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陵君(? ~ 기원전 244)
1 소개
전국사군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은 무기(無忌). 위나라 안리왕(安釐王)의 이복동생이며 성품이 인자하고 겸손하며 선비들을 잘 대해 여러 식객들이 몰려들었다.
2 일화
어느날 안리왕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조나라 군대가 국경으로 밀려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에 안리왕은 당황했으나 신릉군은 태연히 바둑을 두며 "침략이 아닌 조왕이 사냥을 나온 것 뿐"이라고 답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였다. 안리왕이 어찌 그것을 알았는가 물으니 "제 밑에 조왕에 대해 알려주는 이가 있습니다." 스파이 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안리왕은 신릉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식객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후영(侯嬴).
신릉군은 늙은 성문지기인 후영이 현인이란 말을 듣고 많은 재물을 보냈지만 후영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신릉군은 각계 각층의 고위인사들을 초청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몸소 나서 후영을 초빙하기 위해 그를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후영이 냉큼 마차 위 귀빈석에 앉자 친히 말채찍을 잡았고, 백정 친구인 주해(朱亥)와 수다를 떠는데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기다렸다. 술자리에 도착했을때 많은 이들이 후영의 무례함에 어이없어 했지만 후영은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버릇없이 굴었지만 그것은 모두 신릉군의 덕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재물을 거절하여 직접 나를 데리러 온 행동, 그리고 주해와 수다를 떠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 긴 시간동안 떠들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소인이라 욕했겠지만, 백성들은 신릉군을 어진 이라 칭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라고 말했고 결국 신릉군의 덕망과 겸손에 탄복하여 그의 식객이 되었다.
후영은 주해도 신릉군에게 추천하였고, 신릉군은 직접 주해에게 찾아가 그에게 뜻이 같이하자 청하였다. 그러나 주해는 답례조차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아래에...
3 몸을 떨쳐 일어나 조나라를 구원하다
장평대전에서 승리한 진이 마침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 평원군은 처남인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리왕은 진비(晋鄙)를 시켜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으나 진의 협박[1]에 겁을 먹고 국경에서 진군을 멈췄다. 신릉군이 누차 안리왕을 설득했지만 이미 진에 겁을 먹은 그는 설득하는 신릉군에게 '진에게 제왕 칭호만 허락하면 군대를 무를 텐데 님은 왜 자꾸 싸우자는 거임?' 하고 되려 역정을 내는 판국이었다. 여담으로 헛된 명분을 주고 실익을 챙기겠다는 이 안이한 계책은 세객 노중련에게 조목조목 쳐발린다.[2]
결국 신릉군은 자포자기하여 식객들을 이끌고 닥돌하려고 결심했다. 그리고 좋은 계책이라도 들을까 싶어 후영을 찾았는데, 전 늙어서 못가겠으니 잘 다녀오세요는 반응이 나왔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신릉군이 허탈하게 무리를 이끌고 떠났는데 문득 '내가 후영을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는데, 아무런 계책이 없다손쳐도 사지로 가는 나를 뜯어말리지도 않는 건 뭔가 이상하다?'싶자 혼자서 후영을 찾아와 물었다. 그제서야 후영은 웃으며 계책을 알려줬다.
과거 안리왕의 애첩은 아버지를 살해당했는데, 원수를 갚아달라고 왕을 징징졸랐으나 3년이나 지나도록 원수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 원수는 다른일로 신릉군 사람과 원한과 시비가 붙은 모양인지 신릉군에게 이미 죽임을 당한 일이 과거에 있었다. 까마득한 옛일이고, 정작 신릉군은 그런 듣보잡 도적놈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후영이 그런 과거사를 지금 알려주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애첩은 신릉군을 일생일대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고, 항상 왕 곁에 있는 그녀에게 병부(兵符)[3]를 훔쳐오라고 부탁한 뒤 신릉군이 직접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구원을 가게 한 것. 그래서 그녀에게 부탁하자 당연히 ok. 결국 계획대로 병부를 훔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당시 위군을 지휘중이었던 진비가 훔쳐간 병부를 보고도 명령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 주해를 데려가 그를 해치우게 하라고 조언한다.
주해는 "지금껏 답례를 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사소한 예의 몇번으로 신릉군의 큰 배려에 답하기에는 부족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목숨을 다해 그 은혜를 갚을 때다." 라고 말하고 신릉군과 동행한다. 예상대로 끝내 진비가 명 군대 내놔 에대한 의심을 풀지 않자[4]주해가 진비를 때려죽인다. 한마디로 위나라 신릉군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왕을 속이고 위나라 장군을 죽였다(...)
