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간스포츠에서 열고 농심그룹에서 후원하는 바둑대회.
정식 명칭은 농심辛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1]
2 대회 개요
2.1 한국의 대표 선발
한국은 선발전을 통해 네 명을 정하고, 남은 한 명은 와일드카드로 선정한다. 양궁과 비슷하게, 상위권 기사들도 이 선발전을 통과하기는 어렵다. 이창호 九단도 선발전에서 아깝게 탈락한 다음 와일드카드로 출전하는 경우가 대다수[2]이며, 이세돌 九단의 경우도 선발전에서 여러 번 탈락하였는데 와일드카드로 이창호 九단이 선정되어 대표로 출전하지 않은 적은 대표 선발전을 통과한 10회와 12회 뿐이다.[3]
사실 농심배 대표 선발전에서 상위권 기사가 줄줄히 하위권 기사한테 발목잡혀서 탈락하는 경우가 유독 많은데, 그렇게 대표로 출전한 기사들이 그다지 좋은 성적을 못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바둑팬들 입장에서는 답답하면서도, 이창호가 끝판왕으로 출전해 대회를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다보니 뭐라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2.2 대회 진행
한, 중, 일 3국에서 5명씩의 기사가 출전하여, 추첨을 통해 첫번째 대진을 결정한 다음 그 대국의 승리자가 다른 나라의 선수와 싸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4]
이 대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하이트진로배가 97년 5회 대회[5]를 마지막으로 중단된 후, 2000년[6]에 농심의 후원으로 이름을 바꾼후 같은 방식으로 부활하여 다시 개최 되었다.
참고로, 3개 국가의 5명 대표 모두 출전하기 때문에 총 대국 수는 14국이 되는데, 14일에 걸쳐서 한번에 두는 것이 아니라 3개의 라운드에 나누어 대국을 하게 된다. 대락 10월경에 베이징에서 1라운드, 12월 경에 부산에서 2라운드, 2월 경에 상하이에서 3라운드가 치뤄지며, 1라운드와 3라운드는 4국, 2라운드는 6국을 둔다. 농심배 대회소개 참조
농심배의 총 전적은 한국 우승 10회, 중국 우승 4회[7], 일본 우승 1회[8].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이전의 진로배에서 한국이 5회 모두 우승한 것에 이어 한국 바둑의 단체전 강세를 볼 수 있는 대회이다.
...그러나 사실...
3 그 실체는 이렇습니다
이 바둑대회의 정체는 세 나라의 기사들이 반상의 혈투를 벌이다가 이창호가 이기는 대회였다. 이창호 九단의 농심배 총 전적은 19승 3패(...)로[9], 10번의 우승 가운데 이창호가 대장으로 나서서 대회를 마무리한 경우도 8번이나 된다. 나머지 두 번은 10회 대회의 이세돌(막판 2연승)과 12회 대회의 최철한(막판 4연승).[10]
특히 혼자 남은 상황에서 5연승으로 우승을 달성한 6회 대회는 백미중 백미. 이 때가 바둑팬들에게 종종 회자되는 상하이 대첩이다. 한국 대표 4명이 고작 1승(최철한)에 그쳤기 때문에 2라운드 마지막부터 출진하게 되어버렸다. 사실 2라운드 1승 후, 3라운드의 4연전을 앞두고 이창호의 컨디션이 문제였는데, 제 9회 LG배 4강전에서 평소에 압도하고 있던(이창호 기준 11승 1패) 위빈 九단에게 패배하였고, 국수전마저 최철한에게 0:3으로 패배하여 타이틀을 얻지 못하였다. 한국 바둑팬들조차 이창호의 승리를 쉽게 낙관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창호 九단의 경우 와일드 카드로 출전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대국은 중국의 왕시vs이창호 였는데, 당시 생중계를 하던 김성룡은 '검토실의 중국기사들은 우승을 포기하고 편한 마음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해설은 지금도 한국기원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대국에서 이창호는 완벽한 판짜기를 통해 승리. 한국 대표로 출전했던 나머지 선수들의 총 전적은 이창호의 전적을 제외하면 5할 정도의 승률에 불과하며, 이는 중국 팀의 전체 승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마저도 가끔씩 선발전을 통과했던 상위권 기사들이 대부분의 승을 차지하고 있다. 이후 이민진이 농심배와 똑같은 방식으로 치뤄지는 여자바둑 국가대항전인 정관장배[11]에서 이창호와 동일한 상황에서(나머지 4명의 한국 대표가 1승밖에 못하여 2라운드부터 출전) 5연승을 거둠으로써 광저우에서 최종 승리를 결정짓자 제 2의 상하이 대첩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응답하라 1988에서 최택 6단이 혼자 남은 벼랑 끝에서 5연승을 거두며 대회 패권을 차지한 에피소드는 바로 이 대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신문에 실린 기보를 그대로 재현하기도 했고 대국장으로 홀로 들어오던 이창호의 모습도 그대로 재현됐다. 디테일한 고증이 제대로 구현된 셈. 다만 이창호 9단의 이른바 '상하이 대첩'은 2005년 대회이며, 1988년은 그 때까지 세계대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다가 최초의 국제기전인 응씨배가 막 생겼던 시기이므로 1988년에 단체전인 국제기전에서 5연승을 거두는 것은 고증오류라고도 할 수 있다. 응씨배에서 우승한 조훈현 9단이 국민적 영웅이 되어 카퍼레이드까지 했던 것이 바로 1988년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팬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창호 9단도 나이는 어쩔 수 없어서, 13회 대회에서는 최종전에 나온 이창호 九단이 중국의 씨에허 九단에게 패하며 우승컵을 중국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로써 4연속 우승에다가 통산 11번째 우승을 노리던 한국은 다음 기회로 넘겨야 했으며, 중국은 주장 씨에허 九단의 3연승에 힘입어 9회 대회에 이어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4 역대 대회일람
제1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2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3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4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12]
제7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8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9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0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1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2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3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4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제17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5 그 외
기사들에게나 일반인 팬들에게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대회이다. 아마도 세계기전 가운데 10년 가까이 유일한 단체전이었고 지금에 와서도 단 둘뿐인 단체전[13][14]이기 때문에 대표로 선발된 기사들은 국가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고 한다. 신예 기사의 경우는 이 대회를 통해 주목 받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15] 또, 후원사가 농심그룹이다보니, 대국 하는 기사들에게나 검토실에 있는 기사들에게나 먹을거리가 아주 많이 제공된다고.
