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라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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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07월 02일 한껏 젊음을 발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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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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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5월 19일, 사망 23일 전. 포스그립을 과도사용한 후유증이었나.

大平正芳 1910.03.12~1980.06.12

역대 일본 총리
67대 후쿠다 다케오68, 69대 오히라 마사요시70대 스즈키 젠코

1 학창시절과 공무원 생활

가가와 현 태생. 농부의 자식으로 생활은 비교적 넉넉했다고 한다. 다만 아이가 6명이나 되는지라 중류수준의 집안이었다고 해도 생활에는 부담이 있었다고. 어렸을때는 존재감 없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년이어서 그가 정치인이 되고 총리까지 되자 어린시절의 친구들이 상당히 놀라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집안 살림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1926년 해군사관학교 에 응시했으나 하필이면 중요한 체력 검사를 앞두고 중이염에 걸리는 바람에 탈락하고 만다. 이후 해군사관학교를 단념하고 친척의 도움을 받아 다카마츠 고등 상업학교(현재의 카가와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상업학교 시절에 佐藤定吉의 영향을 받고 아버지의 죽음이나 자신의 병의 경험에서 기독교(성공회) 신앙에 귀의하여 1929년 관음사 성공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참고로 가톨릭 신자인 아소 타로, 개신교 침례교파 출신인 하토야마 이치로하토야마 유키오, 그리고 이전 역사의 총리들까지 합치면 기독교인이었던 일본 역대 총리는 총 8명 정도 된다. 학교를 졸업한후 방황을 거쳐 고향 장학회의 도움을 받아 1933년 히토츠바시 대학 에 입학한다.

졸업후 1935년 고시에 합격하여 대장성을 시작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주로 세무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1937년 요코하마 세무서장이였던 이케다 하야토의 직속 부하로서 일했던 그는 1940년대 만주 지역에서 세무와 경제정책에 관련된 일을 보았고 1943년 도쿄 세무국 관세부장으로 취임해 다시 본국에서 일하다 1951년 이케다 하야토가 대장성 장관에 임관되자 그의 비서관을 거쳐 권유를 받아 1952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본격적으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2 정계에서

1960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관방장관과 외무대신을 거치면서 몸을 낮추는 겸손한 장관으로 정평을 얻었고 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한일 국교회복에 관한 협상을 진행했고 김종필 - 오히라 메모를 작성하여 이는 훗날 한일국교 협상과 외교의 기본틀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과거사 보상문제와 경제발전을 위한 차관 제공등 한일협정 체결을 매듭지었다.

또한 미국과 주일미군핵무기 반입 문제를 마무리 지으면서 일본의 항구에 미 해군 핵잠수함이 주둔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에 일본의 원자력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미국이 묵인하는 빅딜을 성사시킴으로서 일본이 원자력을 포함한 핵무기를 보유할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는 사회당으로터 일본 열도를 핵 전쟁의 위협으로 몰고 가려 한다며 거센 비판을 받게 된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는 자민당 정조회장과 간사장을 지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상을 맡아 일-중 국교수립을 성사시키는등 1960~7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74년 다나카 내각이 임기를 마친뒤 다나카파의 새 주자로서 자민당 총재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자민당 부총재였던 시이나 에츠사부로가 다나카 전 총리가 돈밝혀서 사퇴한 마당에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또 현질 터지면 국민들이 뿔난다라는 취지로 미키 다케오를 밀어버리면서(시이나 재정) 총재선거에 낙선했다.[1]

록히드 사건 이 터지면서 미키 총리가 이를 문제 삼으며 다나카 구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자 다나카 파 VS 미키파로 자민당은 대분열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미키 총리가 당내 소수파벌 이였던 것을 이용해 다나카파 의원들은 미키를 총리직에서 끌어 내리기 위한 정치공작을 벌였고 당시 재무상이였던 마사요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자민당 간사장, 후쿠다 다케오 등과 미키를 끌어내리기 위한 작전의 선봉에 섰다.(미키 내림)

결국 1976년 자민당이 사상 처음으로 중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후쿠다 타케오가 미키 총리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는데, 사실 이 과정에서 오히라와 후쿠다 사이에는 밀약이 있었다. 후쿠다는 나를 밀어주면 2년 뒤엔 니가 총리해먹어라라는 밀약을 맺었고 그것으로 다나카파와 후쿠다파가 연합하여 후쿠다가 총리가 된것.(오오후쿠 밀약 사건) 그 대신 오히라는 간사장이 되어 2년간 다나카파-후쿠다파의 연합정권이 유지되었다.

3 총리 재임

그러나 1978년, 후쿠다는 오오후쿠 밀약을 지키지 않고 다시 총재선거에 출마해버렸다. 오히라는 이에 맞서 총재선거에 출마했는데 초반 여론조사 에서는 후쿠다가 우세했으나 막판에 다나카파가 대량의 현질을 시전 했고, 총재 예비선거에서 오히라가 우세한 결과가 나오자 결국 후쿠다는 후보직에서 사임하고 무투표로 오히라가 총리에 당선 되었다. 이때 기자회견에서 오히라는 일순간이 의미가 있는가 하면, 10년이 무의미할수도 있다라면서 오오후쿠 밀약의 허망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후 1979년 비록 상처뿐이긴 하지만 재선에 성공하면서[2] 68.69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미일방위조약을 더욱 강화하여 미-일 연합의 환태평양 안보블록 구축 구상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과밀한 일본의 도시문제의 해결에 대한 대안으로 전원도시 구상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당내에서는 주류인 다나카파와 비주류인 후쿠다파와 미키파 연합이 늘 갈등을 일으켰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입김이 강해서 다나카의 그림자 내각(角影内閣)[3]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1979년 총선에서 오히라가 증세와 소비세 문제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비주류가 과반 못되었으니 책임지고 물러나능!이라고 외치자 오히라는 의석수는 줄어들었지만 득표율은 오히려 2.7% 상승했다능! 나보고 죽으라는 거냐라면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시토카 항쟁이 터지면서 자민당은 극도의 내홍에 시달렸다.

