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군

平原君

중국 전국시대 전국사군자중 두번째로 알려진 인물.

나라의 부흥을 이끌었던 조무령왕의 아들로 이름은 조승(趙勝)이다.

맹상군과 마찬가지로 식객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으며, 평원군으로 봉해지기 전까지 호칭은 공자 승이었다.

적극적인 정벌을 벌이며 한창 조나라 세력을 키우던 조무령왕은 첩으로 들였던 맹요에게 빠져 맹요의 아들인 하를 태자로 세웠다. 이후 조무령왕이 왕위를 일찍 내려두고 주부(主父)라는 직위를 신설해 그 위치에 올라 태생인 혜문왕을 먼저 세우고는[1] 섭정을 했다. 그런데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조혜문왕에게, 다른 하나는 정실 태생 공자 장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한다.

이 일로 아들중 가장 똑똑한 조승을 불러 의견을 물었는데, 조승은 '(晉)'이 둘로 나눠진 일[2]나라 정장공(鄭莊公) 희오생(姬午生)이 동생을 죽인 일[3]을 빗대어 내전의 씨앗 밖에 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기미를 읽은 불만 세력이 공자 장과 모의를 하고 결국 조나라에선 내란이 터진다. 조무령왕은 제환공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고[4], 조혜문왕의 승리로 난이 끝난다.

혜문왕은 혜안을 갖고 자신을 지지해준 이복형제 조승에게 평원땅을 주고 평원군에 봉하자, 평원군은 식객을 더욱 모으는데[5] 주력하였다.

하루는 식객중에 절름발이가 길을 가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격분한 식객은 애첩을 죽여달라 강요부탁해서 애첩을 베어주겠다고 말로만 했다. 그리고는 뒤로 가서는 "비웃었다고 사람을 죽여? 이상한 놈이군."이라면서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식객들이 하나둘씩 곁을 떠나자 결국 애첩을 죽여 떠나간 식객들을 다시 붙잡았다. 식객들이 떠난 이유는 애첩을 베지 않아서 떠난게 아니라 평원군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떠났던 것이다. 애초에 그런 약속을 하지 말았으면 될 것을.. 체면 때문에 멀쩡한 마누라 죽여주겠다는 약속한 이 양반이나. 비웃었다고 사람 죽여달라고 한 그 식객이나.. 어쨌든 현대 기준으로는 둘 다 정상은 아닌듯 더러운 인명경시

이 일이 진나라에 알려져 진소양왕은 평원군을 부르려 했는데, 마침 주변에서 맹상군이 더욱 뛰어나다 귀뜸하자 맹상군을 불렀다. 덕분에 애먼 맹상군이 진나라에 붙잡혀 곤욕을 치룰 뻔 했기 때문에 이게 다 평원군 때문이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듯.

조나라 노래에 "제나라에 맹상군이 있으면 조나라엔 평원군이 있다."고 할 정도니 그를 맹상군 다음가는 전국사군자로 꼽는 사람도 제법 많은 편이다.[6] 다만 어디까지나 고국인 안에서의 평가가 이렇다는 거고, 실제적인 평가나 각종 사서등 후대의 평가에서는 전국사군자중 평가가 낮은 편이다.

다만 위의 절름발이의 사건이나 후에 조의 수도가 진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기가족의 안위를 우선하여 이에 대해 수도의 전사(傳舍)를 관리하던 사람의 아들이었던 이동(李同)이 자기 가족과 첩을 고기가 물리게 먹고 비단 옷을 해입는 것을 지적한 일처럼 귀족출신이라서 그런지 남에게 무신경한 면도 있다.

그래도 이동이 수도가 망하면 당신도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라고 충고하며 일족의 향락이 아니라 적을 물리칠것을 권하자 결사대 3천명을 조직하여 진나라의 포위를 풀어내는 업적을 이뤄냈다.

