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소네 야스히로

souri71.jpg

AS20150501004689_comm.jpg
2015년

일본 내각총리대신
70대 스즈키 젠코71, 72, 7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74대 타케시타 노보루

재임기간은 1982년 11월 27일 ~ 1987년 11월 6일.

1 소개

中曽根康弘. 1918년 5월 27일생. 일본정치인이자 71~73대 총리. 군마 현 출신.

전후의 총리 가운데 재임기간이 4년 346일(1806일), 약 5년으로 4번째로 길었다. 사토 에이사쿠, 요시다 시게루, 고이즈미 준이치로 다음으로 길게 총리직을 지낸 것.

2 관료생활

미개의 땅 군마현 다카사키 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941년 내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해군에 들어가 구레 진수부의 주계(경리)장교로 종전 때까지 복무하였다. 일본 해군의 해산으로 소좌로 전역한 이후 내무성에 복귀했다가 1947년 중의원 총선때 고향에서 출마하여 당선에 성공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정계은퇴까지 20선 의원을 지낸다. 재밌는건 총리임에도 총리재임 당시에 1위를 하지 못했다는 것(중선거구제였기에 일단 당선은 된다.) 이유는 군마 3구에 사기캐 후쿠다 다케오가 있었다(1952년 정계 입문). 그 덕에 졸지에 군마 3구는 수십년간 계속 전현직 총리의 지역구[1]가 되었다. 하지만 야마구치 츠루우는 총리가 되지 못했다...[2]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내정되어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장관을 역임하다가 1982년 11월 자유민주당 총재에 당선되어 제71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재임 초기, 통일지방선거와 참의원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면서 순탄하게 총리직을 수행할것 같았지만. 록히드 재판의 영향으로 1983년 총선거에서 중의원 과반에서 6석 모자란 250석의 패배를 거두면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클럽과 연정을 구성하면서 내각은 무너지지 않았고, 일본경제의 활황과 더불어 지지율은 상승일로를 거듭했다. 결국 임기말인 1986년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 자민당은 역사상 최다 의석인 300석을 얻었고, 참의원 선거에서도 역사상 최대 의석인 72석을 추가해 총합 143석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소비세 신설계획을 발표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급락하여 1987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씁씁하게 패배하기도 했다. 어쨌든 소비세 신설안을 폐기한 뒤, 타케시타 노보루를 후임 자유민주당 총재로 지명하고 11월에 공직에서 퇴임하였다. 여러모로 험한꼴 안보고 갔다

3 성향

우익적인 성향이 강하여 재임 기간 중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여 한국과 중국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근데 웃긴 건 일본극우세력에게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협박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카호타이 사건참조.본격 팀킬 하지만 대체론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호시절을 보냈다. 미국 공화당로널드 레이건(1981년 ~ 1989년)과 전두환 정권(1980년~1988년) 시기와 정확히 겹치는 임기 때문에 전두환-레이건-나카소네의 한-미-일 삼국동맹은 한미일 동맹의 전성기였다. 특히 방위비 증액, 시레인 방어 등을 주장하며 자위대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PN2012010501000966.-.-.CI0003.jpg
전 두환입니다.
나 카소네요.

bcd3e3022b4390642061ad30230f7124.jpg
특히 레이건 대통령과의 관계는 서로를 '론'과 '야스'라고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특히 한일관계에서 진전을 보여, 1983년 현직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가졌고[3], 1984년에는 전두환이 답방함으로서 한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이건과 나카소네 인형은 갓 NL이 자라나던 학생운동 시위에서 동네북처럼 규탄당하고 인형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뭐, 전두환도 나름대로는 명분이 있었다. 바로 반일이 아닌 "극일". 환단고기를 강조하는 정훈교육이 이때부터 이뤄진 것도 그 맥락과 닿는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고령의 히로히토는 방일한 전두환에게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고 전한다. 일본극우들은 쇼와 폐하가 저런 이야기 한 적 없다고 또 떠들어대겠지 이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미 나카소네 임기 말부터 무역마찰[4]로 악화된 미일관계는 소원해지고, 미국의 데탕트 외교와 한국의 북방 외교가 강화되면서 한미일 삼각동맹도 이전보단 약해졌다.

보수정치인의 아이콘이고, 전두환과도 개인적으로 친하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으며, 취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4 평가

재임 중 누적된 적자로 국가재정에 압박을 주던 전매공사(현재의 일본담배산업/JT)와 전신전화공사(현재의 NTT), 일본국유철도(현재의 JR) 민영화를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

1985년플라자 합의 채택으로 엔화가 급강세를 보였고, 몇 년 못가 일본을 덮친 버블붕괴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퇴임한 후 한참 뒤에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재평가 과정에서 나온 거고, 수상 재임 당시에는 일본 경제가 절정기에 이르렀던 시절이라 소비세 드립만 빼면 평가는 굉장히 호의적인 편이었다. 실제로 당장 일본 수출이 줄어들 것만 기대하고 일본침몰만을 학수고대하던 서구 경제가들은 의외로 1989년까지 일본이 짱짱하게 버티면서 역관광당하는거 아니냐고 쇼크를 먹기도 했다는 후문. 하지만 쇼와가 죽고 헤이세이시대 일본은 멸망