이로인해 국가수반를 지명하는 국회 투표에서는 전례없는 자민당내 두 후보 출마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보통 일본 정치의 관례상 다수당 대표가 총리를 맡기 때문에 다수당의 대표 선거가 사실상 총리 선거나 다름없고, 그 이후에 치뤄지는 국회의 국가수반 지명투표는 형식상의 절차에 불과한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자민당이 대분열 사태를 맞아서 계파별로 다른 후보에 투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차투표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아 이후 열린 결선투표에서 오히라파, 다나카파, 나카소네파중 와타니베의 신자유클럽이 오히라를 밀고 후쿠다파, 미키파, 나카소네파 중 나카가와 그룹이 후쿠다를 밀어 격전끝에 138:121로 오히라가 간신히 승리해 69대 총리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오히라와 후쿠다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아 79년의 2차 오히라 내각은 사실상 오히라파만의 소수여당 내각이 돼버렸다. 여기에 사회당이 불을 붙여 내각불신임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러자 후쿠다 타케오는 얼쑤 좋다!라며 비주류파를 모두 동원해 동의안을 처리하는 본회의에 나가지 않아서 동의안을 통과시키게 만들었다! 사실 사회당이 불신임 동의안을 낸것은 일종의 시위의 차원이었다. 자민당이 단독과반은 아니라 해도 원내 1당이라서 설마 가결이 되겠냐?라는 생각이었지만 후쿠다 타케오가 이 떡밥을 낼름 받아먹어서 국회 해산이 돼버린탓에 선거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사회당만 벙쪄버렸다.[4] 뭐 그 당시 상황을 봤을때 오하라가 죽지않았다면(그당시 오하라 수상의 지지율이 30%에 미치지 못했다) 자민당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사회당이 집권해서 총리를 배출할수도 있었겠지만...오하라 수상이 죽으면서 집권은 안드로메다로(...) 이를 두고 민주사회당 카스카 잇코 위원장은 끊어지지 않는 톱을 자기 배에 댄 꼴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에 오히라는 중의원과 참의원 동시선거로 정국돌파를 시도했다.

4 급사

...미키 내림의 업보가 발동 했던 것일까.

1980년 5월 30일 중의원. 참의원 동시선거를 앞두고 가두연설중 급성 부정맥을 일으켜 쓰러졌으며 얼마뒤 깨어 났으나 자민당내 반주류파 였던 나카가와 이치로 의원[5]건강문제를 일으켜 오히라 총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에서 열릴 국제 선진국 정상회담에 참가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사퇴하라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서 건강도 안좋으니 그만 사표 쓰라는 얘기였다.

이에 동조한 많은 의원들이 선진국 정상회의 참가 문제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며 총리를 압박했고 심지어는 오히라파의 의원들 까지 이런 흐름에 가세했고 격분한 오히라 총리는 진짜로 건강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6] 격노한 오히라 총리는 결국 부정맥이 다시 도져 쓰러졌고 6월 12일 심근경색에 의한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오히라의 죽음은 분당직전까지 가있던 자민당을 하나로 엮게 되었다. 어쨌든 생전에는 치고박았더라도 죽은 사람하고 추태부리지는 말자였는지 주류와 비주류가 연합해 선거에 임했고 오히라의 죽음에 동정하는 여론덕분에 거의 정권교체 직전까지 갔었던 선거에서 자민당이 몰표를 받아 압승을 거두었다

총리로 재임하기 전까지는 대장성에서 근무한 경력등으로 국가 재정의 전문가로 통했다. 하지만 그외에도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여 한일 국교 정상화와 일중 국교 정상화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상당한 독서가로 그가 죽은후 고향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무려 1만 5천여권의 그가 읽은 책들을 소장하게 되었을 정도. 그리고 시토카 항쟁으로 자민당이 분당직전까지 몰렸을때 내가 사임하면 그 뒤는 누가 될것인가. 나는 맘대로 그만둘 자유가 없다. 그러나 혹 내가 죽게 된다면 그 뒤는 후쿠다가 이어야 한다라고 말해 비록 격하게 치고박기는 했어도 후쿠다 타케오를 인정했다고 한다.

묘하게 도쿄를 안좋아했던 총리였다. "도쿄 사람들은 우편번호도 못쓰는 바보", "도쿄에 3대만 살아도 바보가 된다"라는 발언 때문에 물의를 일으킨바 있다. 전원도시 구상등을 미루어보면 천성적으로 대도시 체질이 아니었을지도.

정치란 무엇이냐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내일 시드는 꽃에도 물을 주는것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고르고 13 24권 "트리폴리의 매장"에서는 오히라로 추정되는 일본 총리가 등장한다.
  1. 다나카 가쿠에이는 이를 두고 49:51로 패했다고 위로했다고 한다.
  2. 소비세 신설계획이 유권자들의 반감을 자극한게 컸다.
  3. 다나카 가쿠에이의 가쿠에이를 한자로 쓰면 角栄이 되는데 栄을 影으로 바꾼 일본식 말장난.
  4. 사실 사회당에서 이 상황을 아주 대비하지 않았던 건 아니여서 그 동안 지방선거에서 연대했던 공산당과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고 공명, 민사당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5. G7 회의 도중 취중연설을 해 사퇴했던 故 나카가와 쇼이치 전 재무대신의 부친.
  6.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의 발언을 신문에서 본 오히라는 이 천박한 하라구로 새X!라고 외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