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치가. 제 70대 총리.
일본 내각총리대신 | |||||
68, 69대 오히라 마사요시 | → | 70대 스즈키 젠코 | → | 71, 72, 7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
鈴木善幸 1911년 1월 11일 ~ 2004년 7월 19일.
1911년 이와테현에서 출생했다. 보통의 일본인은 훈독의 감각으로 "요시유키"로 읽지만, 집안의 전통이 이름에 '善'을 붙이고서 음독으로 "젠"이라고 읽었기 때문에 "젠코"로 읽는다. 선주의 아들이었지만 선주제도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기해 공산주의자라고 의심을 받아 채용이 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44년에 동원되어 전쟁에 참가했다.
1947년 일본 사회당 소속으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뒤 사회혁신당을 거쳐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민당으로 합류[1]해 보수 정치가로 변신하게 된다. 이 때 지역구의 태풍피해 복구를 위해서 당시 대장성대신이던 이케다를 열심히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케다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한 때는 지역구에서 위기상황에 빠져있던 이케다파에서 나오라고 강청을 했었으나, "이케다는 언젠가 천하를 잡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잠시 힘들다고 헤어지는 것은 말도 안된다"면서 거절하였다[2]. 여러 장관직을 거치면서 조정형의 정치인이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역구를 위해서 원래 계획에 없던 신칸센의 노선을 조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것도 조정이네
1980년 국회가 해산되고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가 열린 가운데 5월 30일, 오히라 마사요시가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자 오히라파에 속했던 스즈키는 "총리의 건강이 안좋은것 같으니 사임하고 차기 정권을 물색하자"라고 발언했다가[3] 신문을 보고 격노한 오히라에게 이 천박한 하라구로 새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기야 결과적으로는 그 정권이 스즈키에게 넘어왔으니(..)
이후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4] 차기 총리감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오히라에게 각을 세웠던 후쿠다 다케오나 고모토 도시오는 뻘쭘해지면서 총리로 나설 명분이 없었고 오히라의 친구이자 차기 유력주자였던 이토 마사요시는 친구가 죽었는데 총리할 맘이 안난다고 고사했다. 또 후임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오히라 내각불신임안에 반대했지만 아직 킹메이커였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래서 자연스럽게 오히라파에서 총리를 내게 되었는데 오히라파의 거두였던 미야자와 기이치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결국 오히라파와 다나카파의 가교역할을 하던 고인드립퍼 스즈키에게 총리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스즈키는 현질 안하고 총리된건 내가 최초 아닌가라고 후에 회고했다고.
스즈키 내각. 계단이 좁아보이는데
이전 오히라 총리 시절에 자민당이 격하게 치고박아 분당 직전까지 몰린 전례도 있고해서 스즈키 총리는 화합정치를 강조했다. 그덕에 자민당의 내홍은 이전의 각복전쟁이나 시토카 항쟁과 비교하면 이후에는 많이 얌전해졌다(...)
경제적으로 당시 일본은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적자해소 국채 발행으로 재정에 문제가 생긴 상황이었다. 오히라 총리는 증세를 추진하려고 했다가 역풍을 맞은바 있어서 스즈키는 증세론을 자제시키면서 증세없는 재정 건전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외교면에 있어서는 논란을 일으켰는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뒤 일미 동맹은 군사동맹은 아니다라고 발언했다가 미일 관계가 악화되는사태가 일어나버렸다. 또한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가 터지자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의견을 타진했다가 수구꼴통보수파들에게 할짓이 없어서 한국,중국에게 사죄하러 다니냐라는 개드립비난을 듣기도 했다. 2011년 한국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판결에 대해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사형판결 취소 안하면 북한이랑 놀까?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한일간에 정치적 밀착으로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를 압박했던 것.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적자해소 국채의 발행도 어려워지면서 사실상 증세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형편이었고 기시 노부스케 등이 대미 관계 개선을 위해 스즈키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정도로 물러날 정도는 아니었고 어쨌든 자민당내 계파 화합정치와 선거 압승으로 장기적으로 집권할수도 있긴 했다. 그러나 1982년 차기 자민당 총재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계파간의 합의에 의해서 밀려났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어차피 1983년 선거가 자민당이 꽤 참패해서 물러났어야했을테지만..
총리 사임 이후에도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나카소네 총리를 끌어내리고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츠즈무 부총재를 옹립하려는 니카이도 옹립구상을 추진했다가 실패해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결국 자기 파벌을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물려주고 이후 1990년 정계를 은퇴했다.
1992년 공화뇌물수수사건이 터지자 중의원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는데 돈은 선의의 보관자로서 맡았을 뿐이라는 발언때문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청렴한줄 알았더니
한때 만화를 좋아하는 오타쿠 정치인으로 인기를 모으다가, 끝도 없는 망언과 무능력으로 박살난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이 사람의 사위다.
2004년 폐렴으로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전쟁 전부터 사회주의의 일부로 분류되었던 조합주의에 경도되어 있었기에 전후 첫 총선거에서 사회당으로 의원당선되었는데, 좌파의 고질병인 분파행위에 질려버려서 차기 총선거에서는 불출마한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그런데, 선거구의 주민들이 선거 직전에 벌어진 태풍피해를 복구할려면 스즈키가 필요하다면서, 스즈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후보자 등록을 하고선 자기들끼리 선거운동을 한 끝에 당선시켰다! 이렇듯 정계 초기엔 포풍같은 개념 능력있는 정치인.
- ↑ 이를 안 이케다는 다음 선거에서 파벌의 총수와 대신을 겸직하는 중진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젠코의 선거구를 구석까지 돌아다녔다고.
- ↑ 다만 이 발언은 스즈키가 오히라를 끌어내리려고 했다기 보다는 오히라의 건강을 걱정해서 한말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 ↑ 오히라가 선거운동 기간 도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동정표를 대량획득하여 압승한 것으로, 오하라가 죽지않았으면 정권교체가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