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다케오

1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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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첫 해인 1976년 02월 06일 식사시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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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첫 해인 1976년 02월 0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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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05월 31일. 나이 들 수록 눈꼬리가 점점 쳐지더니 거의 감겨버렸다.

福田赳夫 1905년 1월 14일 ~ 1995년 7월 5일

일본의 정치인, 의원. 제67대 총리. 91대 총리 후쿠다 야스오의 아버지.

역대 일본 총리
66대 미키 다케오67대 후쿠다 다케오68,69대 오히라 마사요시

1.1 출생부터 총리 임명까지

군마 현에서 태어났다. 최대 정적이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것과는 달리 후쿠다는 군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에도 시대에 마을의 촌장격인 쇼야(庄屋)를 대대로 지낸 집안이었다.

후쿠다는 어릴 때부터 똑똑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고등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제1고등학교를 거쳐서 명문대인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후 고등 공무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서 대장성에 들어가게 된다.

대장성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들어간지 1년도 안된 신임 관료가 재무관으로 영국 주재 일본대사관에 가서 3년여간 근무했을 정도였다. 이후 대장성의 회계국에서 승진을 거듭해 국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2차 대전 중에는 왕징웨이 괴뢰정권의 재정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쇼와전기가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뿌린 사건에 연루되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대장성에 사표를 내고 물러나게 된다.

대장성을 나온 뒤,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로 고향 군마 현의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치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한동안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이후 자민당에 입당했고 1958년 자민당 정조회장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1959년에 자민당 간사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농림수산부 장관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내각에 들어가게 된다.

1960년 이케다 하야토 총리 아래서 자민당 정조회장에 취임하지만, 이케다의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이런식으로 가면 3년 뒤에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이케다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기시가 자신의 파벌을 일부 떼어주어서 후쿠다는 이를 바탕으로 '당쇄신 연맹'을 결성했고 비주류의 입장에서 이케다와 대립했다.

사토 에이사쿠 총리 하에서 후쿠다는 차세대 주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재무장관, 당 간사장, 외무장관들을 역임하면서 세간에는 사토의 뒤를 이을 자는 후쿠다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3선을 역임한 사토는 1968년, 차기 총재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형인 기시의 직계인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넘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토의 직계였던 다나카는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빼앗기지 않기위해 사토의 4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고, 결국 사토는 네 번째로 총리를 지내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사토의 네 번째 총리임기는 후쿠다와 다나카의 보이지 않는 차기주자 경쟁이 벌어진 시기였다.(각복전쟁)

'일본열도 개조론'을 주창하며 대대적인 고도경제성장과 지역개발을 부르짖은 다나카와는 달리, 재무통이었던 후쿠다는 일본 경제가 안정에 들어선 만큼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경제정책을 주장해 차이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주장한 다나카와는 달리 후쿠다는 기시의 노선을 이어받아서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972년, 사토가 네 번째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마침내 후쿠다와 다나카는 총리직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사토파 의원 대부분을 구워 삶은 다나카였던지라 결국 결선투표에서 다나카에게 패배해 총리의 꿈이 미뤄지게 된다. 그러나 후쿠다는 총재선거 이후 "이제 곧 일본이 후쿠다를 필요로 할 때가 올것이다"라는 강경한 발언을 남겼다.

장관직에서 사임했으나, 1972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의 패배로 다나카가 초계파적인 내각구성을 하면서 행정관리청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73년, 오일쇼크와 다나카의 무리한 확장정책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다나카는 내각을 개편하면서 후쿠다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고 후쿠다는 감축정책으로 인플레를 억제하고자 노력했다. 1974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후쿠다는 다나카를 비판하면서 미키 다케오와 함께 장관직을 사임했다.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다나카의 금권정치와 록히드 사건 연루의혹을 폭로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다나카는 결국 1974년 12월에 사임했다. 본래 다나카는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총리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자민당 간사장 시나 에쓰사부로가 "국민들이 뿔나있는 상황인데 이런식으로 나가면 앞으로 뭔일이 날지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반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미키 다케오가 총리가 되게 된다.(시나 재정)

