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 전투

1 개요

BC 202년 10월[1] 19일,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격돌한 결전이자 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짓는 전투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모두 고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명장들인데다 서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인 포에니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중 하나로, 실제 활용된 전술 역시 명장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전투로 알려져 있다.

2 배경

한니발은 BC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대패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본국에서의 지원도 별로 없는데다 로마의 영토에서 싸우다보니 이탈리아 남부에 점차 고착되며 초반의 기세를 잃어간다. 한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바르카 가문의 이베리아 거점인 카르타헤나를 점령하고 일리파에서 카르타고군을 격파하는 한편,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마침내 카르타고의 본진격인 아프리카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 본국이 침공 당하자 카르타고 본국은 급히 한니발을 소환했다. 한니발은 15000명의 정예부대와 함께 귀환한 뒤, 최대한 카르타고와 가까운 곳에서 스키피오와 싸우려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동맹시들을 압박해들어가자 카르타고 의회는 한니발을 닦달하여 동맹시들을 구원하러 출동시키게 된다. 결국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5일 거리 떨어진 자마에서 스키피오군과 마주친다. 전투 전,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평화협상을 시도했으나 의견차를 조율하지는 못하여 전투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한니발은 처음부터 이 전투에서의 승산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르타고 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을 비롯한 주요 지역 양도를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거부함으로써 결국 모험을 감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니발의 예상대로였다.

3 양군의 배치와 전력

한니발은 카르타고군 보병대열을 3개 대열로 정돈했다.

1열은 리구리아(지금의 이탈리아 북서부 지역의 갈리아인), 켈트, 이베리아인에 마우레타니아 인까지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용병부대로 12,000명, 2열은 리비아와 카르타고 시민병 14,000명, 3열은 한니발 자신의 최정예인 1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기병은 좌우로 나누어서 우익에는 카르타고의 시민기병 2,000명, 좌익에는 누미디아 기병 2,000명을 배치시켰다. 여기에 추가로 코끼리 80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보병 숫자는 이렇게 보면 4만 명이지만 기록들이 좀 들쑥날쑥한 관계로 대체로 36,000~50,000명으로 추산된다(그래도 이 정도면 고대 기록치고는 꽤나 정확하게 일치하는 편이다).

로마군은 4개 군단과 이탈리아 및 기타 동맹군으로 이루어졌는데,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보병 23,000명 기병 2,500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가 보병 6,000명, 기병 4,000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따라서 로마군의 숫자는 보병 29,000~36,000명, 기병은 6,000~8,7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스키피오는 로마의 전통대로 1열은 하스타티, 2열은 프린키페스, 3열은 트리아리를 배치했다. 좌익에는 로마군 기병이, 우익에는 마시니사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이 배치되었다.

카르타고 1열의 리구리아인과 켈트인들은 모두 켈트식 무장과 전술에 익숙하였고, 이베리아 용병 역시 투창과 검을 사용하는 병사들로 켈트계와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전술을 사용하지만 멀리서 온 용병들이다보니 로마군의 맞수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로마군이 알프스 이남의 이탈리아 북부를 공격하는 동안 켈트족이 자주 로마군을 패배시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마우레타니아인은 아프리카 서부의 병사들로 전체적으로 누미디아군과 비슷한 투창을 든 경보병이었다.

2열의 카르타고 시민병과 리비아 보병은 둥근 원형 방패와 창을 이용해서 밀집 대형을 구사해서 싸우는 보병들로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와 유사하게 싸우는 병사들로 구성되는데, 카르타고 시민병이래봤자 로마군에게는 더없이 역부족. 리비아 보병들은 그래도 무장상태나 훈련에서는 나았지만 여전히 산전수전 겪은 로마 베테랑을 상대로는 무리가 있었다.

3열의 병사들이야말로 한니발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부대로,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루티 인', 즉 이탈리아 남부인으로 구성된 부대라고 한다. 하지만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많은 수는 처음부터 한니발을 따라왔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결론적으로 3열은 한니발이 로마 원정을 나설때 따라나선 베테랑 용병에 남부 이탈리아 출신 병사들이 섞인 구성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기병들은 카르타고 시민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이 각각 2,000명씩이었는데, 카르타고 시민기병은 원래 하급 귀족들에게서 징집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역시 오랫동안 제대로 된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기병들이고, 누미디아 기병은 친 시팍스파 파벌이 끌고 온 병력인데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보다 숫자에서 열세였다.

