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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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훈
朴永訓 / Park Yeong-hun
300px
직업바둑기사
소속한국기원
생년월일1985년 4월 1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학력충암고등학교 졸업
입단1999년
단급九단
별명어린왕자[1], 소신산(小神算),
뉴신산(New神算), 大朴[2]
타이젬바둑 닉네임철이(P)

1 개요

한국 바둑의 정상급 기사[3]. 2016년 1월 기준으로 한국 기사 순위 2위. 한국기원에 따르면 5년 반 만에 오른 2등이라고 한다.
최철한 九단과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일단 국제대회 우승, 준우승 기록은 박영훈이 더 많다. 국제대회 승률은 모두 60%대. 2000년대 초반에는 최철한이 약간 우위였지만, 06~09년은 박영훈의 절대우위(최철한은 응씨배 준우승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10년도 이후는 최철한이 다시 성적에서 앞서나가고 있다. 그런데 또 상대전적은 박영훈이 앞선다(박영훈 기준 16승 14패). 이러나저러나 이창호 이세돌은 넘사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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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훈 九단 한국바둑리그 세리머니

2 입단하기까지

서너살 때부터 숫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 이유 없이 1부터 1000까지 재미삼아 쓴다거나, 지하철을 타면 구간별 덧셈을 한다거나, 전화번호부를 펴서 무작위로 숫자를 더한다거나, 식당 차림표의 가격 합계를 구한다거나. 아마추어 5단의 기력이었던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 아들이 바둑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 바둑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4] 이후 박영훈은 혹독한 교육을 받게 된다. 자신의 기력보다 높은 문제를 못 푸는 날은 잠도 못 잘 정도였다고.[5]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었는지, 1997년에 전국아마십강전에서 우승[6]하고 1998년에는 전국규모 아마대회에서 4관왕을 차지한다. (학초배, 아마유단자대회, 삼성화재배 아마바둑오픈, 하이텔배) 이 즈음해서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성격상 연구생 생활이 맞지 않았는지 2년만에 연구생을 그만두고 최규병 九단, 유창혁 九단 문하에서 바둑을 배우게 된다.

1999년, 여덟 번 탈락하고, 아홉 번째 도전한 입단대회에서 드디어 입단.

3 기풍

세계 최강의 형세판단과 끝내기를 주무기로 한 선실리 후타개형의 기풍. 하지만 2009년이 되면서 두터움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최철한은 박영훈의 기풍을 '한번 말려들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바둑'이라고 평가했다. 이세돌 또한 2008년 박영훈과의 삼성화재배 결승을 앞두고, "박영훈의 끝내기에 두려움을 느낀다"라고 언급하기도.
형세판단과 끝내기가 가장 강하다는 점에서 이창호와 가장 닮은 기사이며, 그런 점에서 혹자는 이창호의 정통 후계자를 박영훈으로 정의하기도 한다.[7] 예전에는 조훈현 九단에게 형세를 물으면 '아이고 난 몰라, 창호한테 물어봐'라고 했다면 최근에는 바둑의 형세가 아주 미세하게 흘러가면 '영훈이 형 어디 갔지?'라는 말이 바둑기사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8] 특히 불리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끝내기 수순을 조금 비틀어 이득을 보는 솜씨가 탁월하다고 한다. 계산력이 약하면 당한 줄도 모른 채 당하는 것.
다만 이창호가 '실리지향의 두터움'을 중시한다면, 박영훈은 입단 이후로 '실리를 밝히는 경향'이 심하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았다. 이것이 박영훈의 장점이자 단점.[9] 그러나 이것은 저단 시절의 이야기이고, 요즘은 두터움에서 전투로 이어지는 바둑도 잘 보여준다.
아무래도 종반에 강한 기풍이다 보니 초반의 포석-중반의 전투에서 망한 바둑을 대역전시키는 기적을 종종 일으키기도 한다.