참고로 후영은 신릉군을 전송하며 말하기를 “신은 늙어서 종군하지 못합니다. 날짜를 계산하여 공께서 진비의 군중에 이르는 날 북쪽을 향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겠습니다.” 했고 과연 그 날 후영이 자결했다고 한다.
4 조나라에서
결국 신릉군은 정예병 8만을 이끌고 진나라 군대를 쳐서 조를 구원했으나, 지은 죄가 있는지라 감히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눌러산다. 10년 세월을. 이 때 신릉군은 모공과 설공이라는 왠 듣보잡들을 만나려고 초빙했지만,이들이 응하지 않고 숨어살자 수소문해서 거처를 알아내고 평민으로 변장해서 의기투합하였다고 한다.그러자 평원군은 자기랑 동급인 인물이 듣보잡들이랑 놀려고 저러자 그것이 부끄러워 부인(신릉군의 동생)에게 너님 오빠 정신 나간거 아님?이라 했다.이것을 그대로 오빠에게 전하자 신릉군은 정색하면서 ㅉㅉㅉ 나랑 동급이라는 인간이 참다운 선비로 위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재를 몰라보고 듣보잡이라 욕하냐? 난 이제 저 인간이랑 안 놀려니 떠나련다.했다.이에 식겁한 평원군은 바로 신릉군을 찾아가 사과했고,이 일화를 알게 된 평원군의 식객 절반 이상이 평원군을 떠나 신릉군의 식객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조나라 망명시절 약간의 흑역사가 있었으니 이른바 봉작사건...군주의 명을 어기는 것을 개의치 않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해준 신릉군은 조나라에서 거의 특급스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위나라에 있을때나 왕 동생이고, 공자지...조에 있으니 그냥 방한칸 차지하고 있는 백수신세. 할일없이 밥만 축내며 지냈는데, 조왕과 평원군은 신릉군의 눈치를 보아 그래도 국가적 은인인데 4개의 읍을 신릉군에게 주어 작은 제후로라도 행세할 수 있게 해주자며 봉작건을 추진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식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신릉군은 후후 그럼 그렇지^^ 공이 있는 사람에게 봉작이 없을순 없지!" 하며 혼잣말로 신나했는데 이를 들은 식객이 "상타자고 우리가 일을 벌었나염? 봉작을 받으면 댓가받고 싸워준 용병일뿐 의를 위해 일어서신 대의와 명성은 땅에 떨어질텐데요. 님 실망임요 ㅉㅉ" 하고 면박을 주었다. 이에 신릉군도 잠시 놓았던 정신줄을 다잡고 식객에게 사과하였다.
5 진군을 다시 개발살내다
그리고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이 되고 장양왕(荘襄王)[5]이 즉위하면서 동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공격한다.
이에 안리왕은 부랴부랴 신릉군을 데려와 진군을 막으려 했으나, 10년동안 타향살이를 한 신릉군이 안리왕에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가 없었다. 신릉군은 위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다가 모공과 설공의 설득으로 마침내 마음을 돌리고, 상장군이 되어 제후들의 지원군을 이끌어[6] 진나라 장군 몽오를 개발살내어 함곡관까지 쫓아내버린다.
6 말년
그 뒤 진에서 신릉군을 쫓아내기 위해 예전에 살해당한 진비의 식객들을 이용하는 등 여러가지로 모함했고, 떡밥을 문 안리왕은 신릉군의 병사 통솔권을 빼앗는다. 상심한 신릉군은 주색잡기에 빠져 4년 뒤 병사했다.
이후 위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신릉군 사후 18년만에 멸망했다(...). 그래도 오래버텼다?
7 후일담
전한 고조 유방이 이 신릉군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신릉군이 죽은 뒤 나라도 멸망하고 묘지가 황폐해지자 따로 명령을 내려 돌보게 했다.[7]
유방이 제위에 오르고 난 뒤에 전국을 돌다가 신릉군의 묘지에 들렀다거나, 옛 사람을 이야기할때 이 신릉군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올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사서에 전할 정도. 실제로 이한이 지은 도덕적 양식에 대해 집필한 서적인 몽구에서는 유방이 국토를 둘러보는 중에 "아 이 근처에 신릉군의 무덤이 있었지!"하면서 일정을 바꿔서 그리고 향했다는 이야기를 전할 정도. 그래서 그런지 사기에서는 전국사군자중 유일하게 안까인다. 그래서인지 사마천도 다른 사군자들의 열전을 '맹상군열전', '평원군열전', '춘신군열전'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신릉군의 열전 제목은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이라고 붙였다.