코끼리는 80마리나 있었고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 때까지 한니발이 써왔던 코끼리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하는데... 현실은 시궁창. 원래대로라면 2년 넘게 강력하게 조련시켜야 실전에서 써먹을 놈들인데 로마군이 쳐들어오니까 부랴부랴 사냥하고 끌어모아서 숫자만 채워놓아서 제대로 조련되지도 않았고, 제대로 크지도 못한 녀석들이 많았다고 한다. 흔히 생각하는 초대형 어른코끼리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로마군의 1열의 하스타티는 주로 젊은 신병들로 구성되고, 2열의 프린키페스는 보다 나이를 먹은 고참들로 구성되는데, 둘의 무장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하스타티보다 프린키페스가 일반적으로 더 중무장을 했는데, 이는 하스타티가 교전을 통해서 적을 지치게 만들면 프린키페스가 투입되어 본격적으로 적을 격멸하기 때문이다. 3열의 트리아리는 노병들로 이루어진 부대로, 3m에 이르는 긴 창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체력을 보충하다가 프린키페스가 적을 무너트리지 못하거나, 혹은 적에게 무너졌을 때 최후의 방어부대로 투입된다. 일단 숫자도 적은데다, 당시 로마 속담 중에 '트리아리까지 왔다'는 사실상 패배를 위험한 상황에 처한것을 나타낼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로마군의 기병전력인 4,0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은 뛰어난 기병으로 이름 높긴한데, 아무래도 기마술로 이름 높은 편이지 시오노 나나미가 묘사한 것처럼 실제로 지중해 최강은 아니고, 투창을 들고 적을 괴롭히다가 적이 약해지면 돌진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물론 이것으로도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고 100년 후의 유구르타 전쟁에서 로마군을 격파한 사례도 있긴 한데, 자마 전투에서 누미디아 기병은 대체로 로마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베리아 기병과 갈리아 기병을 쳐부순건 로마 기병이었다.

하지만 자마 전투에는 왕이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누미디아의 귀족 중기병들도 있었던데다 전체적으로 숫자도 우세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기병 전력은 로마군이 훨씬 우위에 있었고, 한니발은 보병 수에선 우세에 있었지만 로마 보병을 압도할 정도의 전력은 아니었다고 평가된다.

4 진행

따라서 한니발은 최대한 자신의 정예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1열과 2열 150m쯤 뒤에 3번째 대열을 편성하고 자신의 정예를 몰아 넣은 뒤, 1, 2열의 보병으로 로마군을 지치게 하고, 3열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겠다는 전술이었다. 코끼리와 기병의 활용은 어디까지나 로마군 보병 대열을 약화시키고 시간 끄는 용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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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되자 한니발은 80마리의 코끼리를 로마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한니발이 그 자신보다 뛰어난 장군이라고 평한 에피로스의 국왕 피로스는 코끼리를 좌우익에 배치해서 기병전의 예비대로 활용,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는데 한니발이 이러한 전술을 펼치지 않은게 의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피로스의 전술을 분석해본 한니발이 이 점을 생각 못했을리는 없다. 코끼리들의 훈련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기병들, 특히 투창에 능숙하고 재빠른 누미디아 기병을 상대로 제대로 활용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스키피오 형제들이 스페인에서 맞붙은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이 20개의 코끼리를 양익의 기병의 선두에 배치한 뒤 로마 기병과 맞붙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로마 기병은 이리저리 피해 코끼리를 무력화시켜 코끼리가 로마측에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아마 한니발이 이점을 우려했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코끼리를 보병에 돌진시켰는데 스키피오는 코끼리에 대한 완벽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로마군의 체스판 배열(체스판의 같은 색깔의 칸처럼 부대를 배열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경보병을 앞에 내세우고 그 뒤쪽에 병사들을 간격을 넓게 벌린 종대로 세워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코끼리가 경보병을 향해 돌진하자 경보병들은 즉시 흩어졌고, 코끼리는 로마군 대열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거나, 혹은 투창과 나팔소리에 놀라 카르타고 기병을 향해 달아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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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기병이 혼란에 빠지자 로마군 기병이 공세에 나서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하고 추격에 나섰다. 이때 카르타고 기병은 최대한 전선에서 멀리 달아났는데 이는 한니발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이는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하고 되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밀리기는 했지만 한니발은 즉시 카르타고 보병 1, 2열을 투입했다. 하지만 용병과 민병대로 로마군을 상대하는건 무리여서, 패퇴되고 만다. 하지만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후방에서 이들의 이탈을 막자, 1, 2열 부대는 자연스럽게 정예부대의 양익에서 재정렬된다. 한니발은 이 시점에서 최후의 부대를 투입했다.