박영훈 9단은 이시다 요시오 9단의 전성기에 버금가는 컴퓨터 바둑이다. 바둑판을 보는 순간 1/16집 단위(권리)의 세밀한 계가를 하며, 다른 기사들이 돌의 모양으로 집을 판단하는 것에 비해 박영훈 9단은 바둑판에 돌로 만들어진 직선을 그어서 절단한 절단면의 넓이로 집을 센다. 박영훈 9단이 판단하기에 바둑판을 자른 절단면의 넓이가 약간이라도 넓은 쪽이 이긴다고 판단하는 것. 그리고 경마장에 가서도(박영훈 9단은 취미가 경마다) 시끄러운 와중에 바둑판을 깔고 그 해 있던 모든 프로바둑 대국의 수순을 복기할 수 있는 경악할 정도의 학습량을 가지고 있다. 다른 기사와 다른 집계산방식과 미칠듯한 학습량으로 나타나는 계산력으로 깔아뭉개는 방식. 그래서 전투 99% 여류 바둑기사들의 안티테제에 가까운 기사이다. 수읽기는 뛰어나나 계산과 대국관에 약한 여류기사들이 박영훈 9단한테 배우기 매우 힘들어한다고. 대신에 훈수나 해설 해달라고 하기는 엄청 좋다.(...) 2016년에 바둑 캐스터(아마추어 고단수)들을 모아놓은 대회에서 이소용 캐스터는 전화찬스 기회가 오자 자기 남편을 쌩까고 박영훈 9단한테 형세랑 수를 봐달라고 했다.(...)

바둑TV 등에서도 박영훈 9단한테 해설 해달라고 한 적은 많으나 박영훈 9단 본인이 고사한다고. 현역 초일류 기사 중에서는 이세돌 9단 정도만 해설도 적극적으로 하니까 특이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박영훈 9단처럼 다른 초일류 현역 기사인 강동윤, 박정환, 김지석 9단, 이동훈 8단, 나현 7단이나 신진서 6단 등은 바둑 해설을 안 한다. 즉 특이할 건 없다는 얘기.

4 주요 커리어

1999년 입단
2001년 천원전 우승(vs윤성현)[10]
2002년 농심신라면배 4연승[11]
2003년 삼성화재배 준우승(vs조치훈)[12]
2004년 후지쯔배 우승(vs요다 노리모토)[13], LG정유배 준우승(vs이창호)
2005년 중환배 우승(vs왕리청), 기성전 우승(vs최철한), 한국바둑리그 다승왕 & MVP
2006년 십단전 준우승(vs이창호), 기성전 2연패(vs안조영)
2007년 후지쯔배 우승(vs이창호), 농심신라면배 4연승(vs펑첸, 다카오 신지, 천야오예, 요다 노리모토), 기성전 3연패(vs최철한), GS칼텍스배 우승(vs이세돌)
2008년 삼성화재배 준우승(vs이세돌), 기성전 4연패(vs백홍석)[14], 맥심커피배 우승(vs목진석), GS칼텍스배 2연패(vs원성진)
2009년 맥심커피배 준우승(vs최철한), GS칼텍스배 준우승(vs조한승)[15], 한국바둑리그 우승
2010년 명인전 우승(vs원성진)
2011년 맥심커피배 우승(vs이창호), 명인전 2연패(vs백홍석), GS칼텍스배 준우승(vs박정환)
2013년 천원전 우승(vs 최철한)

세계대회 본선 115전 73승[16] 41패 승률 64.0% [17] (2011년 1월 19일 현재)

통산 전적 901전 618승 283패 승률 69% (2011년 12월 20일 현재)

통산 타이틀 획득수 18개

4.1 평가

지금까지의 성적을 바탕으로, 전체 커리어를 크게 세 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1999년 ~ 2002년 : 주목받는 신예
이 시기에 이세돌, 최철한, 송태곤과 함께 주목받는 신예 4인방으로 등장하였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세계대회 성적은 내지 못하였다.

