)이 범수를 승상으로 앉힌 것이다. 범수가 제창한 원교근공(遠交近攻)책[3]을 국시로 삼아 제나라 공략을 보류하고 인접한 한나라와 위나라를 주적으로 설정한다.

기원전 265년 진은 맹장 백기를 보내 한을 공략했고, 한은 영토가 남북으로 두 토막나 북쪽 상당(上党) 지방이 고립되었다. 그러자 상당 태수는 진에게 땅을 뺏기느니 조나라(趙)에게 준다고 덜컥 조에 항복해버렸고, 조 효성왕(孝成王)은 좋다고 받았다. 그러자 당연히 진 나라는 빡돌았다.[4]

이때 평원군은 한나라의 성을 받는 것을 찬성하였으나 군사적 역학관계를 이해하고 있던 염파는 반대하였다. 그런데 결국은 효성왕이 지도를 받음으로써[5] 진과 조의 전쟁이 시작된다.

2 장평대전의 전개

기원전 262년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의 명을 받들어 장수 왕흘(王齕)은 상당에 확실히 군화발 찍으려(…) 진군한다. 조는 전군을 동원해 맞섰고, 백전노장 염파는 장평에 진영을 건설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 철저하게 싸움을 피하면서 진의 대군이 저절로 보급 문제로 말라죽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은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염파가 계속 지구전을 펼치면 승산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이간책을 써서 염파를 경질시킨다. 그리고 자신이 명령한 이번 전투에서까지 지면 정치 생명이 끝장날 것을 염려한 범수는 왕흘 대신, 지면 같이 몰락하고 이기면 서로 좋게 될 정적 백기를 전장에 투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이자 당시에 이미 사망한 아버지 조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령관이 된[6] 낙하산조괄이, 마치 삼국지마속처럼 정석병법대로 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한타싸움에서 크게 밀린 뒤 오히려 진나라의 기병대가 보급로를 끊어버려 졸지에 조나라의 30만 병력이 굶어죽게 생겼다.[7] 속수무책인 조괄은 기껏 한다는 게 포위망을 뚫기 위해 우랴돌격.[8] 그리고 이 작전은 당연히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았고 조괄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지휘관을 잃은 조군은 항복했지만 진군은 30만 포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결국 이들을 전부 생매장했다. 자비랍시고 15살이 안 된 애들을 살려줬는데, 사기에 따르면 고작 24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3 장평대전 이후

장평대전 직후 백기는 바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소양왕과 범수는 오랜 전쟁으로 진나라의 군대는 지쳐있고 군량도 거의 바닥나 병사들의 체력을 회복하고 군량도 다시 모을 수 있는 몇 달 이후 한단을 공격할것으로 결정했다.

몇 달 이후 진나라 군대는 장평대전의 피로로 병이 든 백기 대신 왕릉을 총사령관으로 한단을 공격했지만 한단의 백성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오랫동안 한단을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신릉군이 위나라에서 지원군을 훔쳐오고, 평원군모수의 재치로 초왕에게 지원군을 받아 올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릉군, 평원군, 모수 항목 참조.)

평원군은 한단에 초나라의 지원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자신의 공을 자만하며 한단 밖에선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사치를 벌이고 있자 한문객이 지금 당장 평원군의 처첩들을 전부 군대에 동원하고 전재산을 풀어 장병들을 소집하지 않으면 초나라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조나라는 멸망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이 말을 듣은 평원군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의 말에 따라 처첩들을 전부 군대에 동원하고 전재산을 풀어 3천 군사을 조직해 진나라의 군대가 한단을 정복하는 시간을 늦출 수 있었다.

이때 진나라에선 왕릉이 한단 공략에 번번히 실패하자 계속 다른 지휘관으로 바꾸었는데 백기는 병으로 출전하지 못했다.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도착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도망가게 되고 범수는 자신이 가장 신용하는 측근에게 3만병사를 보내 진나라 병사를 돕게 하였지만 그 측근은 조,위,초 3개국의 군사의 포위를 당해 3만병사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게 되었다.

4 결말

결국 이렇게 애를 쓴 덕분에 조나라는 멸망의 길에서 잠시 벗어났지만, 수십만 장정들이 증발했으니 이후 재기할 수는 없었다. 조나라는 약 30년 정도 버텼지만 결국 기원전 222년에 멸망했다.

