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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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Gaius Scribonius Curio.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인물. 여담이지만 아버지와 이름이 완벽히 똑같아서 로마 시대나 서구권에서는 아버지 쿠리오, 아들 쿠리오 식으로 구분을 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아버지의 인지도가 공기에 가까운 지라 보통 쿠리오하면 아들을 지칭한다.

2 생애

정확한 생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동년배일 것으로 추정중이다. 그와 이름이 같았던 아버지는 연기자[1]라는 별명이 붙은만큼 탁월한 연설가이자 공화주의자로 키케로, 폼페이우스 등과 절친한 친구였다. 아버지에게서 이 연설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쿠리오 역시 당대 로마에서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친다. 정치성향 역시 아버지의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키케로, 폼페이우스와 깊은 친분관계를 가지는 한편 강경한 카이사르 반대파로, 로마 민회에서 카이사르를 호되게 비판하는 연설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 키케로가 쿠리오를 보는 시선은 공화정파의 꿈과 희망 그 자체.

그런데 이렇게 강경한 카이사르 반대파였던 그가 호민관에 취임한 기원전 51년을 기점으로 갑작스럽게 카이사르 지지자로 전향한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가 급작스러운 변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정 시기 역사가인 타키투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쿠리오가 지고 있던 막대한 을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쿠리오의 호감을 샀다고 전해진다.[2] 어쨌든 쿠리오 본인의 급작스러운 전향은[3] 원로원 측에게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원로원 층에서는 더러운 매수라느니, 요즘 젊은이들은 도덕심이 없다라느니(...) 하는 한탄이 가득했다.[4]

이후 쿠리오는 갈리아 총독으로 일하느라 수도 로마에서 부재중일수밖에 없던 카이사르를 대신하면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5] 카이사르 진영의 대표로 맹활약한다. 하지만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집정관 부재중 출마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다가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행하면서 사실상 카이사르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자, 안토니우스와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카이사르에게 간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이 발발했고, 내전 극초기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와 쿠리오에게 수하의 병력 일부를 떼어주면서 수도 로마로 가는 길목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고, 둘은 카이사르의 기대에 걸맞게 맹활약을 한다. 쿠리오와 안토니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카이사르는 빠르게 이탈리아를 점령했지만,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내전은 장기화됐고 카이사르는 쿠리오에게 고대 로마의 식량기지였던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할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명령에 따라 진행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쿠리오는 누미디아 왕국과 폼페이우스 파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 유언은 "카이사르의 병사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는 없소.".[6]
  1. 라틴어로는 Burbulieus
  2. 카이사르 본인도 젊었을 때 한 빚쟁이로 유명했는데, 쿠리오 본인의 빚은 카이사르보다도 1.5배 정도됐다고 한다. 청출어람
  3. 거기다 카이사르의 밀명으로 인해 쿠리오는 최대한 자기가 카이사르 지지파로 돌아선 것을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거부권을 던지면서 원로원 측에게 빅엿을 먹였다.
  4. 이 시기 키케로가 지인한테 남긴 편지를 보면 카이사르의 '보이지 않는 긴 팔'이 로마까지 뻗쳤다는 표현이 보인다. 애덤 스미스 1승 추가
  5.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전쟁 내내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활동하다가 기원전 50년에 호민관에 당선되어서 잠시 갈리아를 떠난다.
  6. 전투 도중 참패가 확실해지자 측근이 도주할 것을 제안하자 답한 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