2003년 ~ 2008년 : 이창호와 이세돌의 뒤를 잇는 한국 바둑의 No.3
이창호/이세돌 兩李의 뒤를 받쳐줄 기사가 필요하던 한국 바둑계에서, 최정상급 기사로 자리매김한 시기이다.
앞서 언급한 신예 4인방 가운데 송태곤은 03년 후지쯔배 준우승, 04년 응씨배 4강 이후로 몰락하였고, '황소 삼총사' 가운데 최철한은 05년 응씨배 준우승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으며 원성진은 국제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던 시기에 박영훈은 세계대회 우승 3회, 준우승 2회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당시 커리어가 말해주듯이 이창호와 이세돌을 제외하고, 최철한과 함께 세계대회 우승을 기대해볼 만한 몇 안되는 기사였다.[18] 일본 기사들은 거의 양민학살 수준으로 이기고, 중국 기사들에게도 60%정도의 승률은 거두고 있었다. 이세돌의 천적이라는 씨에허가 지금까지도 박영훈에게는 상대전적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영훈을 08년 당시 초일류 기사 그룹(이창호, 이세돌, 구리, 콩지에...)으로 분류하기는 뭣한 것이, 저 네명에게 상대전적에서 모두 밀리고 있다.[19] 그 말은, 세계대회 32강, 16강에서 양민학살을 하며 올라가 놓고서는 8강 혹은 4강에서 이세돌이나 콩지에를 만나 탈락하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1회전부터 만나면 광탈 국제기전 커리어를 늘리고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저 네 명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다.

2009년 이후 : 최정상급에서 한 발짝 물러나 정상급 기사
친구 원성진, 최철한, 후배 백홍석, 김지석, 박정환의 급격한 상승세와는 달리 세계대회에서는 광탈하기 바쁘고(...) 그나마 국내대회에서는 한 번씩은 우승하고 있었지만 2012년에는 무관으로 추락하기까지 했다. 곧 30대에 접어드는 만큼, 반등이 없다면 이대로 하향세에 접어들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5 2010년

농심신라면배의 패배(vs하네 나오키)로 한 해를 시작했다. 그래도 2010년 초반의 기세는 대단해서, 한동안 최다대국, 다승 부문에서 1위를 달리면서 여러 기전에서 우승을 쓸어담을 기세였다.
하지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최철한을 만나 4강에서 탈락, 비씨카드배에서는 이세돌을 만나 8강에서 탈락.A급판별기?! KBS바둑왕전에서는 늙은바둑황제 조훈현에게 패자 1회전에서 대마가 잡히면서 탈락. 2010년부터 개최되는 기전인 KT배에서는 듣보잡한웅규에게 패배하면서 16강에 그쳤다. 많은 기전에서 결승에 오르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그래도 수준급 기사라는 듯이 11월까지는 최다대국, 다승 부문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가, 연말에 최철한이 기세를 올리며[20] 결국 '86전 60승 26패 승률 70%[21]'의 성적을 거두었다.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2승 6패로 최하위를 기록했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주요 성적은

명인전 우승(vs원성진)
GS칼텍스배 도전자 결정전 진출(vs원성진)

을 제외하고는 8강 혹은 16강에서 탈락했다.
바둑리그 성적은 더 처참해서 팀은 최하위(...), 개인성적 9승 7패[22]를 거두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최상위 기사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그나마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명인전에서 우승[23]하면서 본전치기는 했다. 다만 라이벌 최철한이 맥심커피배에서 우승하고, 국수전과 천원전 결승에 진출한 것과, 한 등급 아래로 평가되던 허영호가 삼성화재배 준우승, 춘란배 4강, 바둑리그 다승 3위에 올랐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박영훈이 2010년에 부진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6 2011년

3~5위권에서 맴돌던 랭킹이 떨어지면서, 선발전을 통과해야만 국제대회 본선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이나 우승한 경험이 있는 후지쯔배 선발전에서는 이영구에게 패하면서 탈락했고, 한-중 간의 단체전인 초상부동산배에 선발되었지만 1차전에서는 콩지에, 2차전에서 류싱에게 시원하게 털리면서 국내 바둑팬들의 온갖 쌍욕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맥심커피배에서 이창호에게 패배를 안기고 우승했지만, 이창호가 2011년 들어 워낙 하락세라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현재 2관왕(명인, 맥심커피배).

작년의 부진 탓에 바둑리그에서 두번째로 티브로드에 지명되었다.굴욕 대신에 서봉수 감독은 만족한 표정.[24] 개막전에서 이창호에게 패배했지만 남은 네 경기를 싹쓸이해서 팀은 4:1로 승리하고 팀순위 1위에 등극했다. 논개?!