여담으로, 이 싸움에 얽힌 명장 두 사람도 뒤끝이 좋지는 못했다.

염파는 망해가는 나라 좀 살려보겠다고 연나라를 개발살내다가, 왕이 간신배인 곽개[9][10]의 헛소리를 듣고 자기를 해임하는 병크를 터뜨리자, 빡돌아서 후임부대를 공격하고 위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위에서 무겁게 쓰이지 않고 조왕도 다시 자기를 불러들이려고 하니 귀국하려 했는데, 또 이 간신배 곽개의 농간으로 퇴물 취급을 받고 귀국하지 못했다. 결국 염파는 이후 초나라에서 쓸쓸히 죽었다.

장평대전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기는 장평전투 직후 바로 한단을 공격하자는 백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것과 자신의 측근이 바로 항복해버린것 때문에 범수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었고 결국 범수에게 모함을 받아, 그 때문에 소양왕의 눈밖에 나서 승산이 없는 전쟁에 출전하라는 억지 명령을 거부하다가 끝내 두우에서 자결했다. 이때 백기는 유언으로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참회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모양이 되었단 말인가? (잠시 생각한 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에서 항복한 조나라 젊은이 40만 명을 생매장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나는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50여 년 뒤 진나라 병사 20만은 일단 항복했지만 결국 신안(新安)에서 초나라의 무장인 항우에 의해 불시에 습격을 받아 태반이 죽고 살아 남은 자들도 모조리 생매장을 당한다.

이를 두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당시 학살된 진나라 항졸들은 대다수가 강제노역이나 수감생활을 하다 병졸로 징발된 이들이라 타지인들도 많았기에 민심을 잃게되었고, 결국 항우의 몰락에 한 축을 맡게 된다. 즉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이후의 병졸이기에 분명 진나라 병사는 맞지만, 그 출신지를 따지면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셈이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셈이다.[11] 이후 항우는 두고두고 이 때의 일로 까이게 되고, 민심도 떠나간다.

또 다른 여담으로, 이 때 진나라는 조나라에 인질로 태자 안국군의 아들인 영이인을 보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영이인은 태자의 아들이더라도 이복형제들에 비해 끝발이 한참 딸렸고, 거기다 인질을 보낸것도 신뢰관계 구축을 위한게 아니라,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기만작전이었다. 즉 아예 희생양으로 쓰기 위해서 죽건 말건 상관없는 떨거지 왕족 하나 골라 보낸셈이다. 그래서 조나라측도 '저런 떨거지 왕족 죽여서 뭐하나' 하며 위해를 가하지 않아 무사히 진나라로 돌아갈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도 버림 받았던 떨거지 왕족 영이인은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결국 진나라 왕위에 올랐고, 그의 아들도 진나라의 왕이 되니 바로 진시황제 다.

5 장평대전은 실제?

그러나 이것이 장평대전에서의 학살은 실제가 아니며 그 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사망자가 어마어마하리라는 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정말 수십만명이 한 장소에 산 채로 묻혔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실제로 장평대전에서 묻은 것으로 추측되는 무덤이 발굴되었다.참고

발굴 보고서[12]를 보면, 시신 대부분은 위에서 내려친 흔적, 화살을 맞은 흔적이 있고 몇몇 시체는 몸통만 있지만 머리가 없고, 화살에 맞은 시체 중에서는 화살촉도 함께 발견된다. 이것은 조나라 병사들이 모두 죽은 다음 매장된 것임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산 채로 매장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또한 시신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대 대부분 전투중에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진이 의도적으로 학살을 한게 아니라 어차피 항복해 봐야 죽을 거라고 판단한 조군이 스스로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당대 중국 총인구 규모 자체가 3천만 안팎이고 진을 제외한 나머지 6국의 인구는 다들 수백만 정도임을 감안할 때 조군의 사망자는 실제로는 10만 명 정도고, 대부분 학살당한 게 아니라 퇴로가 막힌 뒤 전멸당하고 나서 진군이 집단으로 매장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병력을 부풀리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조괄의 군대도 그렇게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공산이 크고, 시신 한 구를 일일이 셀 여유 따위가 전장에서 있을 리 없으니, 백기가 그 과장을 그대로 믿고 호왈 40만이라고 보고했거니, 백기가 자신의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서 40만이라고 보고한 뒤, 여기에 6국을 겁주기 위해 40만을 모두 학살했다고 발표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오직 조괄이 이끌던 조군이 장평에서 전멸했다는 사실뿐이다.