한편, 스키피오의 하스타티들은 1, 2열부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키긴 했지만 적을 연달아 상대하느라 지친 상태였다. 이 때 한니발의 정예가 전진해오자 스키피오는 2, 3열의 프린키페스와 하스타티를 좌우로 늘려 한니발의 보병들과 교전한다.

전사가인 리델 하트는 '최대 횡진이 최대 화력을 보장한다'는 명제에 충실한 행동으로 보면서, 스키피오가 부대를 펼쳐 일종의 반포위 대열을 형성하여 한니발의 정예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무력화 시켰다고 평가한다.

이 때 스키피오의 대열은 중앙이 하스타티,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가 좌우익으로 기동하여 배치되었는데, 이는 카르타고 1, 2열을 상대하느라 지친 하스타티들이 한니발의 최정예 부대와 교전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를 좌우로 펼친 것은 최대 화력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니발의 1, 2열 부대가 재정렬되어 양익으로 펼쳐서 공격해왔기 때문에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열을 1열 횡대로 전환했다는 뜻이었다.

즉 한니발이 원했던 것은 보병 포위 전술이었는데 이는 격퇴되었던 1, 2열의 보병이 양익으로 재배치 된 뒤 양 측면을 에워싸고 중앙 정면엔 카르타고 보병이 공격하는 점을 노렸으며 스키피오는 이를 막기 위해 후방에 배치된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를 양 익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늘렸다는 것이었다. 혹은 한니발이 원했던 것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로마군의 1열 횡대를 강요하여 카르타고 1, 2열의 보병과의 교전으로 지친 하스타티들을 한니발의 최정예로 격파하는 중앙 돌파 시도로서 해석할 수도 있다. 한니발의 원래 의도가 이것이었다면 전투 자체는 한니발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 설명에 따르던 스키피오가 예비대를 좌우로 기동시킨 것은 그 상황에서 스키피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중 하나였다는 쪽은 양쪽 모두 동의하는 듯 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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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는데, 지친 하스타티들도 한니발의 정예를 상대로 분전했고 부대를 재정렬하고 투입된 1, 2열 부대도 로마군의 공세를 버티고 있었지만, 카르타고 기병을 추격하던 로마 기병이 언제 돌아오느냐가 양 측의 가장 큰 변수였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은 로마의 편을 들었다. 결정적인 순간 로마 기병이 되돌아와 카르타고군의 후방을 공격했고 그것으로 전투는 종결되었다. 한니발은 달아났지만 한니발의 정예는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2만 명이 넘게 전사하고[3] 부상자와 포로까지 합쳐 4만에 가까운 피해를 냈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의 전사자는 1,500명이었지만 누미디아군의 전사자와 부상자까지 합치면 손실은 약 5천 명이 달하는 치열한 전투였다.