주요 성적은
LG배 16강 탈락
- 32강에서 이세돌(!)을 잡고도 16강에서 씨에허에게 탈락.
삼성화재배 8강 탈락
- 절친 원성진에게 탈락하였다. 그리고 원성진은 결승에서 구리까지 잡아내며 생애 첫 세계대회 우승 성공.
GS칼텍스배 준우승
- 박정환을 상대로 0:3 영봉패를 당하였다. 박정환이 만만한 상대도 아닌데다가 상승세였기 때문에 이해는 가지만, 1승도 따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외.
명인전 2연패
- 백홍석을 3:1로 이기고 그래도 명인위(位)를 방어하면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체면치레는 했다. 백홍석은 08년 기성전에 이어 또다시 박영훈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면서 생애 첫 본격기전 우승에 실패.

7 2012년

이 해에도 부진했다. 명인 타이틀을 빼앗겨버리면서 무관으로 추락(...)

8 2013년

거의 1년만에 박카스천원전에서 절친 최철한 九단을 꺾고 천원 타이틀을 따내어서 무관에서 탈출했다.

9 2016년

나이가 30대에 접어들었는데도 LG배 준우승(vs 강동윤 九단), 한국바둑리그 역대 5번째 100승 달성(vs 윤찬희 六단) 등 여러 기록을 세우고 있다. 송아지 삼총사(박영훈 최철한 원성진) 중에서 초반에는 최철한이 앞서 나갔는데 2015년 이후는 박영훈 九단이 확실히 앞서나가고 있다.

10 이야기거리

잠이 많기로 유명하다. 세계대회가 열릴 때는 선수단 가운데 잠들어 있는 박영훈 九단을 깨울 인원을 따로 배정한다고 한다. 삼성화재배에서 늦잠으로 5분을 지각하는 바람에 제한시간 10분을 공제당한 적이 있다.

우승 직후 인터뷰를 하면 거의 대부분 "좋은 기보를 남기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낙천적인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승부보다도 대국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박영훈은 승부욕이 없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린다. 유창혁 九단 또한 이 부분에 대해 지적하였다. 중요한 결승 대국에서 패배한 뒤에도, 누가 패배한 기사인지 모를 만큼 밝게 웃는다고. 바둑tv에서 아이(박영훈)가 너무 착해빠져서 바둑을 안하면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지 걱정할 정도였다고 말한 적도 있다(...) 즉 너무 낙천적이라는 것이 단점이라는 이야기.

만화 고스트 바둑왕에 등장하는 고영하의 모델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신체 특징으로, '엉덩이가 크다'는 말이 꼭 나온다. 심지어 젊은 프로기사들이 시를 짓는 대회를 연 적이 있는데, 박영훈의 엉덩이가 얼마나 큰지 묘사한 시(제목이 아예 '엉덩이')가 2등이었다고 한다.

11 타이젬 바둑

2009년 3월, 바둑사이트 타이젬에서 '철이(P)'[25]라는 아이디가 20연승을 거두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타이젬에서 20연승을 거두면 '二단 승단'을 하게 되는데, '철이(P)'는 이미 九단이었기 때문에 '十一단으로 승단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 '명예 十단으로 올려주거나 아이디 옆에 훈장을 달아주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 후지와라노 사이?

타이젬에서 유명한 중국의 프로기사 아이디인 'hua(P)', '4k_grubby(P)'[26], 'heibeil(P)' 같은 아이디[27]에게 상대전적으로 크게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종반 끝내기 실력이 매우 뛰어난 기풍이라는 것이 '철이(P)'의 대국을 본 관전자들의 평이었다. 그리고 대국 소비 시간을 볼 때 제1회 BC카드배에 참가한 기사 같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용의자아이디의 주인은 이세돌, 이창호, 강동윤, 최철한, 박영훈 등으로 좁혀졌다. 하지만 최철한이 후지쯔배와 비씨카드배 대국을 하고 있을때 '철이(P)'가 접속해서 대국을 하면서, 최철한은 제외.[28] 대다수는 박영훈이 자신의 기풍을 바꾸기 위해 타이젬에서 대국을 하고, 그 아이디가 '철이(P)'라는 분위기.

