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國榮 (1748~1781)
1 소개
조선 영조, 정조 시대의 정치가. 최초의 세도정치로 유명하다. 자는 덕로(德老).
그리고 이 시대의 동아시아 삼국은 중국에는 화신이 있고 일본에는 다누마가, 조선에는 이 사람이었다.
2 생애
1772년 (영조 48년) 과거에 급제 후 1774년 동궁시강원의 설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측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야사(정사가 아니다)에 따르면, 홍국영이 정조의 측근이 된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이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 - 줄여서 강목 - 중 '이모비야(爾母婢也, 네 어미는 종년이다.)'라는 어구 때문에 강목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런데 세손(정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강목을 읽고 있었고, 어느날 영조가 세손에게 한 최근 어떤 책을 읽고 있냐는 질문에 세손은 아무런 생각없이 '강목을 읽고 있다'고 대답을 했다. 그 말에 영조는 대노했고, 세손(정조)은 해당 부분을 읽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다. '당연히' 영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며 내시로 하여금 동궁전에서 세손이 읽고 있던 강목을 찾아오라고 한다. 동궁전에서 근무하던 홍국영은 이 사실을 알고 낌새를 눈치채고 강목에서 문제가 되는 해당 부분만 잘라낸 후 내시에게 건네줬고, 이 내시가 받아온 '수정본'을 확인하고나서야 세손의 말을 믿게 된 영조는 정조에게 '할애비 말을 잘 듣는 기특한 세손'으로 칭찬을 하였고 이에 정조는 폐세손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동궁전에 돌아온 세손은 수소문 끝에 그 때 홍국영이 강목의 문제시 되는 부분을 잘라낸 것을 알게 되고 홍국영을 최측근으로 삼았다. |
허나 영조대에 강목을 금서로 삼은 적은 없으며[1] 세손에게 강목에 대해 질문하고 그 대답을 칭찬한 적도 있다. 게다가 영조가 한번도 질책하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이고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정조가 저렇게 어리버리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찬탈자 컴플렉스는 있었어도 무수리 태생이라는 컴플렉스는 그닥...[2]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1776년 정조의 즉위 직후 정후겸, 홍인한을 숙청할 때 그 사유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았다."와 "세손의 오른 날개, 즉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으니... 그 뿐 아니라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곧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한다. 그후로 5년을 내리 도승지로 재임하면서 도승지=홍국영을 의미하는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훈련대장도 역임하면서 구선복을 비롯하여 당시 군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던 구씨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곧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임금의 최측근으로서 이외의 여러 중요 관직들을 도맡았다. 규장각 설립 후 첫 직제학으로서 초창기 일을 도맡았다고 하니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까지 말했을 정도.[3] 덕분에 야사에는 "배따라기"라고 불리고 한중록에서는 대놓고 "광증이 있다"라고 할 정도로 못났던 아버지 홍낙춘도 덩달아 살아났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풍산 홍씨 가문에서도 홍봉한, 홍인한과 함께 세도를 누릴 수 없는 방계 쪽이었던 듯 하다.[4] 홍국영이 홍인한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도 그런 이유고.
1778년, 당시 정조에게 후사가 없자 이를 걱정한 정순왕후가 후궁 간택을 명하였는데,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는 원빈(元嬪)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중전인 효의왕후 김씨가 새파랗게 살아있는데도 '으뜸 원(元)' 자를 썼다. 원빈 홍씨의 가례는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여 치러졌고, 생전에 조정의 문안을 받는 등, 후궁으로서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원빈 홍씨는 가례를 치른 후 겨우 1년만인 1779년 숨을 거두었는데 사후 효휘궁(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 죽어서도 그 이례적인 대접은 변치 않았다. 홍국영의 몰락 후에야 후사도 낳지 못한 후궁에게 과한 대접이라 하여 1786년 인명원과 효휘궁의 이름은 혁파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게 하고 군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쳤다.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 이 일은 홍국영이 정조에게 토사구팽당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서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하고, 여동생이 사망한 뒤에는 정작 더 이상의 후궁을 들이는 것에 반대하고 양조카를 들여서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인데 이는 대놓고 홍국영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정조를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1779년(정조 3년) 정조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조보(朝報)를 받아본다거나 조정일에 관여한다면 천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요지의 사직상소를 올리고 이에 윤허받아 봉조하(奉朝賀)[5]에 제수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32살밖에 안된 젊은이가 봉조하에 제수된 기록적인 일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평소 때 임금의 총애와 그의 권세, 그리고 좌상인 그의 백부 홍낙순 등의 존재로 조정은 한동안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후 송시열의 후손이자 사림의 영수로 칭송받고 있고 홍국영의 추천으로 조정에 오른 송낙상을 비롯한 홍국영의 사람들이 32살에 사직이 웬말이냐면서 홍국영을 복귀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홍국영은 내심 흡족했다.