미키 내각하에서 후쿠다는 다시 부총리겸 경제기획청 장관에 임명되어 경제안정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미키가 록히드 사건의 엄정 수사를 다짐하며 다나카를 압박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다나카는 미키를 끌어내리기 위해 자민당의 모든 계파들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최대정적인 후쿠다에게도 연대를 제안했고, 총리직에 욕심이 있던 후쿠다는 이를 낼름 받아먹었다.(...) 결국 미키파와 나카소네파를 제외한 모든 자민당 계파가 반미키로 돌아섰고 1976년 선거 패배로 미키 다케오는 결국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미키 내림)

이때 후쿠다는 재빨리 손을 쓰게 되는데, 다나카와 긴밀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연대를 제안했다. 오히라도 이 제안에 응해 결국 양측 사이에 밀약이 맺어지게 된다.(오후쿠 밀약사건) 밀약의 내용은 후쿠다가 2년 총리를 한뒤에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준다.라는 것이었다. 오히라가 후쿠다와 연대해버리면서 다나카도 손을 쓸 방도가 없게 되어, 자민당 총재선거는 후쿠다가 단독 입후보해 투표없이 총재가 되었고 국가수반 지명투표에서 과반을 조금 웃도는 득표로 마침내 대망의 총리가 되게 된다.

1.2 총리 재임시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썩 좋지는 않았다.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였던지라 우익적 성향을 가진 후쿠다였던 탓에 당내는 물론 진보 성향의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힘으로라기 보다는 계파간의 밀약으로 총리가 된 탓에 신선미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 71세인 고령의 나이 탓에 과연 총리를 잘할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어린 시각도 있었다.

이런 우려를 후쿠다는 "나는 메이지 38세"라고 말하면서 젊음을 어필했는데 후쿠다가 태어난 해가 메이지 38년이라 이런 어필을 했다. 그리고 오히라를 당 간사장에 임명하고 오히라파를 입각시켜서 당내 안정을 도모했다.

1977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을 조금 웃도는 의석을 확보했고[1] 이런 승리를 바탕으로 당 밖에 지원조직인 '자유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우익 작곡가 이즈미 도시로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9월 28일, 적군파가 일본항공의 여객기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다카 일본항공기 납치사건) 이때 적군파는 몸값 600만 달러와 적군파 6명의 죄수석방을 하지 않으면 미국인 인질부터 살해하겠다고 협박했고, 후쿠다는 "사람의 목숨은 지구보다 더 무겁다"라고 말하면서 이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후쿠다의 이런 조치는 논란을 일으켰는데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뜨려서 결국 더 많은 테러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미국인 인질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한때 이로 인해 떨어졌던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재임중에 회복되었고 후쿠다는 중국과의 외교정상화와 적극적인 동남아시아 외교를 전개했다. 이는 마닐라에서 발표한 후쿠다 독트린으로 나타나게 된다. 1978년에는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해 '중일 평화우호조약'의 조인식을 가지게 된다.

당내 파벌정치의 해소를 목적으로 당원들이 참여하는 총재 예비투표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약속대로 2년이 지나 이제 밀약대로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어야 했지만 후쿠다는 "세계가 후쿠다를 원한다"허세?라면서 재선도전을 선언해버렸다. 이에 뿔이난 오히라는 다나카와 연대했고 후쿠다가 자신을 언제 쳐낼지 몰라 불안해하던 다나카는 오히라를 총리로 만들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 총재 예비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당원명부는 비공개가 원칙이었으나, 다나카는 타케시타 노보루에게 이 비공개 당원명부를 빼돌리게한 다음 자신의 조직을 풀가동해 당원들고 1:1로 접촉하면서 동시에 대량의 현질도 시전 오히라 지지를 호소했다.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깬 데에는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세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예비선거의 초반에는 후쿠다가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후쿠다는 당내 파벌해소라는 명분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다나카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고 방심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결국 여론조사와는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오히라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그래도 말 그대로 예비선거에 불과했던 탓에 후쿠다파의 소장파 의원들인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등은 본선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후쿠다는 이미 이전에 "예비선거에서 패배한 후보는 본선에 나가면 안되지 않나?"라고 말을 뱉어버린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결국 후쿠다는 "민심은 곧 천심이라지만 가끔 천심중에도 이상한 천심은 있는 모양입니다. 패장은 군사를 논하지 않는 법이지요."라고 말하며 본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후쿠다가 본선 출마를 포기한 데에는 억지를 쓰고 본선에 출마해도 결국 국회의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본선에서는 다나카의 입김으로 패할것이 뻔하기 때문에 추한꼴이 되기 전에 깨끗이 물러난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만약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깨지 않았다면 이후 다나카 천하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1.3 총리 퇴임 이후