흔히들 스키피오의 로마군 기병대가 적절한 시기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무조건 카르타고가 이겼을 거라고 하는데 그 말은 절반의 정답이다. 물론 돌아온 로마군 기병대의 후방 타격이 결정타가 된건 명백한 사실이나 그것도 로마군 중무장 보병대가 버틸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버티지 못했다면 진작에 로마군이 무너졌을 것이다. 거기에 한니발의 최정예 부대도 오랫동안 싸워서 연령이 40대 이상인 사람들이 많아서 체력 저하도 패배에 영항을 미쳤다고 한다.[4]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원인이지만 분명히 카르타고 군에게 부정적인 영항을 준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건 전투에서는 여러가지 최악의 경우라는 것들도 존재하니 단순하게 승패를 논하는건 큰 의미가 없다. 실전은 절대 장난이 아닌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그가 장군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했지만, 단지 스키피오가 더 뛰어났을 뿐이었다고 한다. 한니발 자신도 나중에 스키피오와 만났을 때 한 말을 보면 어지간히 아쉬웠던 모양이다. 나중에 한니발이 동방으로 망명하고, 스키피오가 동방 원정을 왔을 때 둘이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때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최고의 명장을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위대하고, 다음이 에페이로스의 국왕 피로스이며, 그 다음이 자신이라고 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스키피오는 당신은 자마에서 나한테 패했는데 어째서 세번째 가는 장군이라고 자처하냐고 묻자 한니발은 만약 자신이 자마에서 이기기라도 했으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5 결론

한니발도 포로가 될 뻔 했지만 살아남은 카르타고 기병과 보병들이 그를 구출하는 데 성공.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카르타고의 신성 기병대가 도착해서 그를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 카르타고 본국에 신성 기병대라는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는데 한니발을 견제한 정적들의 음모로 이 부대는 자마 전투에 불참했다라는 소문은 근거없는 것으로 신성 기병대, 신성 보병대와 같은 군이 카르타고에 있었던 적이 있었으나 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310년 전멸당한 이후 이러한 카르타고의 신성 군대는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하지만 최후의 희망이었던 한니발까지 패배하자 카르타고는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카르타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으로, 사실상 카르타고의 모든 군사력을 제한하고 해외 식민지를 빼앗은 것이다. 여기서 카르타고의 평화라는 말이 나왔는데, 패자에게 가혹한 평화 조약을 가리킨다.

이후 한니발은 반대파에 밀려 동방으로 달아나 셀레우코스 왕조에 망명을 신청했는데, 워낙 명성이 높은 장군이라 안티오코스 3세도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육군이 아니라 해군을 맡겼다. 덕분에 해전에 익숙치 못한 한니발은 한니발대로 피봤고, 안티오코스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처절한 삽질을 거듭하며 동방 최강의 군대를 말아먹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로마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한니발은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그를 견제한 원로원의 활동 때문에 말년은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고, 로마를 떠나 시골에서 살다가 기원전 183년 세상을 떴다. 유언도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짐작이 간다. 같은 해 한니발도 비티니아에 들어온 로마군이 왕에게 신병 인도를 강요하자 결국 자결을 택했다.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세력이 축소되던 중에, 누미디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활동을 일으켰지만 기회를 노리던 로마에게 찍혔다. 결국 카르타고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3년간의 저항 끝에 BC 146년 멸망했다. 로마는 주민들을 다 죽이고 55,000명만 살려둔 채 죄다 노예로 끌고 온데다, 카르타고는 불지르고 소금 뿌려서 불모지로 만들어버렸다. 나중에 카이사르가 로마의 식민시로 카르타고를 재건할 때까지 카르타고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6 그 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프롤로그가 끝나고 시작되는 오페라 <<한니발>>의 리허셜 장면이 자마 전투 하루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 같은 그 기원전 202년 10월,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몰락했다. 후일 동서양 고대 제국의 모범이 된 로마제국한나라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만들어 준 전투들이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는건 우연이지만 꽤나 흥미롭다.
  2. 스키피오는 기병들이 돌아올 때까지 한니발의 공세를 막아내면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전술 운용 시 실수를 전혀 하지 않고 한니발의 공세를 버텨냈다. 결과적으로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양 측 다 실수 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고, 보다 우월한 전력을 갖춰 싸움에 임한 로마군 측이 이긴 셈.
  3. 정예부대가 전사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용병들은 그나마 포로로 잡히거나 도망이라도 쳤지만 한니발의 정예부대는 투항하지 않고 전멸하는 길을 선택했다.
  4. 다만 카르타고 쪽만 체력 문제가 있었다고 보긴 힘들다. 로마군도 카르타고군 1,2열과 싸워 지친 하스타티들이 한니발의 정예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스타티들이 젊은 병사들로 구성되긴 했지만 경험, 무장, 훈련, 그리고 전투 당시에는 체력조차 열세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