여담으로 신릉군의 무덤은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농부가 밭을 가는 밭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이 이런 시조를 지었다.
술 먹고 노는 일을 나도 왼 줄 알건마는 신릉군 무덤 위에 밭 가는 줄 못 보신가 백 년이 역초초하니 아니 놀고 어찌하리 |
신릉군의 문객중에는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장이가 있는데, 신릉군의 문객이였다면 초한쟁패기에는 70~80 대의 어르신이다. 노익장 그 자체.
병법에도 능하였는지 식객들이 진상한 병법서들을 종합해 위공자병법이라 이름지어 냈다. 삼국지 10에서 통솔력 수치를 3 올려주는 아이템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어쩐일인지 11에서는 삭제이지만 삼국지 12에서 다시 부활.
8 미디어믹스
삼국지 12,13 |
그러다가 삼국지 12 파워업키드의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등장 능력치는 통/무/지/정이 각각 89/69/85/86으로 전체적으로 쓸만하고 전법이 조조의 고유 전법인 위무지강이다! 위무지강을 가지고 있는 무장은 조조와 위무기뿐. 그런데 위무지강은 '위나라 무제의 강함'을 뜻하는 것으로 조조 개인을 뜻하는 것이지 '위나라 무력의 강함'을 뜻하는게 아니라서 신릉군이 가지고 있기는 좀 그렇다. 물론 문자 그대로 읽으면 '위나라 무력의 강함'이 맞기는 한데(...) 일러스트에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호부(병부)인데, 위에 언급된 호부를 탈취한 일화를 나타낸 것.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과 같은데. 중신특성이 없는건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아이템이나 관직으로 90대를 커버 할 수 있으니. 90대를 찍어줘서 군사/군무/내정 어느 중신쪽이든 굴려서 활용 가능하게 만들수는 있다. 전법은 전작의 위무지강과 비슷한게 항의적으로 들렸는지. 제작사 쪽에서는 결사지휘로 바꾸었다. 특기는 상업3 / 훈련9 / 순찰6 / 인덕5 / 위풍5 / 연전8 / 공성8 / 귀모3
중국 드라마 미월전 69화에 보면 신릉군이 진나라에 사자로 가서 미월과 대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춘신군과 마찬가지로 훨씬 후대의 사람이라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은 가상의 설정이다.
- ↑ 조나라를 돕겠다고 깝치는 놈은 조 다음으로 빳따질 각오해라!
- ↑ 요약하자면 진에게 제의 칭호를 주고 자진해서 신칭을 하게 되면 명분밖에 없는 황제라 해도 일단 너님한테 죽으라고 명령하면 님 죽을거임? 그래도 황제명인데? 죽으면 병신인 것이고 안죽겠다면 군주의 명을 거스르는것, 한마디로 빼도박도 못할 불리한 위치가 된다는 말
- ↑ 옛날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한 신표. 평상시 왕과 지휘관이 반쪽씩 나눠서 보관하다가 동원령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맞춰본다. 범 모양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호부(虎符)라고도 한다.
- ↑ 진비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것이, 얼마 전까진 왕명으로 절대 조의 국경을 넘어가지말고 그냥 관망하라 엄명을 내려놓곤, 며칠 되지도 않아 이복동생이 달랑 시종 한 명 대동해와서는 수만대군의 지휘권을 넘겨달라는데...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 시황제의 아버지. 오랜 세월 위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불위 항목 참조.
- ↑ 당시 신릉군은 조나라를 넘어 나머지 제후국에서도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공자로 칭송받으며 전국구 스타였다. 그래서 신릉군이 총사령관을 맡아만 준다면 연,제,초 등의 다른나라들은 기꺼이 군사를 내어 주었다. 병사들의 사기도 높았고...여러모로 이시기가 진나라로선 흑역사
- ↑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유방이 유달리 신릉군을 좋아했던 이유가 다른 전국사군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계산적인 면보다 협객의 면모가 강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식객의 긁어 모아서 평원군을 구하러 간다던지 그 뒤에 처벌을 감수하고라도 진비를 죽이고 병권을 얻은것등을 보면 그렇듯한 추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