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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일본 자민당에서 일어난 사건. 스즈키 젠코가 니카이도 스스무 부총재를 총리로 옹립하려고 한 사건이다.
1 발단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와 오히라 마사요시의 사망, 그리고 자민당의 압승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은 증대되었다. 1980년, 다나카는 오히라의 후임으로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를 총리로 내세우게 된다.
외교문제가 있었다고는 하나, 스즈키 내각에 대한 지지율은 높은편이었기 때문에 딱히 물러날 이유는 없었지만 다나카는 미일관계 악화등을 명분으로 스즈키를 총리에서 끌어내리고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총리로 세웠다. 사실상 다나카의 입김으로 장기집권도 충분히 가능했던 스즈키는 총리에서 밀려났고 이에 스즈키는 다나카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게다가 나카소네의 행태도 스즈키에게 불을 지르는 요인이 되었다. 나카소네는 취임하자마자 "전임자가 말아먹어서 내가 총리 되는 순간의 미일 관계는 9회말 2아웃과 같은 것이었어"라고 대놓고 비꼬는 발언을 하면서 스즈키의 속은 뒤집어졌다(...) 더욱이 다나카의 지원으로 총리가 된 나카소네는 내각 구성도 자신의 파와 다나카 파 일색으로 채워넣으면서 다른 파들의 불만도 팽배해진 상황이었다.
이리되자 복수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스즈키는 1984년 나카소네의 1차 임기가 종료되자 역습을 가하게 된다.
2 전개
1984년 10월 26일, 스즈키는 뜬금없이 다나카의 집을 방문했다. 총재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그 행보가 예사롭지는 않았는데 이때 스즈키가 다나카에게 제안한것은 다나카파의 2인자인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 옹립하자라는 것이었다.
사실 다나카파는 말은 안해도 다나카에게 못내 서운한 점이 있었는데 다나카가 자기 파벌에서 총리를 옹립하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이는 다나카가 다시 총리가 되고 싶은 욕심이 강했기 때문에 다나카가 다시 총리가 되기 전까진 다나카파에서 총리가 나올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나카는 타케시타 노보루등 소위 뉴리더라고 불리던 세력들을 끌어 안으면서 종래에는 다시 총리에 복귀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스즈키가 노린 점은 바로 이부분이었다. 다나카파의 2인자인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내세워서 나카소네의 재선을 막고 동시에 다나카파를 분열시켜서 종래에는 다나카를 몰락시키려는 계산이었다. 2인자가 총리가 되면 다나카도 다시 총리하겠다고 나서기는 힘들것이고 총리 출신 2인자가 자신의 독자파벌을 만들게 되면 다나카파는 자연스럽게 분열 수준을 밟게 될터였다. 그렇게 되면 당내 최대계파인 다나카파가 둘로 쪼개지고 스즈키는 자신 파벌의 2인자인 미야자와 기이치를 내세워서 그를 총리에 앉힌뒤 다나카 처럼 뒤에서 권력을 휘두려는 생각이었다.
스즈키는 치밀하게 다나카의 최대정적인 후쿠다 다케오와 미키 다케오 전 총리를 포섭하고 국가수반 지명투표를 대비해서 야당인 공명당과 민주사회당까지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는데 스즈키의 수를 읽은 다나카는 이 제안에 결사적으로 반대한데다 타케시타 노보루의 후견인인 칸마루 신도 이를 반대했고, 원래 나카소네에게 반감을 가졌던 카와모토 토시오가 타케시타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미키파를 억제해버린데다가 결정적으로 뉴리더들, 즉 후쿠다파의 아베 신타로, 스즈키파의 미야자와 기이치도 이 구상에 신중론을 주장한 탓이었다. 거기에 이 구상이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만천하에 까발려진 탓에 더이상 진행할래야 할수가 없었다.
결국 11월의 총재선거에서 후쿠다 다케오와 니카이도 스스무는 나카소네의 일방적인 당 운영등을 질타하고, 나카소네는 앞으로 당의 화합을 위해 힘쓰겠으니 한번만 도와달라고 읍소한 덕에 나카소네는 간신히 총재 재임에 성공할수 있었다.
3 결과
이 사건은 그동안 자민당을 움직여왔던 각 계파의 1세대 원로들의 퇴장을 불렀다. 스즈키, 후쿠다, 미키는 자신의 파들을 결국 차세대 주자들에게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다나카는 여전히 뒤에서 권력을 휘둘렀으나 적어도 스즈키의 계략중 다나카파를 분열시키겠다는 계략은 먹혀들어서 니카이도 옹립이 좌절되자 다나카파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다나카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원들은 타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타케시타는 다나카파의 중견 및 신진 의원들을 규합해 "창정회"를 조직했다. 이는 사실상 다나카파의 분열을 의미했고 믿었던 타케시타의 배신에 다나카는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사실상 더이상의 정치활동은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로써 6-70년대를 이끌던 자민당의 원로들은 퇴장하고 그 뒤를 타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등의 소위 뉴리더들이 이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