그러던 중 타이젬에서 직접 '철이(P)'와 인터뷰 를 했는데, 인터뷰에서 '철이(P)'는 자신이 '80년대 생의 20대 초반 바둑기사'이며 '대부분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그 즈음해서 방송 대국에서 보여지는 박영훈의 기풍이 '철이(P)'와 비슷해지면서, '철이(P)'=박영훈이라는 공식이 거의 굳어진 듯 하다. 어쨌든 진실은 저 너머에.

2011년 5월 9일, 타이젬에서 주최하는 세계 유일의 온라인 바둑대회[29]인 제 8회 동양증권배에서, 주최측 시드를 배정받아 실명 출전을 하게 되었다. 다른 주최측 시드 한 명은 중국의 저우루이양. 그런데 '철이(P)'는 한국의 탑랭커인데도 출전하지 않는다. 동일인물이 확실한 듯.

그리고 중국 기사인 Lings(P), whitetee, allKO(P)를 차례로 꺾으며 4강까지 진출했지만 공짱조폭(P)[30]에게 탈락하였다. 박영훈의 4강 진출은 실명출전한 프로기사 가운데 역대 최고의 성적이다.

2012년 1월 결국 박영훈 = 철이(P)임이 확정되면서[31] 2012년 5월 이후로는 철이(P) 닉네임으로 아예 타이젬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바둑팬들 중에서는 아이디를 바꾼 거 아니냐는 추측이 대세.

12 어록

이세돌 9단이 아니라 다른 어떤 프로기사가 와도 안 된다. 중국 최강 커제 9단도 알파고를 이길 수 없다., 약점을 발견할 수 있으면 행운이다. 그럼 그 약점을 다른 기사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판은 상대의 약점을 알아내기엔 너무 적다.

ㅡ 박영훈 9단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3국 인터뷰. #

Q : 알파고가 프로기사들의 동료가 될 수 있을까?

A : “물론이다. 환영한다. 알파고의 사고 방식은 정말 참신하다.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친구다.”
ㅡ 박영훈 九단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3국 인터뷰.