비록 물러나긴 했으나, 다나카의 공작으로 오히라가 총리가 된것을 잘 알고 있던 후쿠다는 비주류로서 오히라와 각을 세웠다. 사실상 오히라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고 세간에는 오히라 내각은 "다나카 카게 내각"이라고까지 불리는 상황이었다. 이후 열린 선거에서 자민당이 불과 1석밖에 상실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오히라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강하게 비난했고, 오히라도 지지않고 맞서서 자민당은 사상 초유의 내홍을 겪게 된다.(시토카 항쟁)

결국 국회에서 열린 국가수반 지명투표에 관례와는 달리 자민당은 극도의 내홍으로 계파별로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나카파 등은 오히라에게 투표했고 후쿠다도 자신의 파와 지지하는 계파들을 규합해 국가수반 지명투표에 나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이후에도 후쿠다는 계속 오히라와 대립했는데 사회당이 생각없이 제출한 오히라 내각 불신임안 떡밥을 낼름 받아먹어서 자신과 지지하는 계파들을 모두 국회 본회의에 불참시켜서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게 해버렸다.(!)

이리 되자 오히라는 사상 초유의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로 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선거 초반 여론은 자민당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이 와중에 오히라 총리가 갑자기 급사하면서 여론이 급반전 되었다. 오히라가 죽은 마당에 후쿠다는 더이상 각을 세우기가 어려웠고 자민당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오히라의 사망때문에 후쿠다의 입지는 많이 약해졌고, 그 틈을 다나카가 치고 들어가 다나카는 어둠의 쇼군이라 불리며 총리를 세우고 갈아치울 정도로 뒤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다나카때문에 총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스즈키 젠코가 후쿠다, 미키등과 연합하고 야당인 공명당, 민사당과도 연대해 다나카파의 2인자인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실행했다.(니카이도 옹립구상)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자민당의 원로들이 퇴장하게 되면서 후쿠다도 차세대 주자인 아베 신타로에게 자신의 파벌을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게 된다.

리크루트 사건이 터지고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모리 등이 후쿠다를 다시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으나 후쿠다는 이미 늙었다면서 이를 고사했다.

1990년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다. 본래 후쿠다는 장남인 야스오보다는 차남인 유키오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유키오가 사고로 죽는 바람에 결국 야스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그러나 야스오가 그리 탐탁하진 않았던 후쿠다는 "저 녀석은 낯짝이 얇아서 정치는 못해"라고 늘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리가 되었다

폐기종으로 91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된다.

1.4 평가와 기타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후쿠다 다케오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더불어 치열하게 전쟁을 치룬 인물이었는데 두 사람은 출신부터 성향차가 극명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거친 후쿠다와는 달리 다나카는 농가의 아들로 밑바닥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다나카는 자연히 집안의 배경이나 자신의 경력이 일천한 탓에 문어발식으로 인맥을 넓히고 자연히 현질도 하면서 세력을 구축해 나갔는데 이런 탓에 후쿠다는 다나카와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끝내 다나카를 누르지는 못했다. 다나카는 돈과 숫자의 힘에 의존하는 정치를 했는데 후쿠다는 이를 무식하다고 보면서도 결국 현실적으로는 수의 힘에 당해낼 재간은 없었던 셈이다. 심지어는 후쿠다파 의원들 중에서도 다나카의 돈을 받아먹어서 X맨 짓을 한 의원들이 여러 있었을 정도였다니 말 다한셈.