또한 생매장을 당한 병사들의 규모에 관해서는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유골의 수는 130개에 불과하며 1호갱과 2호갱이 각각 크기가 너비 5m 길이 11m, 너비 3m, 길이 55m이기 때문에 이곳에 수십만 명을 다 묻을 수는 없다. 물론 이곳 말고도 더 많은 무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장평대전에서 이후 역사서에 40만으로 기록될 만큼 많은 수의 조나라 청년들이 죽었고, 이 여파로 조나라는 끝끝내 이때 잃은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6 관련 시

장평조고(長平弔古)[13]
 
조나라 병사 사십만, 언제부터 모였던가?
趙兵四十萬 生聚自何年

하루아침에 진나라에게 생매장당하니, 누가 그 앞에서 말 몰아 지휘했나?
一朝爲秦坑 是孰驅之前

음산한 구름이 환한 해 가리고, 서방에서 부는 바람 구천에 울부짖네.
陰雲慘白日 西風號九泉

하고 많은 억조 군중이니, 더벅머리 아이의 머리 정도는 매달 수도 있었으리.
林林億兆衆 竪子頭可縣

널리 죽임당함을 달게 받아서, 백골이 깊은 골짜기 가득 메웠네.
甘心受大戮 白骨深谷填

도깨비불 밤마다 일어나 비추니, 만겁의 원한은 풀기도 어려워라.
磷火夜夜明 難消萬劫冤

통쾌하도다 두우의 검이여, 아마도 하늘은 있었나 보구나.
快哉杜郵劍 庶幾稍有天

단하의 흐름은 다하지 않으니, 이 원한 마침내 면면히 이어지리.
丹河流不盡 此恨終綿綿
  1. 염파가 강판되기 전부터 계산하면 40만에 달한다.
  2. 현재 나무위키에는 난징 대학살의 학살자 수를 약 30만 명 정도로 적고 있다. 매일 수천 명씩 죽였다는 아우슈비츠 학살은 말할 것도 없다.
  3. 가까운 곳을 털고 먼 곳과는 결한다. 삼십육계 중 하나. 참고로 이것만 봐도 36계가 손자병법과 상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4. 일각에서는 상당 태수가 물귀신 작전으로 일부러 조나라에게 줬다고 하지만, 학계에서는 무시받는 신세다.
  5. 고대 중국에서 그 지방의 지도를 준다는 것은 그 지방을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형가진시황을 죽이러 갔을 때 미끼로 진시황이 잡아오라고 한 번오기의 목과 독항 지방의 지도를 가져갔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컨셉은 삼국지연의에서 장송유비에게 서촉지형도를 바침으로써 주인을 바꾼다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6. 정작 조사는 생전에 아들 조괄이 장군이 된다면 필시 군대를 파멸시킬 것이라 염려했었고, 조사가 사망한 후 조괄의 어머니도 조왕(趙王)에게 조사의 말을 전하며 조괄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7. 굶다 못해 군마, 심지어 시체까지 뜯어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하니 매우 처참했을 것이다.
  8. 포위망을 뚫기 위해 일점돌파를 노린다는 발상 자체는 틀리지 않았지만(사실 당시 조군에게는 그 선택지밖에 남은 게 없었다.) 적어도 포위망이 약한 곳을 찾아서 거길 공격했어야 했는데 조괄은 그냥 냅다 병력을 꼬라박았다.
  9. 참고로 이 인간이 바로 장평대전에서 지구전으로 잘 버티고 있던 염파를 해임시키는데 한몫한 인간이다. 아주 나라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게 아닐 수 없다.
  10. 게다가 곽개는 후에 한번 더 돈 받고 망하기 직전의 조나라를 혼자서 지탱하고 있던 이목을 쫓아내버리면서 조나라를 정말로 말아먹었다.
  11. 게다가 이 때는 통일이 된 지 얼마 안 됐던 터라 진나라보다 자신의 조국에 더욱 소속감을 느끼던 때였기에 더더욱 억울한 일이었다.
  12. http://www.cnki.com.cn/Article/CJFDTotal-WENW199606004.htm%7C
  13. 명나라 시인 복여량의 시. 장평대전의 현장으로 추측되는 대규모 유골 발굴단지에 이 시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문은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