  1. 16세의 나이로 2001년 천원전 우승, 19세의 나이로 2004년 후지쯔배 우승을 기록하면서 생긴 별명.
  2.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大李, 이세돌을 小李라 부르고, 마찬가지로 박영훈을 大朴, 박정환을 小朴이라고 부른다.
  3. 2008년 전까지는 최철한 九단과 함께 이창호, 이세돌의 뒤를 잇는 한국 바둑의 No.3 자리를 다투었다.
  4. 자세히는, 바둑을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만 있던 중에, 박영훈이 다섯 살 되던 해 지리산을 등산하다가 산중턱에서 누나와 장기를 두는 손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응?
  5. 오죽하면, 박영훈 九단은 아마추어 시절 지방대회 본선에 진출해서 그날 밤 잠을 잘 여관을 찾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예선탈락하는 날에는 아버지가 빡쳐서그냥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버렸기 때문에.
  6. 당시 11세. 역대 최연소 아마대회우승기록.
  7. 그리고 현재는 2007년 후지쯔배에서 '뉴신산, 소신산'인 박영훈이 '원조 신산' 이창호를 꺾고 우승하면서 '신산' 타이틀을 넘겨받은 상태. 이창호 九단 본인도 사석에서 "영훈이가 나보다 끝내기나 형세판단이 나은 것 같아" 라고 인정한 적이 있다고.
  8. 김성룡 九단의 말에 의하면, 초읽기에 몰린 와중에도 초단위로 계가와 형세판단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프로기사라고 한다. 끝내기 상황에서 1집, 반집 크기도 아니고 1/16집 크기까지 계산한다고. ㅎㄷㄷ
  9. 그렇다고 중반 전투가 약한 것은 아니다. 기본 수읽기와 전투가 안된다면 애초에 일류 기사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10. 최저단(二단) 타이틀 획득 타이 기록. 종전 기록은 1972년 서봉수(당시 二단)의 명인전 우승 기록이다. 입단하고 2년만에 첫 우승을 기록했는데, 이것도 서봉수(당시 二단)의 1년8개월 다음으로 빠르다(그런데 3:1로 우승을 결정지은 마지막 판 입회인이 바로 서봉수 九단이었다). 이 성적 때문에 고영하의 모델이 된 것으로 보인다.
  11. 10대 소년이 선봉으로 나와서 구리, 왕리청, 창하오, 장쉬를 연속으로 꺾었다. 상대방의 네임밸류를 생각하면 ㅎㄷㄷ
  12. 조치훈 九단도 극단적인 실리지향의 기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 조치훈 九단에게 상대전적에서 밀리고 있다.
  13. 우승을 통해 九단으로 승단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19년 3개월) & 가장 빨리(4년 7개월만에) 九단으로 승단한 바둑기사가 된 것. '4년 7개월'은 입단 후 최단기간 세계대회 우승 기록이기도 하다. 최연소 九단 승단 기록은 이후 중국의 천야오예 九단이 경신하였고, 지금은 다시 박정환 九단이 경신하였다. 하지만 최단기간 九단 승단 / 입단 후 최단기간 세계대회 우승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이때의 우승으로 가장 중요한 병역면제도 받았다.
  14. 기성전이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중단되면서 마지막 기성이 되었다.
  15. 조한승에게 패배하여 준우승하기 전까지 기성전 4연패, GS칼텍스배 2연패에 성공하면서 도전기 무패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상대도 최철한, 이세돌, 백홍석, 원성진... ㅎㄷㄷ
  16. 한국기사 가운데 다승 5위. 조훈현, 유창혁을 제외하면 사실상의 3위. 참고로 세계대회 우승/준우승 성적도 우승 2회 준우승 1회로 한국기사 가운데 5위. 마찬가지로 조훈현, 유창혁을 제외하면 사실상의 3위이다.
  17. 한, 중, 일 전체 프로바둑기사 가운데 유효대국 40국 기준 5위.
  18. 강동윤은 후지쯔배 우승 경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이창호 잡는 기계국내용 기사에 불과하다. 문제는 스스로도 이런 이야기를 즐긴다는 것 박정환이 2011년 후지쯔배 우승에 성공했지만 확실한 S급 기사는 아니며, 김지석도 마찬가지로 아직 두고 봐야 할 듯.
  19. 콩지에에게는 상대전적 6전 전패...
  20. 2010년의 최철한은 맥심커피배·국수·천원 3관왕, 아시안게임 금메달, 농심배 4연승 등 미칠듯한 포스를 보여주였다.
  21. 최다대국 3위, 다승 4위, 승률 9위.
  22. 1지명 주장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23. 한국 바둑역사에서 역대 본좌라인(조남철, 김인,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만 우승한 기전이 명인전이다.
  24. 1지명 허영호-2지명 박영훈-3지명 김승재까지 충분히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능한 전력이다. 원래 1지명급 박영훈이 2지명으로 들어오면서 주장급 선수를 두명이나 거저 가지게 되었다.
  25. 닉네임 뒤에 붙은 (P)는 아이디의 주인이 프로기사라는 뜻이다.
  26. 마누엘 쉔카이젠이 예전 4Kings에 있을 때 사용하던 ID. 워크 좀 보셨던 듯?
  27. 아이디의 주인공은 창하오, 뤄시허, 왕레이로 추측되고 있다... 일류 중국기사들을 상대로 20연승이라니 ㅎㄷㄷ
  28. 디씨 바둑갤에 올라온 한 글에 따르면 최철한의 아이디는 '울아가(P)'라고 한다.
  29. 온라인이니까 당연히 익명이다하지만 프로끼리는 누군지 다 안다.
  30. 공짱조폭(P)의 바둑을 해설한 유창혁 九단은 전투력이 강한 최고 수준의 기사라고 말했다. 이세돌 혹은 원성진으로 추측됨. 이후 이세돌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31. 박영훈 = 철이가 확정된 경위는 확실치 않으나, 2011년 대회 이후 철이(P)가 채팅방에서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했다는 얘기가 타이젬 사이트에 올라온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