많은 이들은 후쿠다의 가장 큰 패착을 미키 내림에 동조한것과 오히라와의 밀약을 깬 것에 두고 있다. 다나카를 밀어낼 결정적인 구도를 만들 기회가 있었지만 총리직에 대한 욕심이 이런 기회를 걷어차게 만들어서 결국 각복전쟁에서 다나카가 승리하게 된것이라는 것. 물론 미키 내림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라와의 밀약을 지켰어도 다나카를 이겼을 거라는 보장도 없기는 하지만.

정책적으로는 경제통이었던 동시에 반케인스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다나카가 과도한 성장정책으로 경제혼란을 야기했던것과는 달리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경제운용을 주장했다. 이에 더해 앞으로 세계경제가 자국 위주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돌아설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수출 위주의 일본경제가 그런 국면이 되면 어려움에 처할수 있으니 내수 시장을 키워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예상과는 다르다. 무역장벽은 공산권 붕괴에 따른 전세계적인 시장 확대, WTO 등의 이벤트 등을 거치면서 그 이후로도 점차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꼭 그런 정책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예전과는 달리 이미 일본은 70~80년대만 해도 대규모 경제를 자랑했으므로 마냥 경상수지 흑자에만 의존하는 것에도 충분히 한계가 있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2] 이는 오늘날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일본의 갈라파고스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것은 후쿠다 일지도?

동시에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였던 탓에 우익적인 성향이 강했다. 비록 다나카가 추진했던 중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완결짓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중적인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성향은 자신이 중매를 서주기도 했던 기시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에게로 고스란히 계승 되었다. 또한 총리 시절에 4번에 걸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했다. 당시로서야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이었다면 충분히 논란이 되고도 남을 문제다.

통일교의 후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재무장관 재임중인 1974년에 문선명의 강연회에 참석해 문선명과 한국식으로 포옹을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사진 통일교는 일본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탓에 여론이 좋지 않아 세간에서는 후쿠다와 통일교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후쿠다는 "나는 문선명의 사상은 잘 모르지만 나의 평소의 신조인 협조와 연대를 말하는 게 좋았을 뿐", "파티자리에서 무슨 말을 못하냐"등으로 맞섰다. 어찌어찌 넘어간것 같긴 하지만. 그러나 그때 강연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후쿠다는 "문선명은 아시아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긴 했다.(...)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를 귀여워해서 그를 후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초대 명예회장으로 취임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의 홈 구장 첫 경기에 시구를 하기도 하는등 프로스포츠 쪽과도 인연이 많았다고 한다.

2 일본의 해상자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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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地建夫. 1937년에 태어났고 1957년에 방위대학교 5기로 입학했다. 주로 호위함대 등에서 근무했으며 해상막료감부 총무부장, 마이즈루지방대 총감, 해상자위대간부학교장, 요코스카지방대 총감 등을 거쳐 1994년에 하야시자키 지아키에 이어 21대 해상막료장이 되었다. 후임자는 나쓰카와 가즈야였다. 위 사진의 오른쪽의 인물인데 퇴역 후에 어느 선상결혼식에 왔다가 찍힌 사진이다.[3]
  1. 사실 이 당시 후쿠다 다케오 총리의 지지율이 낮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당시 야당인 사회당이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오히려 내분상태에 빠진탓이 크다.
  2. 한 마디로 외국 경제가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
  3. 사진 속의 옷차림은 해상자위대 옷차림은 아니다. 이 사람은 해자대 대장 출신이고 저 옷은 어깨에 단 견장이 상선사관 선장이나 해군 대령에 해당하는 옷이다. 아마 퇴역한 인물이 해자대 제복을 입긴 그렇고 뱃사람 티 나는 옷차림을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