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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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木武夫 1907년 3월 17일 ~ 1988년 11월 4일

역대 일본 총리
64,65대 다나카 가쿠에이66대 미키 다케오67대 후쿠다 다케오

재임 1974년 12월 9일 ~ 1976년 12월 24일

다나카의 저승사자

1 유년시절

도쿠시마현 에서 농업 겸 비료생산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도쿠시마 상업학교로 진학해 4학년 재학중 야구부 의 고시엔 출전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바자회를 개최해 성공을 거두었으나 학교측에서 이 수익을 야구부를 위한 것이 아닌 학교 전체를 위한 예산으로 전용사학비리하자 미키는 학교측에 예산사용 내역 공개를 요구하였으나 학교는 이를 거부하였고 빡친 격분한 미키는 동급생들을 이끌고 수업거부투쟁을 주도하여 학교와 마찰을 일으킨 끝에 퇴갤 강제전학 처분을 당해 고베에서 학교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도 미키에게는 도움이 된 것이 고베에서 다니던 학교의 이사장은 간사이 상계의 거물인 유우키 도요타로로, 아내도 미키를 높이 평가한 유우키의 중매로 얻었다 역시 다나카를 날려버린 위인의 패기다

이후 메이지대학 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재학중에 웅변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졸업후 잠시 남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도중에 귀국한다

2 정계입문

1937년 하야시 센쥬로 내각이 중의원 해산을 선언함과 동시에 제 20 회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때 학생이면서도 선거운동을 도운 이시다 히로히데는 나중에 미키파의 중진으로 노동상 등을 역임한다. 그리고 레프첸코에 의해서 KGB에 포섭된 인물이라고 지적당하는 등의 스캔들도 있다고.

3~40년대에 정치인 생활을 하면서 드물게 반정부적인 연설을 하였으며 기본적으로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일본 헌법의 초안작성에 참가, 미일동지회를 결성하여 개전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3 전쟁 후의 활동

1952년 일본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츠 내각에 입각하여 체신장관을 지내고 진보-보수 세력의 절충을 제안하여 하토야마 이치로 의 민주당을 거쳐 자유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1958년 제2차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으나 법안상정을 놓고 중의원과 마찰을 빚은 끝에 결국 사임했다. 미일안보조약 때도 표결에 참석하였으나 표결직전에 퇴장해 결국 표결에는 참가하지 않아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쳤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으나 오키나와에 미 해군 원자력항공모함이 주둔하는 것을 놓고 사토의 비핵 3 원칙과 어긋 난다하여 사임하는 등 자민당에 속했으나 당시로서는 진보적 성향으로서 주류 정치계와 선을 긋는 행보를 자주 보이게 된다.

그 절정이 사토 에이사쿠의 4선 도전에 저항한 것이다. 당부총재 가와시마 쇼지로의 공작으로 당내 중간파들이 사토4선을 지지하는 것에 고무되어 단독경선을 요구한 사토의 욕심에 대해 민주정치의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경선에 도전하여 사토 2선시에 얻은 득표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이 일로 총리자격이 있다고 당내외에서 인정받은 일은 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보수의 지류". 요시다 시게루를 시초로 하는 관료출신 국회의원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는 전후정치를 "보수의 본류"라고 하는 것에 빗대어 말한 것.

1972년 각복전쟁 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민주당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국 후보직을 사임하고 중일수교를 공약으로 하는 다나카 가쿠에이 를 지지하여 다나카 내각에서 부총리 겸 환경성 장관으로 선임된다.

4 미키 총리 취임

1974년 일본의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에쓰진카이(月山會)의 외로운 여왕 이라는 제목으로 문예춘추 에 다나카의 여비서 사토 아키코를 겨냥한 논평을 발표해 다나카의 금권정치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서 록히드 로 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음을 폭로해 거센 여론의 반발로 인해 다나카는 총리직을 사임하게 된다.

다나카는 후임 총리로 외무대신 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 를 지지하여 오히라를 총리로 세우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으나 당시 간사장 이였던 시에나 에츠사부로가 뇌물수수 의혹 때문에 밀려났는데 차기 총재선거 에서 이런식으로 관여하게 되면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힘들것 이라 다나카에게 노골적으로 경고를 하게되어 이런 분위기 속에 주류파벌에서 밀려난 소수세력이였던 미키를 총리로 세우게 된다.

