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격적인 국가의 틀을 갖춘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46년까지 현재의 알제리와 튀니지 지역에 존속했던 베르베르인의 왕국이다.
2 건국과 성장
누미디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3세기 경의 역사학자들의 기록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는데, 카르타고 서부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기록되어 있다. 누미디아는 크게 두 부족 파벌로 구성된 국가로, 동부 지역의 마실리 부족과 서부 지역의 마사에실리 부족이 각 파벌의 중심 세력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까지의 누미디아는 왕조 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양 부족의 왕인 가이아[1]와 시팍스[2]는 각기 카르타고와 로마를 동맹 대상으로 선택했으나, 기원전 206년 가이아의 뒤를 이은 마시니사가 카르타고에서 로마 쪽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시팍스는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카르타고와 손잡게 된다. 마시니사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로 남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클리엔테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결국 자마 전투에서 패배한 카르타고가 강화를 요청하게 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마시니사는 시팍스의 세력을 제압하고 누미디아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이 기원전 202년의 일이고, 이 시점에 본격적으로 왕국으로서의 누미디아가 자리잡게 되었다.
기원전 148년 마시니사가 사망할 즈음에 누미디아는 마우레타니아와 카르타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사실상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 포위된 형국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가 사실상 누미디아 왕국이 누린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3 내전과 로마와의 전쟁
마시니사 사후 그의 뒤를 승계한 미킵사가 118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왕국은 미킵사의 아들 히엠프살과 아데르발, 그리고 마시니사의 서출 계열 후손으로 알려진 유구르타에 의해 분할 승계되는데, 이후 발발한 내전으로 유구르타가 히엠프살을 살해하고 아데르발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에서 패배한 아데르발은 로마에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결국 로마의 중재로 일단 유구르타와 아데르발은 왕국을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서부 지역은 유구르타의 차지가 되었고, 동부 지역은 아데르발이 다스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균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결국 둘 사이에 내전이 다시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로마인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서 로마와 유구르타의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결국 유구르타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이 발발하는데, 초기에는 유구르타가 일부 우세를 잡으며 선전을 이어갔으나 유구르타 전쟁의 조속한 종전을 공약으로 내건 신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그의 부장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펼친 활약 앞에 결국 유구르타는 패배했고, 기원전 104년 유구르타가 처형되면서 유구르타 전쟁은 막을 내린다.
4 멸망
유구르타 전쟁 종결 이후 서부 누미디아가 이웃 왕국인 마우레타니아에 할양되면서 누미디아의 영토는 확연히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내전이 발발한 이후 왕 유바 1세가 폼페이우스 측으로 참전하면서 누미디아 왕국의 운명은 사실상 망국을 향해 가게 되었다.
초기에는 카이사르 측의 젊은 장군 쿠리오가 이끄는 북아프리카 원정군을 궤멸시키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카이사르가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기원전 46년 탑수스에서 결전, 참패하며 유바 1세는 자결을 선택한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누미디아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원전 30년부터 기원전 25년까지 유바 2세가 왕으로 재위하기도 했지만 그 일전에 로마에 의해 통치된 데다 5년만에 마우레타니아 왕으로 옮겨간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기원전 46년 유바 1세의 죽음 이후 누미디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원전 25년 이후 로마의 속주로 존속하던 누미디아는 기원후 429년부터 반달족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로마의 세력권에서 이탈, 반달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으로 잠시 동로마 제국의 산하에 들어왔다가 그 후 150여 년이 지난 698년부터는 아랍인의 공세를 받아 이슬람권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