재임기에 맞이한 총선에서 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두고, 전후 수상 가운데 재임기간이 네번째로 길었던 게 그냥 가능했던 게 아니다. 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추월하기 전까지는 전후 세번째 최장수 총리였으며 요시다 시게루가 2차대전 패전의 수습과 한국전쟁이라는 비상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비상 내각에 가까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이즈미 이전까지 실질적으로 전후 2번째 장수 총리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아무튼 총선의 압승도 그렇고 재임시절에는 수상으로서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여담으로 일본 총리 가운데 거의 최초로 TV를 통한 이미지메이킹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정치인. 일본인치고는 크고 당당한 체구(178cm로 역대 총리 2위[5])에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있어서인지 TV를 통한 정견 표명이나 쇼맨쉽을 발휘하는 행동이 많았으며 비교적 약한 당내 기반을 이러한 미디어 정치로 상쇄했다. 후일 등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극장형 정치'의 원조격인 인물.

애니메이션 카미츄 4화에 나오는, 무능의 끝을 달리는 총리대신은 이 사람이 모델이다. 딱히 무능총리 이미지라서는 아니고 시대배경인 1983년 당시 총리였기 때문에 걸린 것이긴 한데, 친미적 성향은 잘 나타나 있다.[6]

5 수상 퇴임 후의 행보,평생현역

하지만 퇴임 후에는 편치만은 않았다. 1989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잠시 자유민주당을 2년 가까이 탈당해야했던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렌고가 내놓은 후보에게 낙선된다는 소리[7]까지 나올정도로 열세였으나 당선되었고, 1991년에 정계 50년만에 1996년에 비례대표 종신 순번 1번을 달성하기도 했다. 본격 죽을 때까지 의원하는 정치인 결국 그가 정계 은퇴를 한 것은 고이즈미가 정년제를 주장하며 비례직 사퇴를 종용한 2003년에서야 였다. 당시 그의 나이 85세로 정계 진출 57년 만이었다.

수상 퇴임 직후인 1988년부터는 세계평화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사장을 지내고 있으며, 2005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건 아태지역의 차세대 지도자상도 시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박철희 서울대 교수, 이신화 고려대 교수, 그리고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 등이 수상한 바 있다. 특히 김태효 교수는 이명박 정부 시절 불과 40대의 나이로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으로 재직하며 주요 외교안보 현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브레인이었고, 청와대 재직 중인 2009년에 수상했다. 그러다가 2012년 한일 군사정보교류협정 체결이 막판 무산되자 문책성으로 사직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카소네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재부각되어 친일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 교수는 자신의 여러 논문에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을 강력히 지지해온 바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만 9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보수정치의 원로로 정치 현안에 대해 자주 발언하고 있다. 장남 나카소네 히로후미(1945년생)도 모리 요시로 내각의 문부대신 이래 과학기술청 장관(지금은 문부과학대신으로 합쳐진 직위), 그리고 아소 다로 자민당 내각의 마지막 외무대신을 지냈다.

080508_main.jpg
왼쪽부터 가이후 토시키, 모리 요시로, 후진타오, 나카소네, 아베 신조.우리들 가운데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 2008년 5월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방일 중 전직 총리들과의 오찬에서 찍은 사진.

2014년에는 집단적 자위권은 현 정세상 필요없다고 발언하며 아베 신조 정권을 비판했다. 아흔일곱 나이에도 정정한 일침. 하지만 신사 참배 자체는 옹호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뭐, 오래전부터 종교는 정치의 수단이었던 일본에서 이 정도면 온건우익이라 할 수 있겠다.
  1. 소선거구제 도입이전에 오부치 게이조와 후쿠다 다케오도 군마 3구에서 중의원 의원직에 당선되었다.
  2. 일본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1960년에 군마 3구에 첫출마해서 중선거구제 하에서 한번을 제외하고 모두 당선된 군마 3구의 터줏대감 중 1명이었지만 어차피 사회당이 38년간 만년야당으로 지낸지라, 총리직에 오르지는 못했고 무라야마 내각에서 장관을 지낸게 전부다.
  3. 이 회담을 성사시킨 주요인물 중 하나로 세지마 류조가 있었는데, 이 사람도 여러모로 골아픈 인물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4. 당시 나카소네 자신이 TV방송에 출연하면서 외국제 상품을 사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국민 여러분들도 외국제품을 사다 쓰세요"라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정작 국민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실, 일본 시장은 기존 브랜드 파워가 굉장히 막강하여 신규 진입자는 터무니 없는 고가 고성능/터무니 없는 저가품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고.
  5. 1위는 유일한 180cm 위너가 되는 오쿠마 시게노부
  6. 미국한테 잘 보이겠다고 삽질하다가 험한 꼴 당하는 역할.
  7. 하지만 막상 선거에서 이 후보가 낙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