5 록히드 사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키는 곧바로 정치개혁 을 주도하여 공직 선거법과 정치 자금법의 개혁과 함께 다나카의 체포를 결행하게 된다.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미키를 실각시키기 위한 "미키내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미키 총리는 이를 역이용 하여 더욱 다나카를 강경하게 몰아 붙였으며 당시 법무 대신이였던 이나바 오사무에 대한 지휘권 발동으로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구속하게 되는데 훗날 다나카에 대한 표적수사 였다는 비판을 두고두고 받게 되었다.

다나카 체포과 구속을 성사시켜 청렴한 미키 라는 별명으로 청렴한 정치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나 당시 자민당의 거두였던 다나카를 사법처리 했다는 것 때문에 자민당 내에서 번번이 미키퇴진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그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어 자민당의 내분과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6 말년

총리 사임 이후에도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꾸준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79년에는 오히라 마사요시의 총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퇴진을 요구하는 40일 항쟁을 주도해 오히라의 사망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건재함을 과시 했다. 1980년 고토모 도시오 에게 자신의 파벌을 넘겨주고 자민당 최고고문으로서 사실상 정계에서 물러났다. 87년에는 재임 50주년을 맞아 중의원에서 최장기 재임 의원 표창을 받았고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었다.

7 평가

총리 재임시절에는 정치자금 규제법과 공직 선거법 개정등 정치개혁을 주도하였으며 또한 일소관계 개선과 아시아 태평양 평화체제 구축[1], 배기가스 규제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을 펼처 좌파에 가까운 정치인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자유민주당 주류와는 뜻을 같이 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여 소수의 파벌을 이끌고 정치판의 한 가운데 에서 파격적인 발언과 구상으로 파란을 일으켜 당시 정계의 화약고로 꼽혔으며 때문에 당시 기자들은 유럽의 화약고 였던 발칸반도 에 빗대 미키를 발칸 정치인 이라며 조롱하고 야유 했으나 즉흥적인 제스처로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노련함을 보여 다나카 마저도 정치의 프로는 나(다나카)와 미키 뿐 이라며 극찬하기도 한다[2].

그러나 비판도 없지는 않은데, 다나카를 구속시킨뒤에 일어난 자민당내 거의 모든 계파들의 반 미키 운동때 차라리 이때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이것과 비교가 되는 사례가 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재임기간에 우정개혁을 밀어붙이자 나온 당내반발을 의회 해산 및 선거로 당내 반대세력을 일소해버리고 개혁조치를 성공시킨 것. 만약 다나카 구속- 전 계파의 미키 내림 공작- 의회해산 및 선거 크리로 갔다만 설령 다나카 개인은 당선되더라도 다나카파나 다나카를 쉴드친 계파들이 전부 붕괴했을 개연성도 없지는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미키는 의회 해산이 헌법에 맞는건지 마뜩치가 않았다라고 후에 진술한바 있다. 다시 말해서 정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헌법정신을 흔들면서까지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루고 싶지는 않았다는 이야기[3]. 이런 케이스는 일본역사에 유일하다. 덕분에 제33대 중의원 의원들은 일본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년 임기를 꽉 채우게 되었다. 하지만 결말은 자민당의 참패..

반면 고이즈미 총리가 당내의 우정개혁 반발에 의회 해산과 선거크리를 간것도 이 당시 정치 신인으로 "미키 내림"의 움직임을 보고서 반면교사로 체득한것이라고 한다.
  1.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 국민총생산의 1%를 넘지 않는 선에서 국방예산을 배정하는 것을 최초로 정했다.
  2. 사실 이는 다나카와 미키 모두 일본정치에서 있어서 당인파(黨人派-관료출신이 아닌 평당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에 다수 당선된 정치가들을 가리킨다)에 속하는 정치가였기에 나온 것이다. 다나카와 미키가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던 당시 일본의 보수정계의 주류는 요시다 시게루를 시초로 하는 관료로 장기간 근무하고 국회의원이 되는 관료파 정치였다. 직업 정치인 오오.
  3. 또한 미키퇴진을 주장하던 의원들 중에서도 대원로급인 호리 시게루는 미키를 끌어내려다가 자민당이 분당되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퇴진운동의 강경화에 제동을 걸었다. 호리 자신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분당할 때 가담했다가 선거 및 당운영 등에서 고생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으로, 호리에게 신세진 후쿠다까지 이 주장에 동조하면서 퇴진의 기세가 줄어든 것도 미키의 분당결심을 막게 되었다. 더군다나 미키가 분당의 조짐을 보인 것은 실은 퇴진운동의 김을 빼기 위한 제스처로 보는 의견도 많이 존재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