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복전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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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다나카 가쿠에이 오른쪽이 후쿠다 다케오 세기의 라이벌

角福戦争(가쿠후쿠센소- かくふくせんそう) # 일본어 위키백과

일본 현대정치사상 가장 치열했던 다나카 가쿠에이후쿠다 다케오의 15년여간의 권력투쟁을 일컫는 말이다. 어원은 가쿠에이(角榮)의 "각角"과 후쿠다(福田)의 "복福"을 따서 각복전쟁이다.

밑바닥부터 노력을 통해 올라온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던 다나카와 명문가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쿠다는 성향상 달랐던 탓에 어느정도는 계급투쟁적인 성격도 있었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그래봤자 자민당내 권력투쟁

2 1라운드

이케다 하야토에게 총리직을 물려받아 6년여간 총리에 장기집권한 사토 에이사쿠3기 6년에 걸쳐 총리했으니 이제 슬슬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나는 물러날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사토는 후계자로 친형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을 물려받은 후쿠다 타케오를 생각했지만 사토 내각에서 요직을 맡으며 무시할수 없이 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도 만만치가 않았다는게 문제였다.

한편, 다나카는 1970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사토가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물려줄것을 걱정했다. 그러자 다나카는 자민당 부총재였던 카와시마 쇼지로와 함께 사토 총리님이 계속 하셔야죠라고 사토에게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다. 이에 맞서 후쿠다도 님하 제발 지금 저한테 총리직을 물려주삼하고 사토에게 다나카를 설득하고 총리직을 물려줄것을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 사이에 다나카는 사토파의 의원 3분의 2를 자기 사람으로 돌리는데 성공해버렸다.

1972년 총재선거를 앞두고 사토는 다나카와 후쿠다를 불러 2위를 한사람이 1위를 밀어주라고 제안해 둘에게 약속을 받았지만 둘다 약속을 지키지는 않았다(...)

결국 열린 총재선거에서는 다나카와 후쿠다 외에 오히라 마사요시,미키 다케오가 출마한 가운데 다나카와 후쿠다는 156:150으로 불과 6표차로 결선 투표로 가서 다나카와 후쿠다의 1:1 대결이 되었다. 다나카는 혹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출마하면 표가 분산되어 후쿠다에게 패할것을 염려한 나머지 나카소네에게 7억엔 줄테니까 이거먹고 떨어지삼하여 나카소네의 불출마를 성사시켰고 결선투표에서는 282:190으로 다나카가 승리하여 사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나카가 오히라파등에게 현질을 시전한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라운드는 다나카 승리

3 휴전

1976년, 미키 총리가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다나카를 구속시키려고 하자, 다나카는 이에 격렬하게 맞섰다. 결국 다나카는 라이벌이었던 후쿠다에게 연합을 제안했고 후쿠다도 여기에 가세해서 다나카,후쿠다,오히라의 연합으로 미키 타케오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한다.(미키 내림)

이후 미키 총리의 후임자리를 놓고 후쿠다는 오히라와 연대하는데 이 과정에서 밀약을 맺게 되었다. (오오후쿠 밀약사건) 후쿠다가 2년 총리를 하고, 그 후에는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어 총리가 된 후쿠다는 라이벌이었던 다나카와 연대한 가운데 미키파와 나카소네파가 연대한 비주류에 맞서서 국정을 운영했다.

4 2라운드

1978년, 후쿠다는 자민당 총재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원래 오오후쿠 밀약대로라면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줘야 했지만 후쿠다는 까짓거 재선하지라며 오오후쿠 밀약을 무효화 시켜버렸다.(...)

그러자 오히라는 뿔이나서 총재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다나카는 오히라를 지원하면서 각복전쟁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후쿠다-오히라의 전쟁이었지만 오히라의 뒤에 다나카가 있었기 때문에 각복전쟁 2라운드가 된 셈이었다.

다나카에게도 이유가 있었는데 자칫 후쿠다를 내비뒀다간 후쿠다가 언제 록히드 사건을 빌미로 자신을 쳐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게다가 후쿠다와 오히라가 연대한 상황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는데 둘의 연대가 깨지면서 얼쑤 좋구나!라면서 뛰어든것.

이에 다나카는 자신의 파벌에 속한 타케시타 노보루에게 대외비이던 당원명부를 빼돌릴것을 지시했고 타케시타가 당원명부를 빼돌리자 이것을 보고 고토다 마사하루가 다나카파 의원들의 비서들을 총동원해 당원들의 집집마다 방문하고 전화로 지지를 호소하면서동시에 대량의 현질도 시전 당초 여론조사로는 후쿠다가 압도적으로 오히라를 앞서는것으로 나왔지만 막상 자민당 총재 예비선거의 결과는 748:638로 오히라가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예비선거였기 때문에 후쿠다파에 속했던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본선에 출마해서 오히라를 이기면 됩니다!라고 후쿠다에게 강권했지만 후쿠다는 패장은 군사를 논하지 않는법이라면서 본선 출마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오히라는 무투표로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어 오히라 내각이 탄생했고 후쿠다파는 비주류가 되었다. 2라운드도 다나카 승리

5 3라운드

비록 오히라가 총리가 되긴 했지만, 다나카파의 대량 현질로 된 사태라는것을 잘 알고있던 후쿠다파는 오히라 내각에 대놓고 딴지를 걸었다. 오히라도 밀약을 깬 후쿠다에게 감정이 좋을리가 없어서 양측은 내내 으르렁거렸다.