결론적으로 좀 귀족적인 성향이 강하지만 인물이지만 옳은 충고에 대해서는 받아들일수 있는 융통성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충실한 개념있는 사람. 무령왕과 혜문왕 이후 몹쓸 왕들이 넘쳐나던 위기의 시기에 왕이 되었으면 조나라에 복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조나라의 위치가 진나라 바로 옆 동네였기 때문에 진나라와 매번 전쟁을 했지만, 인상여, 염파, 조사와 함께 조나라 사군의 일원으로 적절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장평대전 이전까지 나라가 제법 안정되었으며 이 같은 공적을 의심하는 사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하지만 백기를 투입해 집중적으로 을 공략해 병합하고 있던 의 파상공세 전략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합병해 장평대전으로 를 몰락시킨 것도 엄연한 사실. 사마천평원군을 가리켜 "귀공자였다."라고 평했는데, 이는 그의 안목등을 은근히 비꼰것이다.[7] 사실 사서에 기록된 것만 봐도 그다지 틀린말은 아니고 훗날 귀족적인 면을 과시하다 신릉군과 제대로 비교가 되면서 자신의 평판을 깎아먹게 된다.[8]게다가 장평대전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대국적 안목이 상당히 부족한 면모도 보인것을 감안하면 사마천의 평가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장평대전과 신릉군을 비웃은 일로 평원군의 식객은 결국 절반 이상이 떠났다. 그 숫자만큼 신릉군의 식객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같은 전국사군자중 한명인 신릉군의 누이와 결혼한 매부 처남 관계였고,둘의 사이 역시 돈독했다. 나중에 맹상군과 신릉군 사이의 친교를 맺어주기도 했다.

평원군 밑의 식객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모수로, 장평대전 이후 멸망의 문턱까지 밟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와 초나라의 새로운 동맹을 말 한마디에 끝내버렸다. 본래 평원군은 무에서 뛰어난 인물 10명과 문에서 뛰어난 인물 10명을 뽑아 참모로 쓰려고 했으나 마지막 인원이 채워지지 않아 식객 모수가 스스로를 천거하면서 "주머니의 송곳은 언젠가는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 나를 주머니에 넣어달라!"는 말로 평원군을 설득하여 20명의 인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주머니속 송곳을 비유한 고사성어 낭중지추와 보잘것없는 식객인 모수가 주인의 어려움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스스로 추천하였다 하여 모수자천이란 말이 생겨났다.

이 밖에도 평원군과 관련된 고사성어는 삼국동맹을 위해 초나라에 갔을 때 '조나라가 멸망하면 다음은 위나라와 초나라 차례'라는 뜻으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이 있다(순망치한의 원조는 나라의 궁지기). 하지만 평원군이 아무리 순망치한 드립을 쳐도 소용없다가 상술한 모수가 한마디하고 나서야 효과를 봤다는 게 함정.

그의 후손들은 무성(武成)에 봉해졌기에 이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지 12,13

삼국지 12의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등장. 74/63/80/77로 전법은 전법봉인

삼국지 13에서도 등장. 스텟은 전작과 같다. 전법은 문관과 어울리지 않게 맹장돌격 무슨 지꺼리야. 특기는 농업5 / 훈련7 / 순찰6 / 설파8 / 교섭4 / 언변2 / 인덕1 / 위풍4 / 신속3 특이하게도. 고대무장 주제에 인연이 조옹과 연동이 되어있는게 아이러니하다.

  1. 장자인 공자 장(章)을 폐했다.
  2. 진목후(晉穆侯)의 맏아들은 군위를 계승한 뒤 동생에게 당시 진나라 영토의 반에 육박하는 곡옥땅을 영지로 봉했는데, 후대에 이 곡옥이 커지면서 도리어 수도를 병탄해 버렸다.
  3. 춘추오패의 롤모델이나 다름없는 유능한 군주. 어머니가 동생 단(段)을 편애해서 정장공을 끌어내리고 대신 단을 군위에 앉히려 했다. 정장공은 짐짓 단에게 영지를 주고 세력을 키워줘 모반을 유도한 뒤 잡아죽였다. 그 기간이 20년이었다. 이 때문에 천하의 간웅으로 부르는 이도 많다.
  4. 유폐당해 굶어죽었다.
  5. 일설에 식객 3000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6. 당시 조나라에 유행하던 노래에 齊孟嘗 趙平原이라는 동요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에서 따와 고문진보에서는 齊有孟嘗 趙有平原 楚有春申 魏有信陵 此四君者皆名智而忠信 寬厚而愛人 尊賢重士라고 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
  7. 귀족적이며 귀공자의 풍모가 있으니 좋은 말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이 시대와 잘 맞지 않고 안목이 국가 지도부가 되기에는 짧다는 것을 은연히 비판한 것이다.
  8. 평원군의 부인은 신릉군의 누이였는데, 평원군의 판단미스로 장평대전이 터지고 가 처참히 패배하면서 한단은 함락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때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찡찡거려 의 군대를 격파하고 신릉군에 머물게 되는데 그동안 재야인사들과 교류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평원군은 그것을 보고 천한것들과 어울린다며 부끄러워했고, 이에 화가난 신릉군를 떠나려 하자 부랴부랴 만류했다. 이 사건이 알려진 이후 평원군의 평판은 대폭 하강하게 된다. 그리고 평원군의 식객들 중 과반수가 신릉군의 식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