6 트리비아
- 12회 대회는 4번째 선수로 나선 최철한 九단의 4연승으로 한국이 우승하게 되어 이창호 九단이 출전하지 않고 우승한 2번째 대회가 되었으며[16], 총 10회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 13회 대회에 선발전에서 국내 랭킹 1위인 최강자 이세돌 九단이 탈락하는 바람에 스폰서인 농심에서 뽑는 와일드 카드로 이세돌을 뽑느냐 올해 들어 부진하지만 농심배에서는 막강 포스인 이창호 九단(선발전 당시 국내 랭킹 8위)을 뽑느냐가 화제가 되었다. 결국은 농심은 와일드 카드로 이창호 九단을 선택하였다.[17][18]
- 일본의 경우 7회 우승한 이후 농심배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19] 13회 대회에서 일본 대표는 1승조차 거두지 못하고 2라운드만에 전원 탈락하고 만다. 그리고 14회 대회 때는 1승만을 거두고 역시 2라운드만에 전원 탈락하였다. 그 후 15회 대회에서도 1승을 거두는 데 그쳤지만, 16회 대회에 와서 3승을 거두게 된다.
- ↑ 후원사는 이름을 '辛라면배 ~'로 짓고 싶어했지만 한국바둑계는 '농심배 ~'를 바랐고, 결국 둘 다 썼다 - 이름에서 辛을 유독 크게 쓴다.
- ↑ 밑에 언급될 상하이 대첩을 이룩한 6회와, 9회~13회에 와일드 카드로 출전하였다.
- ↑ 어째서 이창호 九단이 계속 와일드 카드로 출전하였었는지는 대회의 실체를 보다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 ↑ 첫번째 대국이 한vs중전이고, 이 대국에서 한국 기사가 승리했다면 다음 대국은 한vs일. 이런 식이다. 한때 '승발전'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연승전'이라고 한다.
- ↑ 서봉수 九단의 단체전 9연승이 나왔던 그 대회
- ↑ 대회 시작은 1999년.
- ↑ 9회, 13회, 15회, 16회
- ↑ 7회
- ↑ 이 패배 수는 한국이 농심배를 우승하지 못한 횟수와 일치한다.
그리고 처음 두 번은 우연이겠지만 조한승 九단이 대표로 참가했다승리는 모두 대장으로 출전하였을 때 중국과 일본의 에이스를 상대로 올린 성적들이다.(패배의 경우 9회 대회 때 한번 부장으로 출전하였다가 패배) 이상하게도, 대표로 참가한 한국 선수들은 부진하는 경향이 많아 이창호가 대장으로 나와 연승을 거두어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가히 본격 이창호를 이겨라 대회 - ↑ 1회 2연승, 2회 1승, 3회 2연승, 4회 2연승, 5회 2연승, 6회 5연승, 8회 2연승, 11회 3연승이다. 조금만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승수를 다 합친게 이창호 九단이 농심배에서 거둔 19승이다.
- ↑ 이후 '황룡사쌍등배'로 바뀌었다.
- ↑ 이 대회가 바로 바둑역사에 길이남은 상하이 대첩이다.
- ↑ 게다가 연승전 방식이다. 2008년의 세계마인드스포츠나, 2010년의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경우는 연승전이 아니라 다섯 대국이 동시에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 ↑ 2011년에 중국이 초상부동산배를 신설하면서 세계대회 단체전은 둘로 늘어나게 되었다.
- ↑ 대회의 특성상 신예기사는 대부분 초반에 출전하게 되는데, 이 때 연승을 올린다면 주목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한국에서 정상급의 기사로 분류되는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군대) 등이 모두 저단 시절에 이 대회에서 3~4연승을 올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 ↑ 참고로 이세돌 九단이 대표로 참가할 때마다 이렇게 끝났다.
- ↑ 이세돌 九단은 농심배 와일드카드로 선발되는것을 계속 고사해왔었다.
- ↑ 이창호 九단의 경우 9회부터 13회까지 전부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었는데, 13회 대회에 우승을 하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14회 때는 와일드카드를 고사하였고, 결국 14회 대회의 와일드 카드로는 박정환 九단이 지목되었다. 그리고 박정환 九단은 14회 대회를 대장으로 출전해 2연승으로 마무리짓고 한국에 우승을 안겨준다.
- ↑ 사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일본의 세계대회 우승이 없어졌다가 최근 이야마 유타가 마이너 세계대회인 TV바둑최강전에서 우승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