그런데 소론이자 역시 정조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중신 서명선은 홍국영의 전횡을 싫어하여 홍국영을 두둔하는 행보를 밟지 않았고 이에 홍낙순 이하 홍국영의 수하들과 집안사람들이 그를 맹렬히 탄핵하자 정조는 홍낙순을 내쫓고 홍국영도 귀양보내 버렸다. 그러자 가뜩이나 원한이 많던 그가 임금의 눈밖에 벗어났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까이게 된 주된 원인은 권세를 믿고 설쳐댔으며 뇌물을 받았다는 것.
처음에는 도성 바로 턱밑인 제기 (현재의 동대문구 제기동)에 그냥 버려두다시피 놓아두었으나, 반대파들의 계속되는 상소와 함께 홍국영 본인의 뉘우침없는 언행들이 임금 귀에 들어가 강원도 강릉현으로 옮겨진다. 결국 유배지 강릉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야사에 의하면 죽기 직전에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지붕 밑에 사는 굼벵이를 잡아먹고 살면서 길가던 행인들에게 걸핏하면 저 놈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둥 사실상 반쯤 미친 상태의 봉두난발 거지가 따로없었고, 오른쪽 눈 안에는 큰 점이 나 있어서 마치 눈동자가 3개로 보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야사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갑작스런 몰락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고, 이것이 병으로 이어져 요절한 모양.
그의 사후에 그의 사람이었던 훈련대장 구선복 등의 역모가 적발되었고 상계군 이담도 반역죄가 적용되면서 풍산 홍씨는 그야말로 개발살나고 만다.
사도세자의 정실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한중록』에 의하면, 여동생 원빈 홍씨가 죽자 그 배후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를 의심하여 그녀와 대립했다고 한다.[6]
그의 몰락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그가 처음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의 기록에 의해 정조의 뜻이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야사에는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던게 들통나서 쫓겨났다고 알려졌고, 정조가 그를 어쩔 수 없이 쫓아 보냈다고 했지만 이건 유명한 이야기임에도 근거 없는 이야기이고, 도리어 그의 세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구조는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홍국영의 세도가 강할 시기에도 그는 어디까지나 왕의 제어 하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3 여담
얼굴이 미남이었다고 한다. 혜경궁의 한중록에도 얼굴이 잘 생겼다는 언급이 있고, 심낙수의 '은파산고(恩坡散稿)'라는 기록에도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얼굴 생김새가 준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혜경궁은 홍국영을 대단히 싫어해서 한중록을 보면 홍국영에 대해 실컷 욕해 놓았으며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결론지었다.[7] 혜경궁뿐만 아니라 홍인한 역시 "우리 가문에서 저런 망령된 물건(妄物)이 나올 줄이야. 저놈이 우리 가문을 망칠 놈이다"라고 한탄했으며 형 홍봉한에게도 홍국영을 두고 "이 미친 놈(狂兒)에게 어찌 벼슬을 주어 등용하라고 하십니까?"라고 징징댄 적도 있다고 한다.[8] 하지만 홍국영에게 원한을 가질 법한 풍산 홍씨 사람이 아닌 홍대용(남양 홍씨다)의 계방일기 같은 것을 보아도 심하게 촐싹거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세손이 공부가 지겨워서 홍대용을 비롯한 스승들에게 "나중에 마저 복습할게요" 라고 하자 옆에서 "저하께서 지금 하기 싫어하는데 어찌 나중에 하시겠습니까?" 라고 하는 장면이라던가. 홍대용은 그 자리에서 홍국영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세손은 오히려 홍국영이 바른 말을 하는 것이라며 그를 감싼다.
또한 심낙수의 기록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시정잡배들과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시거나 장기를 두었으며 시조와 창을 잘했다고 한다. 당시 한양에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또한 가자'라는 창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을 정도였다.
4 창작물에서
4.1 사극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내지는 세도정치를 할뻔했다는 오명으로 평은 좋지 않으나 80년대 이후 재평가되는 분위기. 영조와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감초처럼 등장한다. 좋게만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여러 가지로 각색하기 매력적인 요소를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와 함께 이상을 펼치려 했다가 타락 했다는 전개가 자주 등장한다.
90년대 초반 조선일보에 연재된 유현종 원작의 역사소설 《사설 정감록》은 정여립 반란 사건과 홍국영의 조상이 얽혀 있고 그 증거인 죽간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조합한 작품인데…… 심심하면 나오는 나체고문과 검열삭제 장면으로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 작품을 극화한 것이 KBS 1TV 에서 1990년대 초반에 방영한 《왕도》인데, 김영철이 홍국영, 강석우가 정조로 나왔다. 검열삭제 부분은 당연히 안 나오고 원작을 가장 잘 구현한 작품으로 김영철의 열연을 볼수 있는 작품이지만 방영 당시 그다지 인기는 없었고 홍국영을 너무 미화했다고 사극 속 역사 왜곡으로 까던 사학자의 책도 당시 나온 바 있다. 이 드라마 마지막회에서 유배지에서 정조 임금이 찾아오는 환상[9]을 보며 홍국영이 기뻐하면서 '전하! 오셨군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고 유언을 남기며 그대로 숨을 거두고 지인이 슬퍼하는 마무리로 끝난다.
