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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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함대의 전법.
횡으로 적을 상대로 늘어선 진법. 최대 횡진이 최대 화력을 보장한다는 리델 하트의 말과 같이 함상포격전이 벌어질 때 가용 함포 전력을 최대한 전개할 수 있기 때문에 함상포격전 최상의 진형으로 불리운다.

이순신 장군이 구사하던 학익진도 이러한 단종진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이 단종진의 출발이라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유럽의 베네치아 함대에서도 학익진과 유사한 진형을 구사한 전례가 있다. 일단 역사상으로 오래된 진법이란 것이 중론이다.

함포군함의 주전력으로 자리잡은 이후로는 단종진이 사실상 전세계 해군의 표준전법이었으며,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는 쪽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 함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만약 적이 먼저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도전하지 않고 그대로 내빼는 양상이었다. 다만 적 함대를 발견하고 단종진 형성하려고 군함을 전개하다가 선빵맞고 혼란에 빠져서 박살난 사례(…)도 여러차례 있다. 이는 당시 함대의 진형이 박스형 진형이었던 까닭에 배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재빠른 단종진 형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함대원형진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거기다 바다를 지배하던 18~19세기 영국 해군은 단종진을 펼치는 적 해군을 상대로 2열, 3열씩 병행 돌격해 전열을 조각낸 다음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이기는 짓도 자주 했다. 넬슨의 유명한 해전들이 이러한 함대 운영의 대표사례. 저런 짓을 하는 게 넬슨 전문이였다.[1]

거함거포주의가 주류사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전투시에 자주 볼 수 있는 진형이었지만, 항공모함이 주력으로 등장하면서 사실상 함포전을 펼칠 때를 제외하면 구경하기 어려워졌으며, 함대의 주 위협이 잠수함 및 항공공격으로 변화됨에 따라점차 함대원형진으로 전환되었다.

그래도 태평양 전쟁 당시 접근하는 일본 해군 함대를 포착하고 미 해군 함대가 미리 단종진을 형성한 후, 압도적인 함포위력으로 발라버리는 사례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예 중 하나로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올렌돌프 제독이 지휘하던 함대가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휘하 전함 6척으로 단종진을 형성한 후 니시무라 함대를 구축함 한 척만 남겨놓고 몰살시킨 사례가 있다.

다만 과달카날 전투 당시 일본군 보급선단을 저지하려고 미리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중순양함이 함포사격을 늦게 하는 바람에 어뢰에 신나게 얻어터진 사례[2]도 있었다. 이를 무작정 단종진을 친 쪽이 유리한 것은 아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3]

현대 해군에서는 항공모함이 함대의 주력을 이루어 포격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외에도 잠수함 및 미사일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현대 해군은 함대원형진을 더 널리 사용한다.

  1. 이게 가능했던 건 당시 대포의 유효사정거리가 짧아서 격침되기 전에 적진에 난입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대포들이 폭발무기가 아니라 그냥 쇳덩어리를 나무 선체에 박아넣는 수준의 사격 방식이라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는게 아니라 파편으로 인한 승무원 살상/구조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게 당시 함포전이었다. 또 명령전달체계의 한계로 아군전열일부가 집중적으로 얻어 맞고 있는데 다른 전열의 함정들은 상황파악 및 명령미비로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제한된 숫자의 신호깃발로 지시를 전달하는데 자세하고도 신속·정확하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예 신호깃발을 못 볼 수도 있으니...
  2. 실제 일본함대는 구축함 위주로만 편성되어 있었는데, 고작 1척만 격침됐다. 반면 미 해군은 중순양함 1척 격침, 3척 대파(…)
  3. 다만 어뢰 같은 '비대칭' 화력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 순수 포격전으로는 단종진을 깨는 것이 매우 어렵다. 당장 과달카날의 사례에서도 일본군이 어뢰가 없었다면 일방적으로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