이런 가운데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248석을 확보해 이전의 의석에서 불과 1석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1] 후쿠다등의 비주류는 오히라의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총리 사임을 촉구했다. 이에 오히라는 거칠게 맞서면서 양측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결국 국회에서 열린 국가수반 투표에서 관례를 깨고 같은 자민당에서 두명의 후보인 오히라와 후쿠다가 나서는 사태가 발생한다.(시토카 항쟁)

오히라는 겨우 결선투표에서 후쿠다를 따돌리고 69대 총리가 되긴 했지만 양측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아서 사회당이 시위 차원에서 낸 오히라 내각 불신임 동의안을 후쿠다가 낼름 받아먹어서 비주류를 총동원해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는것으로 불신임 동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해프닝 해산)

이리되자 오히라는 사상 유례없는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로 정국돌파를 시도하던 중 건강이 안 좋았던터에 건강문제를 시비가 붙어 여러가지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었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선거가 끝난뒤에 사망한거라면은 양자 모두 패배하는 상황이었지만 선거운동 도중이라서 오히라의 사망으로 자민당은 내홍을 멈추고 초당적으로 선거에 임해 오히라에 대한 동정 여론에 힘입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3라운드는 무승부?

6 4라운드: 킹메이커 다나카, 후쿠다 최후의 역습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의 압승으로 자민당이 회생한 가운데 오히라 총리의 사망등으로 후쿠다는 오히라와 각을 세웠던 지난 일때문에 총리로 나서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오히라파의 중진이면서 다나카파와도 가교가 있던 스즈키 젠코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스즈키 젠코는 당의 화합을 강조하면서 취임했지만 사실상 스즈키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고 다나카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일본 정치의 흑막으로 자리잡게 된다.

스즈키 총리가 대미관계 악화와 증세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자민당의 의석수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장기집권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즈키는 1982년 10월에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차기 총재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스즈키의 사임에는 킹메이커 다나카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스즈키의 사임 1주일 전부터 차기 총리로 취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원래는 총재선거를 치루지 않고 당내 타협을 통해서 차기 총리를 옹립할 작정으로 나카소네파와(그 뒤에 있는 다나카) 후쿠다파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때 자민당 의원 타무라 켄은 총리직과 자민당 총재직을 분리할것을 제안하며 나카소네 총리-후쿠다 총재 체제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이 무산되면서 결국 총재선거가 치뤄지게 되었다. 다나카의 지원을 받는 나카소네와 후쿠다파의 차세대 주자인 아베 신타로가 대결한 가운데 다나카파,나카소네파,스즈키파의 지지로 나카소네가 당선되어 총리가 되었다.

1984년, 나카소네의 임기가 끝나고 나카소네가 총재 선거에 출마해 재선을 노리자 후쿠다는 마지막이 되는 공격을 가했다. 나카소네가 총리가 될 당시, 스즈키파에도 입각을 보장했지만 막상 나카소네 1기 내각은 다나카소네 내각이라 불릴정도로 다나카파와 나카소네파가 독점해 스즈키파의 불만은 폭발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스즈키 젠코는 후쿠다에게 다나카파의 2인자였던 자민당 부총재 니카이도 츠즈무를 총재로 옹립할것을 제안했고 후쿠다가 이에 동의했다. 여기에 야당인 공명당,민사당과도 연합했다.(니카이도 옹립구상) 이를 통해 다나카파를 분열시켜서 종국에는 나카소네의 총재 재선을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니카이도 옹립구상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사실상 후쿠다의 마지막 역습도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후쿠다 뿐만 아니라 다나카도 영향력의 쇠퇴를 절감했고 정치적 영향력은 차세대 주자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다나카파의 차세대 주자였던 타케시타 노보루와 후쿠다파의 차세대 주자였던 아베 신타로가 연대하면서 길고 길었던 각복전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4라운드도 결국 무승부

7 21세기의 각복전쟁?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나카와 후쿠다 모두 사망하면서 각복전쟁이 더이상 일어날일은 없었지만 2001년 본래 후쿠다파에 속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가 되면서 나는 경세회의 지원없이 총리가 된 최초의 인물이라고 공언하면서 다시 각복전쟁의 불이 붙나라는 관심이 집중되었다. 경세회는 요시다-사토-다나카-타케시타로 이어지는 족보를 가진 자민당내 보수주류 파벌이었기 때문에 각복전쟁 리턴매치가 성사되는게 아니냐는 관심을 모았던것. 하지만 그리 크게 붙지는 못했다.

또한 다나카의 장녀인 다나카 마키코 외무장관과 후쿠다의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고이즈미 내각의 외교정책을 놓고 대립해 각복전쟁의 재림인가라는 관심을 모으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모두 파벌의 영수는 아니었던 고로 이전의 각복전쟁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다.

2007년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가 되면서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와의 대결구도속에 각복전쟁의 재림이라는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오자와 이치로는 다나카의 애제자로 불렸기 때문. 하지만 후쿠다 야스오는 후쿠다 타케오만 하지는 못해서 아버지의 각복전쟁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여담으로 2012년 12월 16일에 열린 중의원 총선거에서 후쿠다 타케오의 손자인 후쿠다 타츠오는 무난하게 당선된 반면, 민주당 정권 몰락에 일조했다는 평을 받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딸 다나카 마키코는 낙선했다. 저승에선 후쿠다가 웃겠구만
  1. 물론 불과 1석만 잃었다고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사상최저 의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