2001년 MBC의 사극《홍국영》[10]에선 (훗날 대왕 세종의 세종을 맡은) 김상경이 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사극인데도 지나치게 현대적 분위기에다 자주 삽입되는 ‘무협장면’도 극의 사실성을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결과 동시간대 SBS 여인천하로 인한 시청률 저조(4~5%대) 탓인지 40부작만에 조기종영되었다.
2008년《이산(드라마)》에서는 한상진이 홍국영 역을 맡아 방영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조의 세손 시절 때부터 온갖 위기를 이겨내는 대담한 책사로 대활약하다가, 정조 즉위 후에는 자기 권력 강화에 집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 워낙 정조의 고생이 심한지라 이를 극복하는 조력자인 홍국영의 활약도 엄청난 편. 전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홍국영 루트를 따라가지만, 마지막에 자신이 정조를 배신했다는 것에 대해 참회한다는 점이 차이점. 혜경궁 홍씨가 홍국영에게 매우 우호적이라는 점도 역사와는 큰 차이다.
드라마인 무사 백동수에서는 양초립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본래 이름인 홍국영으로 돌아갔다.
2014년작 영화 역린에서는 신세계(영화)에서 카리스마적인 연기를 선보인 박성웅이 홍국영 역을 맡았다. 그 덕에 네티즌들이 올리는 네이버 영화의 역린 명대사에는 "살려는 드릴게"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영조대왕님도 네가 제낀 거지?", "칼춤 한번 제대로 쳐줄게"등이 최다 추천을 받고 있다.
4.2 만화
만화인 야뇌 백동수에서도 등장.
주인공인 백동수와 동기였지만 무술을 포기하고 과거시험을 치른다. 무술도 나름 괜찮고 한번 본 필체를 단숨에 베껴내는 등 천재기질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인데 어째 외모가 어떤 만화의 신세계의 신을 닮았다.- ↑ 금서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치통감강목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주자가 '강(綱)과 '목'(目)이라는 항목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책인데, 조선 사회에서 자치통감과 주자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 위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사실 해당 표현은 사기「노중련전」에 나오는 말로 전국시대 제나라 위왕이 이름뿐인 천자를 질차하며(꾸짖으며) 한 말이다.
- ↑ 아예 없다고 하기는 그런게 동시대 인물 채제공의 <번암집>에 위의 야사와 비슷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조가 말년에 항상 홍문관의 한림과 주서를 시켜서 옛 책을 소리 내어 읽게 하여 듣곤 했다. 어느 날 승지가 먼저 읽고 다음에 겸춘추가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다음 부분이 바로 「노중련전」이었다. 겸춘추가 “질차하며” 다음 문제의 이모비야 네 자를 읽자, 잠을 자던 영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일어나 화내어 말하길, “어떻게 차마 내 앞에서 그것을 읽는단 말인가. 읽은 놈이 누구냐?” 겸춘추는 읽기를 멈추고,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당시에 세손으로 있던 정조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얼른 대답하였다. “신이 내내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그 4자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읽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정녕코 내가 들었는데, 신료들이 듣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여러 신하는 세손의 대답을 따라서 한결같이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조의 안색이 조금 풀려서 다시 침상에 누웠고 신하들도 물러 나왔다. 그 직후 채제공이 정조의 아량을 극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 ↑ 홍국영이 쫓겨나고 당시 홍국영이 관여했던 기록들은 대부분 삭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종수는 정조를 보좌하며 홍국영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가 정조가 홍국영을 숙청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 홍인한과 홍국영은 6대조가 같은 10촌 할아버지 손자뻘 관계다.
- ↑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관품) 이상의 고위관리가 퇴직시에 받는 명예직으로 실제 정사는 보지 않고 예식 등에만 참여하였다. 현직보다는 적지만 녹봉도 지급된다.
- ↑ 드라마《이산》에서는 이 부분을 따와 원빈 사후 효의왕후와 홍국영이 대립관계가 되는 걸로 그렸다.
- ↑ 혜경궁이 홍국영을 욕하기 위해 쓴 말이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않았고 상당히 담대한 성격이었다는 의미도 된다.
- ↑ 그런데 하필 이 내용을 적은 편지가 홍국영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홍인한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한 것 뿐 아니라 세손 시절 그를 살해하려 한 전력까지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즉위할 경우 홍국영에 의해 제일 먼저 죽을 것이 확실시되었고 당연히 정조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국영에 의해 체포+유배=사사크리, 홍봉한도 같은 해에 귀양갔지만 사사되지는 않고 풀려났다.
- ↑ 사실 유배지로 찾아온 지인을 잘못 본 거다
- ↑ 이재갑 연출, 대왕의 길의 임충 극본. 최불암이 영조, 정재곤이 정조, 정웅인이 정후겸이라는 지금시점에서는 후덜덜한 배역을 자랑했다. 크레딧에서는 역시《사설 정감록》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지만 원작과 관련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